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자격증이 총 6만개를 돌파했다. 자격증 교육과 취득 시장은 3조원대에 달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민간자격은 취업이나 창업에 무용지물로, 구직자들의 '희망고문'이 되고 있다. /일러스트=한상엽

“드론 자격증 있으면 군대 드론병으로 갈 수 있습니까?” (20대 대학생)

“국립공원 미화직에 지원하려는데, 필요한 자격증이 있나요?” (50대 은퇴자)

최근 국민신문고에 접수된 질문들이다. 답은 둘 다 ‘아니오’다. 우선 드론병은 요즘 경쟁이 워낙 치열해 대학 전공자이면서 국가자격, 전국대회 상위권 수상 경력까지 있어야 선발권에 든다고 한다. 드론 관련 민간자격이 646개나 되지만 전혀 인정되지 않는다.

한편 공공 계약직에 가장 중요한 건 일하려는 의지와 성실함. 딱히 자격이 필요 없는데도 각종 자격증부터 들이미는 지원자들이 꽤 있다고 한다.

위 질문들의 맥락은 같다. 나의 노력과 능력에 붙은 이름표, 자격증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다. 그 뒤엔 극심한 취업난과 스펙 경쟁 속에 ‘자격증이라도 따두면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 ‘나를 증명하지 못해 도태되면 어쩌나’란 불안이 있다. 그 심리를 파고든 상술에 쓸모없는 자격증이 넘쳐나지만, 정작 ‘진짜 일’의 현장에 선뜻 뛰어드는 사람은 부족한 실정이다.

코로나 사태 당시 야외에서 열린 보험설계사 자격증 시험. /조선일보DB

AI 자격증만 800여종, 쓸모는?

한국은 자격증 대국이다. 급속한 산업화 시대의 유산이다. 소위 ‘사’자 붙는 각종 자격증에 대한 선망이 크고, 수요도 공급도 많다. 국민 생명·안전·국방에 관련되거나 국가가 관리해야 하는 특수 분야를 제외하곤 민간에서 어떤 자격증이든 만들어 정부에 등록할 수 있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에 따르면 현재 1만7520개 기관이 6만1811종의 민간자격을 등록했다. 매년 5000~6000개가 새로 생겨나고 2000여개가 사라진다. 작년엔 역대 최다인 7369개가 등록됐다.

민간자격증은 산업·사회의 변화를 민감하게 반영한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이 뜨자 ‘ESG지도사’ ‘ESG평가사’ ‘ESG컨설턴트’ 등이 273개나 쏟아졌다. 코로나 땐 ‘방역’ 자격증이 유행했다.

민간자격증은 2014년 정부에 등록만 하면서 신설 가능하게 되면서 폭증해 현재 6만개를 넘는다. 최근 불황에 따른 구직난이 심화하자 취업준비생의 불안감을 노린 자격증 시장은 더 커지고 있다. /그래픽=송윤혜 기자

요즘은 단연 AI(인공지능)가 대세다. AI 관련 한국의 국가자격은 도입되지 않은 가운데, 민간자격만 13일 현재 800여종이 난립해 있다. 대개 인공지능·메타버스 같은 이름이 붙은 단체나 개인이 등록한 것으로, AI가 자동 생성했나 싶을 정도로 우후죽순 생긴다. ‘AI스토리텔링지도사’ ‘액티브시니어AI리터러시전문가’ ‘AI 윤리지도사’ ‘생성형AI프롬프트마스터’….

이 중 지난해 응시자가 한 명이라도 있었던 AI 자격증은 단 24종. 그중에서도 탈락자가 있는 시험, 즉 합격률이 100%가 아닌 건 5개다. 태반이 교육 방식이나 취득의 효력이 검증되지 않은, ‘유령 자격증’이란 얘기다.

일부 AI 자격증엔 초등학생도 응시한다. 국가기술자격인 ‘컴퓨터활용능력’의 최신 버전으로 아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런 AI 자격을 입시에 반영하는 학교나 취업·승진에 반영하는 주요 기업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모 IT 기업 임원은 “업계에선 관련 전공, 프로젝트 경험과 논문 등을 주로 평가한다”며 “이상한 AI 자격증을 이력서에 썼다간 되레 감점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 공대 교수는 “요즘 기계기사·전기기사 같은 국가자격도 취업난 앞에선 무력한데 AI 민간자격이 무슨 쓸모가 있겠느냐”며 “미·중이 AI 기술 변혁을 이끌고 각국이 AI 시대에 걸맞은 철학과 제도를 정비하느라 바쁜데, 한국은 말장난 같은 AI 자격증만 판치고 있다”고 했다.

3조 돈 잔치 된 자격증 시장

2014년 아동 애니메이션 '헬로카봇'의 주인공 차탄의 엄마인 전다해 여사. 전업주부임에도 온갖 자격증 500개를 보유한 수퍼우먼인데, 실제 당시 정부등록제로 대폭 완화해 급증한 민간자격증 시장을 풍자했다. /헬로카봇

자격증은 불황을 먹고 자란다. 창업·취업 시장에서 조금 뜬다 싶으면 자격증부터 생긴다. 중장년층 스포츠로 인기인 ‘파크골프’가 대표적이다. 파크골프 지도자·심판·관리자·마스터 등 227개 자격증을 지난해 1만여명이 받아가 ‘취득자 1위’를 기록했다. 이어 애견미용사 취득자 7000여명, AFPK(재무설계사) 2000여명 순이다. 이들의 취업 여부나 수익은 검증되지 않았다.

5412개나 되는 커피 바리스타 자격증은 카페 창업에는 필요 없지만 창업 희망자를 유혹하기엔 좋다. 일산에 사는 60대 주부 이모씨는 수십만원을 내고 바리스타 자격증 과정을 이수했지만 몇 차례 봉사활동 때 말고는 꺼낼 일 없는 ‘장롱 자격증’이 됐다. 그는 “뭔가 해냈다는 성취감은 있었다”고 했다.

대전의 30대 여성 최모씨는 200여만원을 들여 방과후독서지도사 1급까지 땄지만 “교육 실무 경력이 없으니 자격증만으론 서류 심사에서 자꾸 탈락하더라”고 했다.

민간자격 시장은 자격증 학원 배만 불리는 구조다. 오랜 침체로 자격증 소지자를 고용하는 기업은 적어졌는데, 자격증 양산을 수익 모델로 삼은 각종 학원과 협회, 사단법인만 늘어났다.

한국소비자원은 “자격증 운영자의 과장 광고와 관리 부실에 대한 피해 접수가 2025년 전년 대비 95% 늘었다”면서 “소비자들은 자격 공인 여부와 환불 기준을 계약 전 확인해야 한다”고 밝혔다.

한국소비자원은 민간자격증 업체들의 과장 광고와 계약 불이행 등에 대한 소비자 피해접수가 지난해 전년 대비 2배 가까이 늘어났다고 밝혔다. 소비자원이 밝힌 오인성 광고 주요 사례. /한국소비자원

‘한국자격증△△’라는 온라인 업체는 자신들이 만든 자격증 200여개에 정부 태극마크를 달고 ‘취업 100% 보장’이라 광고한다. ‘수강료 0원 이벤트’ ‘선착순 50명 응시료 감면’으로 유혹한 뒤 자격증 발급 수수료 8만원을 요구한다. 고작 몇 분 걸리는 인터넷 강의와 시험의 질은 논할 수준이 안 된다. ‘8만원짜리 자격증 자판기’나 다름없다.

경기도 소재 S대학은 자체 자격증을 325개나 등록했는데, 종목별 응시자 수와 합격자 수를 대조해보니 모조리 똑같았다.

이런 자격증 시장 규모가 3조원대다. 취업준비생을 울리는 ‘자격증 장사’ 문제가 불거진 지 오래됐는데도 시장이 더 커진 건 정책 부작용이 겹친 결과다. 규제 완화를 내세운 박근혜 정부가 2014년 자격증 허가제를 등록제로 완화한 게 첫째다. 지금도 각 부처는 ‘민간자격 신설 금지 분야’ 공고만 주기적으로 올릴 뿐 민간엔 손을 대지 않고 있다.

이어 문재인 정부 때인 2017년 공공 부문 블라인드 채용을 도입해 학력을 못 보게 되자 공공 기관들은 대신 자격증 가점을 늘렸다. 민간에선 쓸모없는 각종 능력검정시험 등 ‘공기업 전형용 자격증’이 판치는 이유다. 또 2020년 재취업 교육비를 최대 500만원 국비 지원하는 국민내일배움카드 사업이 시작되자 ‘눈먼 돈’을 잡으려는 사설업체가 폭증했다. 민간자격증 시장을 상당 부분 떠받치는 건 정부인 셈이다.

자격증 희망고문, 노동시장 왜곡도

한 스포츠 박람회에서 필라테스 강사들이 시연하는 모습. 필라테스 강사 자격증은 국가가 관리하지 않는 대표적인 민간자격증으로, 현재 1500종이 넘는다.(사진은 기사 특정내용과 무관함)/뉴스1

민간자격이 전문직처럼 오인돼 피해를 낳기도 한다. 정신건강 이슈가 커지자 ‘상담’ 관련 민간자격만 5954건, ‘심리’ 붙은 건 4157건 생겨났다. 이런 자격 소지자 중 일부가 예산으로 각 지자체·학교 등에 배치된다.

서울 시민 장모씨는 “주민센터에 비용을 내고 상담받았는데 ‘가족심리상담사’가 기초 이론만 읊을 뿐 대화가 잘 되지 않았다. 지자체에 항의하니 ‘상담사는 공인 자격이 아니니 제대로 상담받으려면 정신과에 가라’고 하더라”고 했다.

필라테스 자격증 1503개, 요가도 1224개에 달하는데, 강사가 “아파야 운동이 된다”는 식으로 잘못 지도했다가 손해배상소송 등 분쟁에 휘말리는 경우도 늘었다.

구직자들이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자격증 취득에 몰리는 동안 정작 현장에선 일손을 못 구하는 노동시장 미스매치도 벌어진다. 초고령화 시대를 타고 ‘노인’ ‘실버’ ‘시니어’ 관련 자격증이 5000여개 쏟아졌는데, 요즘 부쩍 늘어난 게 ‘병원동행매니저’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을 병원에 모시고 가 약 타오는 일인데 ‘고소득 프리랜서’로 광고된다. 하지만 이는 국가자격인 요양보호사의 업무에 속하거나, 자격증 없는 돌보미도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한다. 정작 인력이 절실한 곳과는 거리가 멀다.

수년 전부터 여러 지자체에서 노인을 위한 병원동행 서비스를 도입하자, 이를 전문 자격처럼 홍보하는 '병원동행매니저' 같은 민간자격이 수백개 생겼다. /조선일보DB

서울시 노인복지 정책 관계자는 “지금 현장에선 노동강도 높은 요양보호사, 그리고 자격증조차 필요 없는 간병인이 부족해 난리”라며 “책상 위에서 딴 자격증이 아니라 힘든 과정을 감내하는 진짜 노동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과거 똘똘한 자격증 하나로 대접받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단순 업무가 속속 AI로 대체되면서, 유효 기간이 짧은 지식을 평가하는 서류상 자격보다는 인간 근로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실무 경력과 업계 평판이 중시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