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국 일주일 전 만난 산악부 후배가 녹음해 준 음성 편지를 들었다. 위도 1도를 넘을 때마다 위성 전화로 음성 사서함에 안부를 남겼는데, 이날은 후배의 목소리를 남겼다. /김영미 제공

(2024.11.30. / 운행 23일 차. 위도 84도 02분 / 누적 거리 485.7㎞ / 해발고도 1330m.)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위도 83도에서 84도까지 4일이 걸렸다. 초반에 위도 1도를 넘는 데 8일이 걸렸던 것과 비교하면 시간이 절반으로 줄었다. 허큘리스 인렛의 위도 80도에서 81도, 82도, 83도 지점에 이르는 데 각각 8일, 6일, 5일이 걸렸었다. 오늘만큼은 완성해야 할 목표 거리의 압박에서 조금 벗어난 기분이다. 사실 5일 전부터 11시간 30분씩 걷고 있다. 진행이 빨라진 비결은 하루 한 시간씩 운행 시간을 늘린 데 있다.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은 시간을 갈아 넣는 것! 바람 불고 흐리고 혼란스러운 순간마다 한 걸음씩 계속해서 내딛는 것에 힘을 쏟는 것이다.

84도까지 4일 내내 흐린 회색빛이라 기분이 계속 가라앉은 상태였다. 스스로 분위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한국에서 준비해 온 비장의 무기 ‘보이스 레코더’의 응원 메시지 폴더를 처음으로 열었다. 날씨 때문에 기분이 가라앉은 게 아니라 어떤 그리움 때문인 것 같았다. 배도 고프고 말도 고프다. 누군가와 하루 일과를 공유하며 수다를 떨고 싶다.

남극엔 바람 소리밖에 없으니 내가 좋아하는 설악의 계곡 물소리, 포근한 봄날 아침의 맑은 새소리를 녹음했다. 소리를 통해 포근한 온기의 기억을 남극의 텐트 안으로 공간 이동시키고 싶었다. 대화할 상대가 전혀 없는 이곳에서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질 것 같아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응원의 메시지를 녹음해 달라고 부탁했다. 남극에 도착한 뒤 꺼내 듣고 싶었다. 한국에서 미리 들어보기엔 아까웠기 때문이다. 2023년 남극점 도달 원정 때도 남극에서 혼자 걷고 있을 나를 위해 담아 준 응원 메시지를 녹음해왔다. 걱정과 염려가 묻어 있었다. 모두 무사 귀환을 응원하며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그때 녹음을 이번에도 몇 개 골라 담아왔다.

이번 횡단에 새로 녹음해온 것들도 있다. 처음 꺼내 듣게 된 메시지는 출국 일주일 전 산악부 행사에서 담아온 것들이다. 대부분 들어오면 뭘 같이 먹자, 어딜 같이 가자, 함께 산에 가자 등등의 종류가 많았다. 노래를 불러주거나 좋아하는 글귀를 읊어주는 사람도 있었다. 듣자마자 나는 눈물이 터졌다. 20대 초반 대학산악부 시절, 돈 없고 가장 추웠던 시절을 함께했던 산악부 동기와 후배들이 산악인들의 애창곡인 ‘자일의 정’을 불러줬다. 20대에 우린 추위에 덜덜 떨면서도 산골짜기가 쩌렁쩌렁하게 울리도록 목이 터져라 합창했다. 추위도 힘겨움도 멀리 달아나게 만드는 ‘노동요’를 부르고 나면 낭만은 한도 초과였다. 산악부는 내게 그런 존재다.

다음은 옥희의 목소리였다. 언젠가 우리 집에 놀러 왔다가 현관문에 붙은 글귀를 보고 좋다며 자기도 집 현관에 붙였다던 그 구절을 읽어줬다. 김장호 교수의 산악 에세이집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에 나오는 내용이다.

“뜻이 높은 사람은 쉼 없이 준비한다. 그것도 보란 듯이 떠버리지 않고 남모르게 알차게 준비한다. 그것이 진실로 자신에게 즐거운 것일 때, 그때부터 그는 남몰래 준비하느라 평일 엿새도 고된 줄 모르게 된다. 진실로 알피니스트란, 산에 오르기 위하여 평소에 몸과 마음을 준비하는 사람을 두고 부르는 이름이다. 평소의 몸가짐, 그 산을 내 속에 들어앉게 하는 일이 더욱 소중한 것이다. 머리에 떠오르는 순수 무구한 꿈. 그 꿈의 언저리에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뜨거운 열망!”

이 책은 20여 년 전 20대 초반 대학산악부 시절에 처음 만났다. 손바닥만 한 포켓북 형태라 산에 갈 때 기록 일지와 함께 포개어 배낭에 넣어 다니곤 했다. 옥희가 읽어 준 글은 아직도 우리 집 현관문에 그대로 붙어 있다. 옥희는 계속된 메시지에서 “저는 이 글귀를 볼 때마다 형을 위한 글이라는 생각을 많이 해요” “항상 쉼 없이 말없이 준비하는 영미형! 응원할게요. 파이팅!”이라고 했다.

너무 뭉클했다. 눈물이 그렁거렸다. ‘고맙다. 옥희야!’ 이 글을 듣는 순간 20대의 열정이 소환돼 그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좋은 글은 낡아서 없어지거나 빛이 바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위도 1도를 넘을 때마다 위성 전화로 음성 사서함에 안부를 남겼고 이것은 나의 SNS에 업로드됐다. 오늘은 옥희의 목소리를 위성 전화의 음성 사서함에 남겼다. 그런 다음 나는 짧게 음성 메시지를 남겼다. 혼자 메시지를 남기는데도 목이 메어와 얼른 전화를 끊고 말았다. 울컥한 내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11월의 마지막 날. 84도에서 보냅니다. 모두 안녕!”

※아시아 최초로 남극 대륙을 단독으로 도보 횡단한 산악인 김영미의 ‘남극, 끝까지 한 걸음’을 격주로 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