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각종 '계급도'가 인터넷 밈이 됐다. 젖병과 유모차부터 시계, 가방, 대학과 아파트까지 '급'과 '서열'을 나누는 21세기 신분사회, 승자는 누구일까. /일러스트=한상엽

이 땅에서 신분제는 130여 년 전 갑오개혁으로 철폐됐다. 그런데 21세기에 ‘계급’이 부활했다.

맨 꼭대기 왕부터 양반, 중인, 평민을 거쳐 노비와 천민이 아래를 떠받치는 신분 사회가 펼쳐진다. 신라시대 중앙귀족과 지방호족, 중세 유럽의 영주와 농노, 인도 카스트인 브라만부터 수드라까지 나열되기도 한다. 수년 전부터 국내 인터넷 밈(meme·유행)이 된 각종 ‘계급도’ 얘기다.

계급도는 부동산과 학벌·재산 등 사회경제적 소속이나 사치품·생활용품 등 각종 물건에 서열을 매겨 나타낸 그림이다. 주로 삼각형 피라미드에 최상위부터 최하위 계급까지 수직적으로 표현한다. 서열표, 급지표, 티어(tier·등급)표라고도 한다.

요즘 계급도가 혈통이나 사회적 의무를 나타낸 과거의 신분제와 다른 건 그 기준이 철저히 가격, 돈이라는 점이다. 돈이 곧 신분인 사회에선 작은 물건까지 세세히 ‘급(級)’을 나눠 부(富)를 시각화한다. 누군가는 재미라지만 대다수 ‘평민’은 심란하다. 어쩌면 맨 꼭대기도 안심 못 할 수 있다. 계급도 세계관을 분석했다.

치킨부터 대학까지 ‘계급도 세계관’

직장인의 지갑 브랜드 서열을 직위에 빗대 '넘사벽급'부터 '아르바이트급'까지 나열한 그림. /인터넷 커뮤니티

대기업 부장 S씨는 새 지갑을 사볼까 하고 포털 검색창에 ‘남성 지갑’을 써넣었다가 깜짝 놀랐다. ‘남자 지갑 계급도’ ‘명품 지갑 순위표’ 같은 콘텐츠가 줄줄이 떴기 때문이다. 거기엔 100만원이 넘는 ‘사장급’부터 50만~100만원대 ‘부장급’ 등 지갑 계급이 6단계로 나뉘어 있었다.

S씨가 가진 지갑은 차장, 과장, 대리급도 아닌 10만원 미만의 ‘아르바이트급’. 그는 “나름 애착을 가진 물건인데 격에 안 맞는 급이라니 황당했다”며 “웃고 넘겼지만 그 후론 동료 앞에서 지갑을 꺼내기가 꺼려지더라”고 말했다.

당신이 아는 거의 모든 것에 계급도가 있다. 여성용 가방과 남성 시계 계급도, 침대 매트리스 계급도, 대학과 연봉, 아파트 계급도, 쿠팡 직원 계급도와 AI 시대 미래 직업 계급도까지 있다. 육아용품 중엔 유모차와 카시트는 물론이고 분유 포트, 젖병마저 계급이 있다. 감자칩과 치킨, 커피 원두도 마찬가지다.

자동차 계급도는 가격대와 브랜드 이미지, 차종별로 버전이 여러 개인데 거기에서 타이어와 창문 썬팅용품 계급도가 파생됐다. 엔진오일의 경우 ‘트러플오일급’ ‘올리브오일급’ ‘참기름급’ 등으로 나뉜다.

러닝 붐이 일면서 MZ세대를 중심으로 회자된 러닝화 계급도 중 하나. '월드클래스' '마실용' 등으로 나뉘어있다. 고성능-고가일수록 꼭대기에 있지만, 실제 개인별 특성이나 필요에 따른 성능과는 무관하다는 평가가 많다. /인터넷 커뮤니티

왜 이런 계급도가 떠도는 걸까. 일단 ‘MZ세대의 놀이 문화’라는 분석이다. 사람의 성격을 16개 유형으로 나눈 MBTI처럼 방대한 소비 정보를 단순하게 시각화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개인의 취향이나 성능이 아닌 계급으로 서열화한 정보는 뇌리에 깊이 각인된다는 점이다.

이영애 인천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한국 사회는 동질성이 높아 서로를 판단할 근거가 부족한 반면 상대를 앞서야 한다는 경쟁심은 강하다”며 “남의 가치관이나 취향을 파악하는 데 시간을 들이기보단, 한눈에 스캔할 수 있는 브랜드로 사람의 급을 나누는 문화가 계급도로 나타났다. 그런 정보는 가짜 뉴스여도 기억에 남아 수시로 꺼내 쓰기 쉬워진다”고 했다.

계급도는 계급도 세계관을 낳는다. 바로 상위 계급에 진입하려는 과시욕과 강박, ‘최하급’은 피하겠다는 방어 본능, 그리고 계급도를 소비의 지표로 삼는 추종 심리다.

회사원 박모(29)씨는 “남자친구가 달리기할 때 신을 운동화를 선물하려고 ‘러닝화 계급도’부터 찾아봤다”며 “최상위 ‘월드클래스’는 안 되더라도 ‘동네마실급’은 아니다 싶어, 30만원대 ‘국가대표급’ 중에서 골랐다”고 했다.

자전거 동호회와 업체 등에서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자전거 계급도. 가격으로 줄 세운 브랜드 서열 이미지가 짙어지다보니, 보통 자전거를 가진 입문자들이 아예 사이클링을 포기하면서 자전거 열풍이 식었다는 평가다. /인터넷 커뮤니티

인터넷 커뮤니티엔 “향수 계급도 같은 건 없느냐” “누가 위스키 계급도 좀 만들어달라” 같은 요청이 심심치 않게 올라온다. 내 취향보단 남이 알아볼 계급을 먼저 따지는 것이다.

상위 계급에 진입하지 못할 바에야 아예 소비를 포기, 피라미드를 이탈해버리기도 한다. 소위 ‘장비발’을 많이 탄다는 자전거가 대표적이다. 수천만원대 자전거가 ‘황족’ ‘왕족’으로 표시된 계급도가 퍼지면서, 최근 1~2년 새 자전거 동호회 열풍이 식고 평범한 자전거는 중고 매물로 쏟아졌다.

10대부터 시작되는 ‘서열 놀이’

계급도의 원조는 15년 전인 2011년 고등학생이 만들었다는 ‘학교 패딩 계급도’라는 게 정설이다. 노스페이스 패딩을 ‘대장급’부터 ‘찌질이’까지 5등급으로 나누고, 상위 3개 등급을 부모의 등골이 부러질 만큼 큰 부담을 지운다는 의미의 ‘등골 브레이커’로 명명한 것.

2011년 한 고교생이 만들었다는 학교 내 노스페이스 패딩 계급도. 상위 3개 계급이 '부모 등골 브레이커'에 속한다고 한다. 당시 여론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인터넷 커뮤니티

당시 여론은 청소년이 옷값으로 서열을 따지는 문화에 충격받았고 그 여파는 강렬했다. 패딩 계급도는 현재 국내외 브랜드를 통합한 성인판으로 진화, 시세와 유행을 반영해 매년 업데이트된다.

어렸을 때부터 시작되는 ‘급 나누기’는 내신 등급이 곧 정체성이 된 학교 현장과 수능 배치표로 서열화된 입시 현실을 드러낸다. ‘스카이 서성한 중경외시~’로 시작되는 대학 간판 계급도는 그 정점이다. 대학 계급도는 의대, 공대, 로스쿨, 또는 ‘인(in) 서울’과 취업 순위별로 세분화되고, 향후 연봉이나 거주지와 연계한 인생 계급도로 그려지기도 한다.

대학 계급도 중 하나. 수능 등급 배치표와 대학 계급도를 보며 등급이 곧 정체성이란 인식을 갖게 된 청소년들은 패딩과 운동화로도 '서열 나누기'를 한다. /인터넷 커뮤니티

계급도 콘텐츠에 큰 변곡점이 온 건 2020년 코로나 사태와 맞물린 부동산 폭등기 때다. 자산 가격이 요동치며 ‘벼락부자’와 ‘벼락거지’가 속출하고, 온라인 SNS는 부의 과시장이 됐다.

이때 ‘왕’ ‘사대부’부터 ‘농민’ ‘망나니’까지 서열화한 전국 광역별 부동산 급지표와 서울 구(區)별 급지표가 나오더니 연봉별 부동산 티어표와 아파트 브랜드 계급도가 쏟아졌다.

관내 초등학교 학업성취도나 고교 의대 진학 비율, 건강보험료 납입금 순위, 대기업 본사 숫자 등으로 나눈 출처 불명의 계급도까지 양산되며 ‘한국판 부동산 카스트’ ‘설국열차 부동산 버전’이란 말이 나왔다.

부동산 폭등과 자산 양극화 속에 거주지는 '집'을 넘어 '계급'이 됐다. 평당 단가로 줄 세운 2025년 버전 서울 부동산 계급도. 인터넷엔 전국 광역단위, 각 시도별, 세부 지역별 부동산 계급도가 쏟아진다. 여기에 '왕' '양반' '백정' 같은 계급명을 넣어 서민의 처지를 자조하기도 한다. /KT에스테이트

진미윤 명지대 부동산대학원 교수는 “부동산 계급도는 잦은 정책 변경에 따른 계층 하락 위험에 대한 대중의 불안을 투영한다”고 했다. 불황과 양극화로 계층 이동성이 약화할수록 거주 공간을 잘게 나눠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려는 욕구가 커진다는 것이다.

세종시 공무원 박모(46)씨는 “거주 만족도가 아닌 집값으로 계급을 나눈 콘텐츠를 한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솔직히 ‘난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고민해보게 되더라”며 “그런 계급도를 보는 것만으로도 신(新) 계급사회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비교와 경쟁이 낳은 新 계급사회

가격으로 줄 세우면서 브랜드 이미지를 추가한 여자 가방 계급도. 이런 콘텐츠는 온라인 편집숍이나 홍보업체, 유튜버 등이 시선을 끌려고 계속 제작해 유포한다. /인터넷 커뮤니티

집값 폭등과 양극화는 부동산 계급도만 낳은 게 아니다. 2020년대 초반부터 다나와 같은 가격 비교 사이트나 온라인 편집숍이 패션과 식품, 각종 생활용품까지 계급을 나눈 콘텐츠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여기에 조회 수를 터뜨리려는 유튜버와 홍보업체 등이 가세해 계급도 춘추전국시대를 열었다.

이 시기는 영화 기생충과 오징어게임, 흑백요리사 등 계층 갈등과 계급 전쟁 콘셉트를 내세운 콘텐츠가 쏟아진 때이기도 하다. 이런 콘텐츠들은 당초 한국의 압축적 경제 성장이 낳은 경쟁적 풍토와 계층 격차의 현실을 풍자했지만, 역설적으로 ‘계급’을 일상적으로 입에 오르내리는 키워드로 만들었다.

계급도 유행은 서열과 관련한 여러 신조어를 낳았다. 대표적인 것이 ‘△△계의 에르메스’ 같은 것이다. 초콜릿·식빵부터 때수건·유모차와 음식물 처리기까지 고가 명품을 뜻하는 ‘에루샤(에르메스·루이비통·샤넬)급’이라고 이름 붙인다.

또 다른 표현은 ‘미만잡(雜)’으로, 어떤 절대 강자 외에 다른 존재는 모두 별 볼 일 없다는 뜻의 비속어다. 거주지를 두고 ‘상급지·하급지’ 같은 차별적 표현이 통용되는 것도 계급도가 낳은 현상이다.

모든 계급도의 종결판은 연봉과 자산으로 줄 세운 수저 계급도다. 당신은 무슨 '수저'인가. /인터넷 커뮤니티

정신과 의사인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이를 ‘파노플리(Panoplie) 효과’로 설명했다. 파노플리는 상류층을 다 모방하지는 못하지만, 특정한 물건 하나를 소유하면 나도 그걸 쓰는 계층에 속한다는 환상을 갖는 소비 심리를 말한다.

임 교수는 “계급도를 만들고 퍼뜨리는 동기는 물건으로 나의 우월감을 확인하고 타인을 깎아내리려는 것”이라며 “계급도는 우리의 사회·경제적 불안이 그만큼 크고 정서적 여유가 없다는 방증으로, 국민 정신건강 차원에서 심각하게 봐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