마라톤 42.195㎞ 중 30㎞는 다리 근육으로, 10㎞는 심장으로, 2㎞는 머리로, 마지막 0.195㎞는 눈물로 뛴다고 했다. 오래된 이 금언이 틀렸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난 8일 일본 나고야에서 맞바람을 맞으며 34㎞까지 달리고 나니 이미 다리와 심장, 머리는 물론이고 눈물까지 다 써버렸다. 모든 게 바닥난 자를 결승선까지 이끈 건 끊임없이 들려오는 응원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달리던 동료 주자들, 겨우내 스스로와 싸워 이겨냈던 시간이었다.
◇간이 화장실만 384개 설치된 마라톤
지난해 봄 생애 첫 하프 마라톤을 완주했다. 슬그머니 풀코스 마라톤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정작 ‘마라톤의 계절’이라 불리는 가을엔 골절상을 입어 아무 대회도 나갈 수 없었다. 지난해 11월 중순 깁스를 풀고, 가장 먼저 달릴 수 있는 대회를 찾았다. 러닝 열풍에 웬만한 국내 대회는 일찌감치 올해 상반기까지 마감이었다. 가까운 일본으로 눈을 넓혔다. 이미 ‘런트립(러닝을 결합한 여행)’이란 말이 고유명사처럼 쓰일 정도로, 해외 마라톤에 나가는 이들이 많았다. 접수 기한은 지났지만, 추가 신청을 받는 대회를 발견했다. 2026 나고야 우먼스 마라톤이었다. 세계 육상 경기 선수권 등에 나갈 일본 대표 여자 선수를 결정하는 시험대이자, 기네스북에도 등재된 세계 최대 규모의 여성 마라톤 대회다. 올해는 엘리트 선수를 포함해 1만7101명이 참가했고, 그중 약 3500명이 외국인이었다.
대회 당일, 두 가지 사항을 고려해 출발 시각보다 약 1시간 40분쯤 일찍 대회장에 도착했다. 짐 보관과 화장실 문제다. 출발선에 서기 전, 입고 온 겉옷과 지갑 등은 짐 보관소에 맡기는 게 일반적이다. 약 1만7000명의 주자가 한꺼번에 몰릴 테니 인파가 뒤엉킬 것으로 생각했다.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갔다. 1분도 안 돼 절차가 끝났다. 짐 보관 시간 자체를 사전에 A~F와 같이 조별로 나눠 지정한 데다, 그 A조를 다시 100명 단위로 세세하게 나눠 병목 현상이 생길 틈이 없었다.
화장실은 출발 지점에만 무려 384개가 일렬로 설치됐다. 그 앞에 배치된 수십 명의 자원봉사자가 마치 입국 심사장에서 길 안내하듯 대기 줄이 짧은 곳으로 신속히 안내했다. 5분도 안 돼 차례가 돌아왔다. 한 시간 이상 여유 시간이 생겨 주변을 찬찬히 돌아봤다. 출발 전 간단하게 빵이나 바나나 같은 탄수화물을 섭취하거나, 에너지 드링크를 마시는 러너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땅 어디에도 버려진 쓰레기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곳곳에 설치된 쓰레기통에 버리거나, 손에 끝까지 쥐고 있다 자원봉사자가 들고 다니는 쓰레기 봉지에 버렸다.
◇결코 품위 잃지 않던 주자들
나고야 마라톤 코스는 반테린돔에서 출발해 다시 돔으로 돌아온다. 출발선에 서자, 발 디딜 틈 없이 주로 주변을 가득 메운 응원단이 “잇떼랏샤이(いってらっしゃい·잘 다녀와요)”를 외쳤다. 응원 열기에 5㎞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이날 기온은 약 9도, 풍속 초속 6.6m 정도로 제법 강한 맞바람이 예상된 날이었다. 출발 이후에도 체온 유지를 위해 우비를 입고 있는 주자가 많았다. 출발 이후 약 1㎞까지 이 일회용 우비를 받아 주는 자원봉사자의 행렬이 이어졌다.
쓰레기 때문에 놀란 일은 달리면서 계속 이어졌다. 보통 장거리 달리기에선 에너지 고갈을 방지하기 위해 30~40분마다 에너지 젤을 먹는다. 이전에 나간 국내 대회에선 특정 구간만 되면 다 먹고 난 에너지 젤 쓰레기로 주로가 뒤덮여 ‘에너지 젤 먹는 구간이구나’를 먼저 알아채곤 했다. 이번엔 그런 일이 없었다. 달리면서도 쓰레기를 버릴 수 있도록 쓰레기통이 충분히 크고 많기도 했지만, 주자들 스스로가 ‘달리는 일이 쓰레기를 길에 함부로 버리는 것에 대한 이유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깨끗하고 배려심 넘치는 주로에선 품위와 예의가 느껴졌다.
1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가 섞여 있음에도 20㎞를 지날 때까지 걷는 사람을 쉽게 보지 못했다. 단발성이 아니라 오래 준비한 내공 있는 주자가 많이 나온 대회란 느낌을 받았다. 빠르게 치고 가는 사람은 적었지만, 모두가 꾸준하게 자신의 페이스를 지키며 뛰었다. 일본이 마라톤 강국임을 다시금 알 수 있었다.
2.5㎞마다 물과 스포츠 음료가 깔린 급수대가 총 15번 배치됐다. 급수대 길이가 충분히 긴 데다, ‘1/5’과 같은 식으로 몇 번째 급수대인지 나타내는 표지를 설치해 주자들이 한꺼번에 몰리는 걸 방지했다. 보통 몸에 저장된 에너지가 바닥난다고 하는 22.5㎞ 이후부터는 5㎞마다 양갱·팥빵·초콜릿·키시멘(나고야 명물 우동) 등이 주로에 깔렸다.
시민들의 진정성 있는 응원도 더할 나위 없었다. 주최 측에 따르면 이날 마라톤 코스 주변엔 25만명의 시민이 응원을 나왔다고 한다. 한 번도 응원이 들리지 않는 구간이 없었다. 40㎞를 지나 다시 반테린돔이 보이기 시작하자 많은 시민이 “오카에리(おかえり·어서와요)”를 외쳤다.
◇달리기를 하는 이유
풀코스 준비는 대회 100일 전부터 한 러닝 유튜버의 ‘기적의 100일’ 프로그램을 따라 했다. 100일간 이대로 하면 4시간 내에 풀코스를 완주할 수 있다고 했다. 타고난 스피드가 원체 느린 데다, 늘 시간 부족에 시달리는 워킹맘이 따라 하기엔 만만치가 않았다. 아이 등교 준비 전에는 돌아와야 하고 낮에는 일을 해야 하니 한 번도 평일엔 해 떴을 때 뛰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 부상 방지를 위해 정한 휴식일을 제외하곤, 한 달에 26일 운동화를 신었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크리스마스에도, 체감 기온이 영하 20도까지 떨어져도 달렸다. 100일간 달린 거리를 더해보니 약 700㎞였다. 보통 아마추어 러너의 경우 한 달에 누적 300㎞ 이상 뛰어야 안정적으로 풀코스를 달릴 체력과 근육이 생긴다고 한다. 내 경우 한 달로 치자면 200㎞를 조금 넘는 정도였으니, 완벽한 준비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후회 없는 준비였다.
달리기를 하며 스스로에게 가장 많이 던진 질문은 ‘나는 왜 뛰는가’였다. 나고야 마라톤 완주 기념품이 십수만원에 달하는 유명 명품 텀블러(바카라)라는 걸 안 누군가가, “그 정도면 이해가 간다”고 했다. 완주 텀블러 때문이었다면, 아마 20㎞도 못 달리고 포기했을 것이다.
풀코스를 처음 준비할 때 평소 차고 다니는 GPS 시계가 예측한 예상 기록은 5시간 20분이었다. 그보다 더 처음으로 돌아가, 2년 전 체력 회복을 위해 달리기를 시작할 땐 채 1㎞도 끝까지 뛰지 못했다. 대회 2주 전 시계는 완주 시간을 4시간 9분으로 예측했다. 꼼수와 편법이 통하지 않는, 달리기의 이 정직함이 좋았던 것 같다.
AI(시계)와 유튜버 예측치보다는 늦은 4시간 30분을 목표 시간으로 잡았다. 국내가 아닌 해외 마라톤인 데다 첫 풀코스임을 감안했다. 그러면서도 내심 전반보다 후반에 더 속력을 내는 ‘네거티브 스플릿’을 노렸으나, 어림없었다. 정확하게 연습 때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거리부터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결국 34㎞에선 오른쪽 무릎이 끊어지는 듯해 2분여간 멈춰 서야 했다. 온 다리에 파스를 뿌렸다. 자원봉사자가 나눠 주는 나고야 명물 화과자 ‘우이로우(ういろう)’를 집어 먹고 다리를 끌며 다시 주로에 섰다. 살면서 가장 많은 ‘간바레(힘내라)’와 ‘화이또(파이팅)’를 들었다. 최종 기록 4시간 25분 18초. 어느새 ‘생애 가장 긴 거리’를 통과해 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