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유현호

독일이 통일 후유증으로 경제가 어려움에 빠져 ‘유럽의 병자’라는 비아냥을 받을 때,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과감한 포괄적 사회·노동 개혁인 하르츠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그는 중도 좌파인 사민당 출신이었지만 개혁 내용은 복지를 줄이고 조세를 감면하거나 고용의 유연성을 제공해 기업 활동을 도와주는 우파적 내용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사민당은 분열되고 지지 기반인 근로자들이 등을 돌려 결국 선거에서 패배하고 총리직을 기민당의 앙겔라 메르켈에게 넘겼습니다. 메르켈 총리는 사민당이 만들어 놓은 틀 위에서 정책을 집행한 결과 독일은 경제를 회복하여 ‘유럽의 성장 엔진’으로 변모했습니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제가 총리로 재직 중이던 2012년 5월 제 집무실에서였습니다. 제가 독일에서 공부한 것을 알고 찾아온 우방국 전직 총리로서의 의례적 방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대화는 지극히 자유로웠습니다. 대화 말미에 저는 정치인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는 어떤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여 그 성과가 나타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고 그 성과가 나타나기 전에 선거가 있으면 패배할 위험이 있는데, 정치 지도자는 국익을 위해 그 패배를 감내할 용기를 갖는 것이라고 답변했습니다. 자신의 경우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해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도 했으나 근소한 차로 패배했지만 잘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국익을 우선한 그의 정치적 희생과 헌신에 감동해 그 이야기를 총리실 페이스북에 올리고 기회 있을 때마다 이를 전파했습니다. 슈뢰더 총리는 한국에서 열리는 포럼이나 콘퍼런스에 자주 초청받는 인기 있는 인사가 됐습니다. 어느 신문사가 주최하는 포럼에서 저는 슈뢰더 총리와 대담하는 프로그램을 함께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그 후 슈뢰더 총리가 한국을 방문할 때면 만나서 허물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됐습니다.

지난해 연말 한국을 방문한 슈뢰더 총리를 다시 만났습니다. 그는 먼저 한국의 정세에 대한 제 의견을 물었습니다. 엉뚱하고 잘못된 계엄이었으며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정치권의 행태도 실망스럽지만, 한국인들은 이를 잘 극복해낼 것이라고 잘라 말하고 화제를 빨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돌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슈뢰더 총리는 2022년 전쟁이 발발했을 때 양국의 요청으로 휴전을 중재한 경험이 있는 분입니다. 지금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제안한 평화안, 즉 러시아가 점령한 우크라이나 영토를 러시아에 복속시키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안은 침략을 통해 얻은 영토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어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쟁의 종결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고, 또 러시아를 도와 중국을 견제하는 지렛대로 활용하고자 하는 현실 정치의 필요성에 기인한 것으로 보입니다만. 어쨌든 나쁜 선례를 만들지 않고 명분이 있는 해결책을 도출한다면 좋을 텐데요. 그 방안의 하나로 점령 지역의 주민들이 투표를 통해 복속할 국가를 선택하는 방법은 어떤지를 물었습니다. 그 지역이 러시아계 주민들이 다수를 점하는 지역이기 때문에 투표 결과 명분 있게 러시아에 복속시킬 여지가 있으니까요. 슈뢰더 총리는 그 방법은 러시아로서도 투표 결과를 확신할 수 없어서 수용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저는 다시 그 지역을 독립시켜 제3국으로 만드는 것은 어떤지 물었습니다. 그것도 러시아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그것을 허용하면 러시아와 영토 분쟁이 잠재된 수많은 곳에서 똑같은 문제가 발생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랍니다.

러시아는 이제는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고 예전의 이데올로기적 동서 냉전은 해소돼 서방이 러시아를 침략할 가능성은 없는데 러시아가 서방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우크라이나 침공처럼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서방이 러시아를 침공하는 일은 없을 테지만 러시아 사람들이 느끼는 정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나폴레옹과 히틀러의 러시아 침공에 대한 공포가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서방도 러시아의 영토 확장 욕심의 역사를 기억하고 대비하듯이. 결국은 서방과 러시아의 상호 불신이 사태 해결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아직 이를 해결할 훌륭한 정치 지도자들을 갖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