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 매월 음력 보름날과 그믐날 전후, 바닷사람들이 말하는 ‘사리’ 때 간조 시간 즈음에는 충남 보령 무창포해수욕장(이하 무창포) 앞 바닷길이 활짝 열린다. 널리 알려진 ‘신비의 바닷길’이다. 낭만을 쏙 빼고 얘기하면 ‘바다 갈라짐 현상’, 거창하게 표현하면 ‘현대판 모세의 기적’이 일어나는 명소. 지도에는 없지만, 시시각각 변하는 물때에 맞춰 바닷길이 열리고 닫힌다. 자연의 시간표에 발맞춤해 서해가 빚어내는 풍경은 언제나 경이롭기만 하다. 봄·가을 다 좋지만, 그래도 일 년 중 무창포 여행하기에 좋은 계절을 꼽으라면 단연 봄기운이 넘실대는 바로 지금이다.
◇봄 바다 사이 ‘신비의 바닷길’을 걷다
연둣빛 파래가 소복하게 덮은 갯바위 너머 에메랄드빛 바다, 푸른 하늘 아래 해변에선 누구라도 봄기운에 쉬이 취한다. 한쪽에선 ‘무창포 주꾸미·도다리 축제’(~4월 5일)가 열리고, 사리 때 시간만 잘 맞추면 약 1.5㎞ 신비의 바닷길을 거닐어 무인도인 ‘석대도’까지 들어가 볼 수 있으니, 봄 바다에서 오감 만족 호사를 누리기에 무창포만큼 좋은 곳이 또 있을까. 얼핏 보기에 제주의 최남단 해변인 ‘사계 해변’만큼이나 봄기운이 차고 넘치는 곳이 이 즈음의 무창포다. 바다해설사인 김재열 무창포 관광협의회 사무국장 역시 “무창포는 지금부터 바지락이 한창 맛있어지는 4·5월까지, 가을에 신비의 바닷길 축제부터 추워지기 전까지가 여행하기 좋은 때”라며 “특히 4월 사리를 전후한 1~3일은 주꾸미·도다리 축제도 즐기고, 낮 시간대에 바닷길을 걸어볼 수 있어 더없이 좋은 기회”라고 ‘강추’했다. 무창포 주꾸미·도다리 축제 기간인 4월 1~3일은 오전 시간대에 신비의 바닷길 전 구간이 드러난다. 매번 물때를 맞추지 못해 무창포 여행에 실패했다면, 기억해둘 일이다.
◇갯벌 체험, 해루질 천국
지난 20일, 사리 물때에 간조 시간 맞춰 찾은 무창포 해변은 활기로 가득했다. 물이 빠지자 발아래 갯것들은 몸을 숨기느라 바쁘고, 어민들은 아무렇게나 갯벌에 털썩 앉아 바지락을 캤다. “아직은 바지락 씨알(크기)이 작아 재미가 적다”면서도 좀처럼 호미질을 멈추지는 못하는 모습이다. 오랜만에 바닷길이 다 열렸다는 소식에 일찌감치 갯벌 체험에 나선 아이들도 눈에 띄었다. “드디어 갯벌 체험의 계절이 시작돼 물때 표까지 확인하고 왔다”는 김윤혜(38)씨 일행은 “물이 빠지자마자 갯벌에 무서울 정도로 게가 많아서 깜짝 놀랐다”고 했다. 해양 생태 체험 여행지로 소문난 바다답게 펄엔 맛조개·소라게·갯가재 등이 흔하다. 운이 좋으면 해양 보호 생물인 달랑게, 갯벌을 건강하게 해주는 칠게를 비롯해 침보석갯지렁이 등도 목격할 수 있다.
자갈이나 패각이 섞여 있어 거친 감이 있지만, 바다가 갈라지며 내어준 촉촉한 바닷길에서 맨발 걷기를 하는 이도 여럿 보였다. 김 사무국장은 “간조 때 물이 천천히 빠져도 만조가 시작되면 물이 금세 차오른다”며 “석대도까지 여유롭게 오가고 싶다면 ‘(간조가 시작되기 전) 물 밟고 들어가서, (만조가 시작돼) 물 밟기 전’에 나오는 게 가장 안전하다”고 했다. 밀물이 들기 전에 해수욕장 스피커를 통해 몇 차례 안내 방송을 송출하지만, 여유를 부리다가 젖은 신발로 허둥지둥 섬을 빠져나오는 여행객도 적지 않다.
무창포는 1928년 서해안에서 최초로 개장한 해수욕장이다. 바닷길로 연결되는 석대도는 아기장군 이야기가 남아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석대도란 이름은 섬에서 태어난 아기장군이 죽었을 때 황새가 떼 지어 나타나 슬프게 울었는데 이때 황새가 앉아 울던 돌 좌대처럼 생겼다는 의미의 ‘석태도(石台島)’에서 유래했다고. 석대도는 맨손으로 어패류를 잡는 ‘해루질’ 명소로 주목받으면서 바닷길이 열리기를 기다려 찾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 무창포 부근에 있는 전망대인 ‘무창포타워’(입장료 어른 1000원)에 가면 섬 전체가 한눈에 보인다. 신비의 바닷길이 드러나는 광경을 내려다볼 수도 있다.
서해의 물때는 밤하늘이 힌트가 될 수 있다. 김 사무국장은 “보름이나 그믐달이 뜰 땐 물이 많이 빠져나가 신비의 바닷길 전 구간을 볼 수 있다”면서 “무창포를 찾기 전 밤하늘의 달 모양부터 확인해보시라”고 했다. 방문 전 무창포해수욕장 홈페이지 등에서 제공하는 물때 표를 참고하는 게 정확하다.
◇주꾸미·도다리에 멍게까지 봄맛 성찬
신비의 바닷길을 걸어나와 가볼 곳은 무창포 포구와 ‘무창포수산물시장’이다. 제철 맞은 주꾸미와 도다리를 비롯해 멍게·해삼 등 바다에서 갓 잡아 올린 싱싱한 수산물이 수조마다 가득하다. 시장 앞쪽으로 5일까지는 무창포 주꾸미·도다리 축제 행사장이 자리한다. 무창포 어촌계가 중심이 돼 여는 소규모 축제로, 순박한 어민들의 인심을 느끼기엔 부족하지 않다. 다만 “올해 주꾸미 몸값은 심상치 않다”는 소식.
무창포수산물시장의 한 상인은 “아직 어획량이 작년보다 많지는 않아 주꾸미는 시세가 kg당(3월 20일 기준) 5만~6만원 정도 된다”면서도 “주꾸미도, 도다리도 알배기가 많아 그 어느 때보다 맛은 좋다”고 했다. 또 다른 상인은 “주꾸미가 비싸다 느껴지면, 주꾸미 샤부샤부 대신 도다리쑥국에 주꾸미를 몇 마리 추가해 먹는 것도 방법”이라고 귀띔했다. 이날 도다리는 kg당 3만원 선. 주꾸미나 도다리를 사면 점포에 따라 섭섭하지 않게 해삼이나 멍게·개불 등을 서비스로 얹어 준다.
구매한 수산물은 ‘초장집’이라고 불리는 2층 식당가에서 상차림 비용만 내면 바로 요리해 반찬과 함께 상에 내준다. “탕 요리 상차림 비용은 1만5000원인데, 쑥값마저 올라 어쩔 수 없이 1만8000원을 받고 있다”고. 체감 물가가 올라 씁쓸해진 입맛은 봄바다를 닮은 도다리쑥국 한 그릇에 스르르 풀린다. 알이 꽉 찬 도다리를 넣고 끓여 국물 맛이 유난히 진하다. 여기에 타우린이 풍부하다는 주꾸미 두어 마리를 살짝 데쳐 먹으면 봄 보양식이 따로 없다.
◇섬 안의 정원, ‘죽도 상화원’ 산책
이어가 볼 곳은 무창포에서 차로 10여 분 거리에 있는 죽도 상화원(尙和園)이다. 무창포 북쪽의 대천해수욕장과 용두해수욕장 사이에 있는 죽도는 대나무가 많아서 ‘대섬’이라고도 불리던 곳. ‘조화(어울림)를 숭상한다’는 뜻의 상화원은 섬 전체가 하나의 정원으로, 죽도의 자연미를 그대로 살린 것이 특징이다. 2㎞의 섬 둘레길은 긴 회랑(corridor)이 두르고 있다. “지붕이 있는 회랑 중 세계에서 가장 길다”는 게 이곳 관계자의 설명이다. 섬 전체를 연결하는 회랑을 따라 천천히 거닐다 보면 해변의 기암괴석 위에 세운 반가사유상, 해송 숲 사이로 스며드는 오후의 햇살이 조용히 사색으로 이끈다. 남쪽 둘레길로 갈수록 문득 통영, 남해 풍경도 묘하게 겹친다. 걷는 동안 파도, 새 소리는 실컷 들을 수 있다. 따뜻한 듯 청아한 바닷바람에 건조했던 마음의 한구석이 촉촉해지는 기분이다.
섬 중심부엔 한옥 마을이 볼거리다. 구암리 가옥 안채를 비롯해 경기도 화성 관아 정자, 고창읍성의 관청, 낙안읍성의 동헌, 해미읍성의 객사 등을 이건·복원해 놓았는데 마치 원래 있었던 듯 배치가 자연스럽다. 한옥 마을 맨 위쪽 전망대를 차지한 만대루는 안동병산서원의 만대루를 재현해 놓았다. 상화원 만대루 부근에 서면 발아래 겹겹이 펼쳐지는 기와지붕이 바다의 윤슬과 어우러져 감성적인 풍광을 연출한다.
해송 숲 사이 원두막도 숨은 힐링 공간이다. 낮잠을 부르는 ‘명당’ 자리다. ‘석양정원’에서 바라보는 석양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나 매주 금~일요일과 법정 공휴일에 한해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만 개방(입장료 7000원)하니 아쉽게도 섬 내 ‘한국빌라’ 투숙객 외 일반 탐방객의 경우 운영 시간 내에 석양까지 보기는 어렵다. 보수나 대관이 있을 경우 일부 시설 이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다는 점도 참고하자.
◇일몰·야경 맛집 ‘닭벼슬섬’으로
상화원에서 미처 보지 못한 석양은 무창포에서 달래볼 일이다. 보령 9경 중 하나인 무창포에는 ‘낙조 5경’이 숨어 있다. 1경은 무창포타워, 2경은 신비의 바닷길 입구, 3경은 다리 위, 4경은 흰 등대, 5경은 닭벼슬섬이다.
이 중 최근 떠오르는 낙조 감상 명소를 꼽자면 닭벼슬섬이다. 섬 모양이 닭의 벼슬(닭볏)을 닮았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닭벼슬섬은 150m의 해상도보교인 연륙교로 이어져 낮밤, 물때와 관계없이 오갈 수 있다. 연륙교 끄트머리에 있는 전망대에 서면 탁 트인 서해가 마중 나온다. 바닷물이 찰랑거리는 계단에 앉아 파도 소리 들으며 ‘물멍’ 하기에 그만이다. 지난 20일엔 야간 경관 조명까지 더해지며 ‘신비의 닭벼슬섬’으로 변신했다. 일몰부터 야경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고 시간대별로 감상할 수 있다. 해변 모래사장에는 움직임에 감응하는 조명 ‘헤일로 비치’가 벌써 인기다. 동그란 체험 존에 서면 빨간색 하트 모양 등 다양한 미디어아트가 구현되는데, 이날 점등식에 참석한 보령시 관계자는 “앞으로 해변 프러포즈 장소로 인기를 끌 것”이라고 기대했다. 화려한 색감의 조명을 입은 체험객들 사이에선 밤하늘 아래 웃음꽃이 핀다.
닭벼슬섬 연륙교는 ‘신비의 바다 빛길’로 오갈 때마다 파도 조명이 켜지고, 닭벼슬섬은 미디어 파사드의 스크린이 돼 보령 9경에 얽힌 이야기를 조명 쇼로 풀어낸다. 야간 경관 조명이 더해지면서 닭벼슬섬과 마주한 카페 ‘시스케이프’ 테라스가 뜻밖의 ‘야경 관람 1열’이 됐다. 테라스에 앉으면 맞은편 닭벼슬섬과 눈높이를 나란히 한다. 파도 소리가 멀어지고, 하늘에 별까지 더해지니 닭벼슬섬 주변으로 하나둘 연인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어둠 속에서 시나브로 신비의 바닷길도 다시 열리기 시작했다.
[ 보령 갯벌생태관 관람, 금강암서 마음 수행... ]
무창포 주변 가볼만한 명소
미취학 어린아이를 동반한 갯벌 체험객이라면 무창포에서 차로 20여 분 거리 보령시 ‘보령문화의전당’ 2층에 있는 ‘보령 갯벌생태과학관’으로 이어가 볼 만하다. 보령 최초의 과학관으로 갯벌의 역사와 생성 과정, 갯벌의 종류부터 보령 갯벌에서 사는 해양 생물 정보까지 알기 쉽게 전시해 놓았다. 해양 생물을 터치스크린 방식으로 잡아볼 수 있는 게임 전시물이 아이들에게 인기다. 같은 층에 ‘보령박물관’이 나란히 있어 보령의 역사까지 한 번에 살펴볼 수 있다. 대천역과 보령의 옛 시장 등을 재현한 ‘근현대 재현 거리’ 전시관은 근현대생활사박물관을 압축해 놓은 것 같아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즐겁다. 교복 체험도 무료, 관람료도 무료다.
무창포에서 차로 20여 분 거리, 보령호 드라이브 코스 따라 달리다 보면 양각산(412m) 동쪽 등산로 부근에 ‘금강암’이 기다린다. 산 중턱, 배산임수 명당에 자리 잡은 금강암은 마곡사 소속의 조용한 전통 사찰. 경내에 들어서면 스님보다 ‘보살견’들이 먼저 마중 나온다. 규모는 크지 않으나 유서가 깊다. 금강암은 조선 3대 태종의 후비였던 권씨의 소원을 빌기 위한 원당(願堂)으로 무학대사의 제자인 영암 스님이 1412년(태종 12)에 건립한 것으로 보고 있다. 사찰의 내력은 극락전에 있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유산 ‘보령 금강암 석불 및 비편’의 비편(碑片)이 전한다. 6줄 241자만 남아 있는 비편 옆엔 같은 시기에 조성된 석불도 비교적 온전한 모습으로 놓여 있다. 극락전 앞 고목 안에도 불상이 숨어 있다. 내부가 텅 빈 형태의 고목 안으로 빛이 스며드는 시간대엔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 마음 수행과 기도를 위한 발걸음이 꾸준히 이어진다.
봄을 만끽하기에 개화예술공원(입장료 6000원)도 빠지지 않는다. 5만여 평의 공간에 모산조형미술관을 포함해 개화 허브랜드, 바둑이네동물원, 리리스카페 등이 들어서 있다. 4월부터는 공원에 봄꽃이 가세해 볼거리가 늘어난다. 따스한 햇살 아래 세계 각국 조각가들의 작품을 감상하며 산책을 즐기다 보면 칙칙했던 마음에도 봄날은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