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설 때 대학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오랜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드디어 대학교수가 되었다는 것이다. “너 참 대단하다”고 격려의 덕담을 나눈 후 친구가 내 근황을 물었다. “요즘은 칼럼 안 쓰냐?” “조선일보 주말섹션 ‘아무튼, 주말’에 쓰는데, 안 보냐?” 좀 의아해서 되물었다. 그 친구는 부모님과 함께 사는데 부모님이 조선일보의 오랜 구독자였기 때문이다. “아, 그래?” 좀 쭈뼛거리더니 말하기를 부모님이 얼마 전 조선일보 구독을 끊었다는 것이다. “아니, 왜?” “조선일보는 ‘빨갱이’ 신문이라네.” 답을 듣자마자 대강 사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부정선거론?” 친구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더니 말했다. “‘윤 어게인!’이지 뭐.”
‘빨갱이’는 공산주의자를 속되게 이르는 말이다. 조선일보는 공산주의와 거리가 먼 신문이라고 생각되는데, 왜 친구의 부모님은 조선일보를 ‘빨갱이’로 부른 것일까? 아마도 부정선거론 편을 들어주지 않아서 화가 난 것 같다. 그래서, 이젠 자기 마음에 드는 유튜브 방송만 보는 지적인 ‘히키코모리’(사회적 교류를 거부한 채 자기 방에만 머무는 사람)가 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니 일이 이렇게 된 제일 큰 책임은 나 같은 정치학자들에게 있다. 선거 연구는 정치학의 주요 분야이고, 정치학 이외 다른 사회과학 분과 중 선거 연구가 이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분과는 없다. 그렇다면 선거부정론에 대해 정치학자들이 나서서 궁금증을 해소해 줬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책임을 따지자면 정치인들도 빼놓을 수 없다. 솔직히 지금 국민의힘 정치인들 대부분은 선거부정론을 믿지 않는다. 그런데도 대다수는 자기 소신을 밝히기는커녕 선거부정론자들의 반응이 무서워 침묵하거나 이랬다저랬다 한다. 이들의 어정쩡한 태도가 오히려 선거부정 음모론을 부채질하는 것이다.
세 번째로 나는 언론 역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작년에 중견 언론인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제 은퇴를 앞둔 모 언론인이 선거부정론 얘기를 꺼냈다. 이젠 언론 지면을 통해 정확한 사실 관계를 종합 정리해줘야 하지 않느냐고 후배 기자에게 말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그 후배 왈, “소용없습니다. 사실을 얘기해 줘도 들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화만 내니 역효과만 날 겁니다”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다른 언론인들도 평가가 비슷한 것 같다. 지난 2월 말 있었던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와 한국사 강사 출신 전한길씨와의 부정선거 토론을 보고 월간조선 편집장 출신 시사 유튜버인 최병묵 기자는 이렇게 총평했다. “부정선거는 팩트의 문제가 아니고 신념의 문제”이므로 “사실 관계에 대한 토론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이야 어떻든 자신의 신념만을 좇는 것을 ‘광신’이라 한다. 광신도들에겐 어차피 설명이라는 것이 먹히지 않으니 시간 낭비라는 것이다.
그럴 듯하긴 하지만, 언론의 역할에 어긋나는 얘기다. 팩트 체크야말로 언론의 기본 책무 아닌가? 사실적 근거가 희박한 음모론을 퍼뜨리면서 자기주장에 동조하지 않는다고 언론을 향해 얼토당토않은 ‘빨갱이’ 타령을 하면서 구독을 끊겠다고 협박하는 독자에 대해 ‘굳이 상대할 필요 있느냐’ 식으로 계속 외면하는 것이 올바른 대응일까?
팩트체크를 외면하면 거짓은 독버섯처럼 번진다. 예를 들어보자. 선거부정론자들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인용하면서 마치 미국에서 오랫동안 대규모 선거부정이 자행되어 온 것처럼 주장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미국정치학회 선거지원 태스크포스가 2020년 대선 직전 발표한 자료를 보면 2020년까지 12년간의 미국 전국 선거에서 명의도용, 복수 등록, 우편투표 사기 등 부정선거로 보고된 사례는 총 2068건이 있었다. 이는 많아 보이긴 하지만, 12년간 약 10억회 이상의 투표가 있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전체 투표수의 약 0.00021%에 해당하는 수치다. 게다가 미국정치학회의 설명에 따르면 이들 사례는 대부분 선거관리자들의 스크린 과정을 통해 최종 투표 결과에 반영되지 못했고, 선거부정 시도라고 문제 제기됐던 개별 사건들을 조사한 결과 대부분 단순 표기 오류거나 선거 관리 공무원의 단순 행정 착오였다고 한다. 물론 오류나 착오는 적을수록 좋긴 하지만 이 정도 수치를 가지고 무슨 전국 선거 결과를 바꿀 만큼의 대단한 선거부정이 있었다고 주장할 수 있겠나?
이제는 지식인이든, 정치인이든, 언론인이든 선거부정론 앞에서 주저하거나 외면하는 자세를 버리고 보다 적극적으로 반박할 필요가 있다. 이준석·전한길 토론을 보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점이 ‘국리민복’과 정책에 대한 토론의 실종이었다. 선거부정론만 얘기하다가 결국 국민을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토론은 사라져 버린 것, 그것이 현재 한국 보수 우파의 현실이다.
이제 진실로 정책을 얘기하고, 미래를 얘기하려면 망상에 사로잡힌 선거부정론자들을 방치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실’의 빛을 비추고 대화의 손길을 내밀어 줘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특히, 조선일보가 ‘빨갱이’ 신문이라며 구독을 끊은 내 친구 부모님께 대화의 손길을 내밀고 싶다. 그분들이 그 ‘골방’에서 빠져나와 현실을 직시하고 고개를 들어 미래를 보시길 간절히 바란다. 그러려면 일단 구독부터 재개하셔야 하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