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유현호

은퇴한 언론인들이 2014년 ‘관훈 클럽 영시(英詩) 공부 모임’을 만들어 매달 한 사람씩 돌아가며 시를 소개하고 토론하는 모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 모임의 홍성완 회장으로부터 작년 12월 송년회를 겸한 특별 행사로 일본 시를 소개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당시 막 출간한 저의 저서 ‘일본인 88인의 이야기’에 일본 시인 등 많은 문학인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망설이다가 응낙하여 “미야자와 겐지의 시 ‘비에도 지지 않고’를 중심으로”라는 제목으로 발표하고 이어서 토론하였습니다.

미야자와 겐지는 일본 혼슈섬의 동북단 이와테(岩手)현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전당포를 운영하며 고리대금업으로 윤택한 생활을 누렸지만, 어린 시절 겐지는 흉작으로 곤궁에 처한 농민들이 부친의 고리대금에 기대어 연명하는 모습을 보며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농민들이 살기 좋은 세상을 염원하게 됐고, 그런 바람을 작품에 담아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이와테를 이상향으로 만들고자 하는 꿈을 갖고 작품 속에 이상향을 등장시키며 그 이름을 고향 이와테의 에스페란토식 발음인 이하토보(ihatovo)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이런 뜻을 담아 쓴 글들을 모아 자비로 출판했지만 별로 팔리지 않았습니다.

겐지는 농업학교 교사를 하다가 그만두고 농촌으로 들어가 농민들에게 농업기술, 음악, 시, 동화 등을 가르쳤습니다. “온 세계가 행복하지 않으면 개인의 행복도 있을 수 없다. 온 세계가 행복해진다면 나는 어찌 되어도 좋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면서. 그는 독신으로 살다가 38세의 나이에 요절하였습니다. 겐지의 동생은 유품을 정리하던 중 그가 생전에 썼던 100여 편의 동화와 400여 편의 시를 발견하여 이를 출간하였습니다. 생전에 빛을 보지 못했던 그의 작품들이 세상에 알려지며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게 되고 또한 영감을 주었습니다. ‘은하철도의 밤’은 일본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의 모티프가 되었습니다. 그의 수첩에 적혀 있던 시 ‘비에도 지지 않고’는 국민의 사랑을 받는 시가 되었습니다. 겐지는 각종 조사에서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 3~4위 이내에 올랐으며, 그의 작품이나 삶은 “진짜 행복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현대 일본인에게 던졌습니다.

“비에도 지지 않고,/바람에도 지지 않고/눈보라에도, 여름의 더위에도 지지 않는/튼튼한 몸과 욕심 없는 마음으로/결코 화내지 않고 언제나 조용히 웃음 짓고/하루에 현미 네 홉과 된장과 나물을 조금 먹으며/모든 일에 내 잇속을 챙기지 않고/잘 보고 듣고 깨달아 그래서 잊지 않고/들판 소나무 숲 그늘 아래 작은 오두막에 살고/동쪽에 아픈 아이가 있다면 가서 돌보아 주고/서쪽에 고단한 어머니가 있다면 가서 볏짐을 날라 주고/남쪽에 죽어가는 사람이 있다면 가서 두려움을 달래주고/북쪽에 다툼이나 소송이 있다면 부질 없는 일이니 그만두라 말하고/가뭄이 들면 눈물 흘리고/추위 닥친 여름이면 걱정하며 허둥대고/모두에게 바보라 불리고, 칭찬도 듣지 않지만 걱정거리가 없는/그런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따로 해설이나 토론이 필요 없는 내용이지만 참석한 분들의 관심과 감동은 깊었습니다. 윤동주의 ‘서시(序詩)’, 미국 시인 랄프 왈도 에머슨의 ‘성공이란 무엇인가’, 영국 시인 존 던의 ‘위급한 때의 기도’를 떠올리는 시라는 등 다양한 의견이 오가고, 회원들이 일본어 외에 한국어와 영어로 낭송하여 분위기는 한층 따뜻해졌습니다.

모임이 있고 나서 며칠 후 한 지인이 자기 선배인 원로 언론인이 쓴 칼럼이라며 이를 저에게 보내주었습니다. 칼럼의 한 대목입니다. “김황식 전 총리로부터 일본의 시에 대한 강연을 듣게 되리라는 것은 전혀 상상치 못했던 일이고, 그래서 강한 호기심이 유발됐고, 듣고 난 결과는 너무 유익했습니다. … 지금의 이 황량한 한국의 정치판에서 문학을 얘기하는 전직 총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로를 받는 느낌이었습니다.”

우리 사회에 언론인들이 모여 시를 공부하는 모임이 있다는 사실로, 저도 위로를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