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한상엽

“오늘 밤 공산당들이 경무대를 습격한다는 첩보가 있는데 검찰은 알고 있나?”

1950년 4월 4일, 권승렬 법무부 장관이 ‘사상 검사’ 선우종원 검찰과장을 소환해 물었다. 2000여 명 공산당들이 일시에 봉기해 이승만 대통령과 정부 요인들을 살해하고, 정부를 전복하려 한다는 놀라운 첩보였다. 그러나 1949년 이래 사회 각 영역에서 강도 높게 추진된 남로당 색출 작업으로 일부 잔당이라면 몰라도 조직화된 공산당이 2000여 명이나 남아 있을 리 없었다.

더구나 법무부 장관이 검찰과장을 집무실로 부른 이유는 첩보를 미리 알아내지 못한 ‘무능’을 질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번 수사에 검찰이 관여하지 말라는 ‘윗선’의 지시를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타공(打共·공산당 때리기) 전선’에서 언제나 선봉에 서 왔던 검찰로서는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는 지시였다. 선우종원은 장관에게 수사에 입회만이라도 할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고 요구해 간신히 ‘윗선’의 승낙을 얻었다.

‘수사본부’는 조선호텔 215호실이었다. 책임자는 해방 전 미국에서 이승만의 비서로 일했고, 미국 OSS(CIA의 전신)에서 훈련받고 미국 공군 소위로 임관해 충칭에서 광복군과 함께 국내 진입 작전을 준비했던 정운수였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귀국한 ‘대통령 측근’이었지만, 그때는 아무런 공적 지위가 없는 ‘민간인’이었다. 그런 정운수가 수사본부에 나타나자, 신태영 육군 총참모장, 최영희 헌병사령관, 김갑수 내무부 차관, 김병완 치안국장 서리 등 내로라하는 군경 수뇌부들이 일제히 일어나 거수경례했다.

4월 5일 오전 1시, 정운수의 ‘지휘’에 따라 헌병사령관 이하 헌병 10여 명, 치안국장 서리 이하 경찰 30여 명이 신당동 야산 중턱으로 출동해 자택에서 자고 있던 ‘인민군 부사령관’ 최동석을 체포했다. 그날 오후 정운수는 군경 수뇌부와 대규모 병력을 ‘지휘’해 경무대 뒷산 바위 아래에서 최동석이 묻어두었다고 자백한 인민군 총기와 실탄을 발굴해 냈다.

1945년 한미합동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충칭에서 만난 미군 정운수 소위, 사전트 소령, 광복군 참모장 이범석 장군. 이범석은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다. 정운수는 관운이 좋지 않아 국회의원에 3번 출마해 모두 낙선했고, 국방부·교통부 장관 하마평에 올랐지만 끝내 입각하지 못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국사편찬위원회

최동석이 연행된 곳은 몇 달 전까지 반민특위 청사로 사용했던 경찰병원 내 사무실이었다. 잠결에 연행된 최동석은 몸에 ‘5·30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김성수, 김준연, 백관수, 조병옥 등 민국당 수뇌부들이 군경 내부에 침투한 간첩들과 내통해 선거를 방해하고 대통령을 암살해 정부를 전복하려는 음모’가 적힌 문건을 지니고 있었다.

너무나 조악한 문건을 받아 든 검찰은 최동석을 용산경찰서로 송치한 뒤 본격적으로 수사에 착수했다. 검찰이 그동안 대공(對共) 수사에서 갈고닦은 ‘수사 기법’을 총동원해 회유·협박하자, 결국 최동석은 자신이 ‘인민군 부사령관’이 아니며, 대한정치공작대(이하 공작대)의 지시를 받아 간첩 조작 공작에 가담했다고 자백했다. 공작이 마무리되면 최동석은 공작대가 약속한 대로 일본으로 밀항해 몇 년 숨어 지낼 생각이었다. 검찰은 대대적인 체포 작전에 돌입해 대장 김령(일명 김태수)을 비롯한 정운수, 장석윤 등 관련자 100여 명을 검거했다.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미군 방첩대(CIC)와 비슷한 정보기관 ‘대한관찰부’(이하 관찰부)를 설립했다. 책임자는 정운수와 함께 OSS 요원으로 활약한 장석윤(일명 몬타나 장)이었다. 하지만 관찰부는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는 조직이었던 데다가 1949년 1월 관찰부 요원이 대한청년단 단원을 납치·감금·폭행한 사건이 알려지면서 비난 여론이 들끓어 폐지됐다. 같은 해 5월 ‘대북 공작’을 위해 설립된 ‘통일사’(TIS)도 비슷한 이유로 해체됐다. 그다음 정보기관 설립 시도가 공작대였다.

검찰 수사를 통해 드러난 공작대의 설립 시기는 1950년 3월 30일이었다. 치안국장 서리와 헌병사령관은 공작대에 사무실·차량·자금 등을 제공했고, 대원 100여 명에게 “사전 승인 없이는 신문·검거를 불허한다”는 특수신분증까지 발급했다. 4월 1일 공작대는 장충동에서 무역상을 운영하는 안일을 체포한 뒤 그의 집에서 권총과 실탄을 발견했다고 조작해 ‘인민군 부사령관’이라고 날조했다. 안일을 천장에 거꾸로 매달아 폭행하고, 고춧가루를 넣은 양말로 입과 코를 틀어막고 그 위에 물을 붓는 고문을 자행했다. 그러나 사흘 밤낮으로 고문해도 안일은 거짓 자백을 하지 않고 버텼다. 계획이 틀어지자, 공작대는 동료 대원 최동석을 내세워 안일로부터 인민군 부사령관 자리를 물려받은 것으로 시나리오를 고쳐 쓴 것이었다. 안일은 공작대의 고문으로 전치 3개월의 중상을 입었다.

공작대는 ‘타공 진영’의 선봉 오제도 검사, 최운하 서울시경 사찰과장, 김준연 국회의원까지 빨갱이라고 모략했다. 또한 신성모 국방부 장관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정운수를 앉히기 위해 신성모의 아들 신명규 소령이 군대에 침투한 남로당 프락치 책임자라고 모략했다. 신명규가 수원농대 재학 중 ‘국대안(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 반대’ 좌익 반정부 투쟁에 나섰고, 신한공사 근무 시 미국인을 배척한 일이 있었다는 것이 그 근거였다.

총선거가 50일도 남지 않은 시기였지만, 국회는 조사위원회를 조직해 진상 조사에 나섰다. 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조사위원 김준연 의원은 “공작대의 간첩 조작 사건은 또 하나의 105인 사건”이라고 맹비난했다. 공작대 문제로 격양된 대한국민당 이진수 의원은 발언 중인 민국당 김문평 의원을 향해 명패를 내던지고 단상 위로 뛰어올라 난투극을 벌였다.

체포된 공작대 100여 명 중 47명이 구속됐고, 5월 15일 대장 김령 등 12명이 기소됐다. 그러나 정운수, 장석윤 등 핵심 관련자는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경무대가 관련됐다”는 피의자들의 진술은 검찰의 기소장에서는 모두 허위로 기술됐다. 재판은 6·25전쟁 발발 이틀 전인 6월 23일 개정했고, 전쟁으로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정운수는 그해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북 의성 선거구에 출마해 낙선했다. 국방부 장관, 교통부 장관 하마평에 오르기도 했지만, 끝내 입각하지 못했다. 제4·5대 총선거에서도 연이어 고배를 들었다. 그가 맡은 최고 공직은 1952년 대한해운공사 사장이었다. 장석윤은 공작단 수사와 재판이 이루어진 와중에 경찰 총수인 ‘내무부 치안국장’에 선임됐고, 1952년 내무부 장관, 제3·4대 민의원(횡성군)을 역임했다.

<참고 문헌>

김득중, ‘한국전쟁 전후 육군 방첩대(CIC)의 조직과 활동’, 󰡔사림󰡕 제36호, 2010

김학재, ‘한국전쟁 전후 국가 정보기관의 형성과 활동’, 󰡔제노사이드 연구󰡕 제2호, 2007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2󰡕, 역사비평사, 1996

선우종원, 󰡔사상검사󰡕, 계명사,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