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예순다섯, 임정열 영설계에프엔씨 전무는 정년 없이 현장을 누비는 소방 전문가다.40대 중반까지도 생활고에 시달렸던 그는 쉰셋에 소방기술사 자격증을, 쉰여섯에 건축기계설비기술사 자격증을 땄다. 그는 “50대, 60대는 굉장히 젊은 청춘의 시기”라​고 말했다.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인생 역전’. 누구나 한 번쯤 꿈꾸지만, 현실에선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대개는 요행을 바라다 지치거나, 몇 번 시도하다 포기한다. 이유는 차고 넘친다. 가난하게 태어나서, 학벌이 부족해서, 나이가 많아서, 운이 안 따라서….

임정열(65)은 이 모든 ‘안 되는 이유’를 온몸으로 겪고도 인생을 뒤집었다. 중학생 때 아버지를 여의고 시작된 고달픈 더부살이, 갓난아기를 단칸방에 뉘어 놓고 내달리던 새벽 우유 배달, 무릎에 피딱지가 앉도록 바닥을 기어야 했던 청소 일까지…. 지독한 불행의 사슬은 40대까지도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하지만 현재 그는 소방 관련 설계·감리 분야에서 억대 연봉을 받는 베테랑 전문가다. 20대 공학도들도 혀를 내두른다는 국가기술자격의 정점, 기술사 타이틀을 50대에 두 개나 거머쥔 덕분이다.

봄기운이 막 움트기 시작한 날, 광화문에서 그를 만났다. 그가 건넨 명함에는 ‘영설계에프엔씨 전무이사’라는 직함과 세 가지 자격이 적혀 있었다. ‘소방기술사’ ‘건축기계설비기술사’ ‘소방시설관리사’. “살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어요. 그 공부가 결국 저를 일으켜 세웠죠.” 최근 자전적 에세이 ‘인생을 건 공부’를 펴낸 그는 처음엔 책 쓰는 것도, 인터뷰에 응하는 것도 망설였다고 했다. 그럼에도 용기를 낸 이유는 단 하나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남몰래 눈물 흘리는 엄마와 아내들, 삶의 모퉁이에 주저앉은 가장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흔들리는 젊은이들에게 제 얘기가 작은 용기가 된다면 좋겠어요.”

◇‘어이’ ‘아줌마’에서 ‘임정열 전무님’으로

-지금 어떤 일을 하시나요.

“저는 소방 전문가입니다. 건축물 지을 때 화재 안전의 뼈대를 잡는 소방 설계를 하고, 실제 시공 현장에서 그 설계가 충실히 구현되는지 감리를 하죠. 완공 후에는 설비가 제대로 유지·관리되는지 점검하고요. 국가안전진단이나 화재 조사 같은 업무도 하고 있습니다.”

-갖고 계신 자격증은 시험의 난이도가 높기로 유명합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활동하는 소방기술사가 1000명 남짓인데, 그중 여성은 10% 정도예요. 건축물이 존재하는 한 소방 전문 인력은 필수적이라 수요가 매우 확실해요. 저 역시 2007년 소방 ‘쌍기사’(전기·기계분야 소방설비기사)를 따고 나서 바로 취직했어요. 2014년 기술사를 따고 나서는 여러 회사에서 러브콜을 받았고요.”(기술사는 박사급 전문지식과 권위를 인정받는 국가기술자격이다. 특히 소방기술사는 국가기술자격 중에서도 어렵다. 2024년 필기합격률이 0.7%다.)

-돈도 많이 버시겠습니다.

“하하. 지금 연봉은 20년 전에는 상상도 못 했죠. 하지만 돈보다도 더 크게 체감하는 변화가 있어요. 예전에는 제 이름으로 불려본 적이 거의 없었어요. ‘어이’ ‘아줌마’로 불렸죠. 억대 연봉보다 더 좋은 건, 내 이름 석 자로 불린다는 거예요.”

동료들과 함께 업무를 보고 있는 임정열 전무의 모습. /임정열 전무 제공

사실 그는 소방과 관련 없는 삶을 살았었다. 그저 먹고살기 위해 분투하는 나날이었다. 신혼 초, 남편의 직장 생활은 불안정했다. 젖먹이를 뉘어 놓고 새벽 우유 배달을 나갔다. 화장품 장사를 하며 허리띠를 졸라맸다. 한 푼 두 푼 모아 신도시에 작은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이제 좀 살 만해졌다 싶을 때 IMF 외환 위기가 닥쳤다. 생활고가 찾아왔다. 다시 우유 배달을 시작했다. 입주 청소, 가사 도우미, 식당 설거지…. 닥치는 대로 일했다.

-어떻게 자격증 딸 생각을 했나요.

“일이 계속 안 풀리더라고요. 내가 게으른 것도, 노력을 안 한 것도 아닌데….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죠. 밀려드는 대출 이자와 생활비, 아이들 대학 등록금까지 경제적으로 벼랑 끝에 서 있던 시기였어요. 생각을 쥐어짰어요. 지금처럼 몸을 써서 일하는 건 오래 할 수가 없다, 나이 많다고 푸대접받는 것도 지겹다…. 나이와 상관없이 끝까지 당당하게 일할 수 있는 길을 찾았어요. 그게 자격증이었죠.”

첫 수확은 공인중개사(2006년)였다. 준비한 지 3개월 만에 합격했지만, 막상 시작한 일은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런데 중개사 시험 강의를 듣던 중 강사가 발코니 확장 문제를 다루면서 유독 화재와 소방을 강조했던 게 기억났다. ‘소방이 대체 뭘까’라는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운명처럼 이끌린 물음표 하나가 그를 소방의 세계로 인도했다.

-그때 소방 관련 자격증을 처음 알게 됐군요.

“학원에 찾아가 물으니 ‘기술사는 모든 이공계 자격증의 꽃이고, 그중에서도 소방기술사는 꽃 중의 꽃’이라고 하더군요. 저는 그런 세계가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환해지면서 가슴이 뛰기 시작했어요.”

어려운 와중에도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게 도움이 됐다. 2003년 독학학위제(독학사)로 딴 학사 학위로 소방 자격증에 도전할 수 있었다. 2007년 1월 준비를 시작해 6월 기계 분야 소방설비기사를 따고, 8월 전기 분야 소방설비기사를 땄다. 이후 2011년 소방시설관리사에 합격했다. 2014년 소방기술사에 최고령으로 합격했고, 2017년엔 건축기계설비기술사까지 땄다. 10년 만에 연봉은 다섯 배 넘게 뛰었다.

◇공부에 왕도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끈기뿐

거침없는 자격증 취득 이력을 듣고 있자니, 궁금증이 생겨났다. 타고난 ‘공부 머리’가 있거나, 원래부터 공부를 좋아하는 학구파가 아니었을까. “아니요. 전혀요.”

-그런데 어떻게 매번 합격하나요.

“살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비결이죠. 저는 머리가 좋은 편은 아니에요. 초등학교 때 숫자 두 개를 더해서 손가락 열 개를 넘어가면 셈이 막혔어요. 남들과 좀 달랐던 게 있다면 호기심입니다. 무엇이든 흥미를 느끼면 이해될 때까지 곱씹고, 의문이 풀릴 때까지 파고드는 성향이 공부에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어떻게 공부했나요.

“처음엔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리며 틈틈이 공부했어요. 자격증을 따고 취업한 후에는 일과 병행하다 나중에는 아예 배수진을 치고 공부에 전념했죠. 수면 시간 빼고는 전부 공부에 쏟았습니다. 무조건 새벽에 일어나 물에 밥 말아 먹고 집을 나와 교회로 갔어요. 목표량이 채워지지 않으면 절대 집에 돌아오지 않았죠. 제 공부법의 핵심은 ‘읽고 또 읽기’예요. 기본서를 반복해 읽고, 행간에 필기해 또 읽었죠.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아도 무작정 계속 읽어요. 회독이 거듭될수록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지식이 쌓이거든요. 소방기술사 시험은 100회독도 넘게 했어요. 처음이 어려울 뿐, 익숙해지면 하루에 수백 페이지를 속독하는 것도 가능해집니다. 집 곳곳에 책장을 찢어 붙여놓고 눈길 닿는 족족 머릿속에 집어넣었습니다.”

임정열 전무가 수험생활 중 공부했던 교재. 임 전무는 따로 노트를 만들기보다 교재 행간에 필기한 뒤 반복해 읽는 방식으로 공부했다. /임정열 전무 제공

소방기술사 시험을 준비했을 때 나이는 쉰셋이었다. 갱년기 증세로 관절이 쑤시고 손가락이 아려 펜을 쥐기조차 힘들었다. 안경을 새로 맞춰도 석 달이 지나면 또 바꿔야 할 만큼 눈도 급격히 나빠졌다. 종일 책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저녁에는 글자가 희미해져 거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나이 들어 공부하는 게 정말 쉽지 않잖아요.

“내용 파악도 안 되고,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공부에 왕도가 없다고들 하지만, 제가 해보니까 있더라고요. 바로 끈기예요.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책을 노려만 봐도 공부고, 엎드려 졸다가 화들짝 깨는 것도 공부예요. 그렇게 버티면 어느 순간 이해되고, 외워져요. 나이를 먹는다는 건 그만큼 삶의 데이터가 쌓였다는 뜻이에요. 경험을 바탕으로 이해하고, 통찰하는 폭은 젊은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넓거든요. 지나고 보니 쓸모없는 공부는 없더라고요. 견디기만 하면, 젊은 시절엔 미처 맛보지 못한 깊고 묵직한 공부의 희열이 찾아옵니다. 저는 가장 늦은 시작이 가장 멀리 간다고 생각해요. 쉰, 예순은 굉장한 청춘이죠.”

-시작하는 걸 두려워하는 이들도 많은데요.

“저는 항상 준비 안 된 상태에서 뛰어들었습니다.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고, 또 해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시작을 미루지 마세요.”

-가장 중요한 공부 원칙 세 가지를 꼽는다면요.

“첫째, 자신만의 공부법을 찾아라. 둘째, 책 사는 데 돈 아끼지 말라. 셋째, 자기 자신을 믿어라.”

◇흙투성이 우유 팩, 피딱지 앉은 무릎

임정열은 1961년 강원도 철원의 한 농가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열네 살 되던 해,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며 평온하던 삶은 산산조각 났다. 같이 살 돈이 없어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공고에 진학해 제법 공부를 잘했지만, 아무도 그를 대학에 보내주지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 뒤 악착같이 돈을 모아 1983년 상명대 불문과에 입학했다. 프랑스에 유학 가 음악 공부를 하겠다는 꿈이 있었다. 하지만 1985년 결혼을 하면서 대학을 중퇴했다.

-꿈꾸던 대학 생활이었을 텐데요.

“결혼 전에 남편이 대학원까지 보내준다 호언장담했어요. 하하. 살다 보니 학업을 이어간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요. 졸업도 하기 전에 결혼한 건 하루 빨리 안정적으로 살고 싶어서였어요. 남편은 결혼 전 ‘절대 퉁명스럽게 대하지 않겠다’ ‘이유 없이 짜증 내지 않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래서 결혼했죠.”

-생업전선엔 왜 뛰어들게 됐나요.

“대기업 다니던 남편이 회사 생활이 힘들었는지 덜컥 관뒀어요. 저도 ‘이참에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보라’며 응원했죠. 둘 다 철부지였어요. 1986년 5월 31일 첫아이를 낳았는데, 7월 1일부터 우유를 돌렸습니다. 어려서부터 어떻게든 내 힘으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걸 배웠기 때문인지, 절망할 시간에 몸을 움직이는 쪽을 택했습니다.”

-고단했겠습니다.

“젖먹이 아이를 두고 나와서 일을 해야 한다는 게….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 우유 배달을 하는데 리어카가 넘어졌어요. 흙투성이가 된 우유 팩들을 빗물에 씻어 주워 담는데 저절로 통곡이 터져 나오더라고요. 내가 울고 있다는 사실이 용납되지 않았어요. 제 자신에게 말했죠. ‘난 우는 게 아니야. 반드시 일어설 거야….’”

남편의 일은 잘 풀리지 않았다. 어렵사리 구한 직장은 맥없이 문을 닫기 일쑤였다. 세탁소 배달 일조차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문전박대당했고, 택시 운전도 사고로 멈춰 섰다. 갈수록 어깨가 처지는 남편을 위해 그는 식사 때마다 아이들에게 말했다. “얘들아, 우리 ‘아빠 만세’ 세 번 힘차게 부르고 밥 먹자!” 눈물겨운 내조였다.

-본인도 마음고생이 심했을 텐데.

“남편이 예쁘진 않았죠. 남편이 점점 작아지는 게 눈에 보였어요. 이 남자랑 결혼하겠다고 선택한 건 나잖아요? 남편이 돈을 못 벌면 내가 벌면 되는 것 아닌가요? 누가 버느냐는 중요하지 않았어요. 저는 가정을 지키는 게 최우선이었습니다. 내가 겪은 그 지독한 아픔을 내 자식들에게만큼은 절대, 절대 물려주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땀 흘리고 고생한 여행에 큰 감동이 있듯, 공부도 치열한 만큼 크게 남더군요.” 임정열 전무는 절박함 속에 펜을 쥐었던 시간이 인생에서 가장 값진 여정이었다고 말했다.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부부는 시련 속에서 전우(戰友)가 됐다. 공부 잘하는 첫째 아들과 발레리나를 꿈꾸는 둘째 딸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일했다. 하루 네 곳씩 입주 청소를 하며 청바지가 닳도록 바닥을 기었다. 무릎에 피딱지 앉는 건 예삿일이었다. 잠시 숨을 돌리려 믹스커피 한 봉지를 집어들면 “아줌마, 지금 커피 마실 시간 없어”란 말이 돌아왔다. 그럴 때마다 모멸감을 씹어 삼키며 되뇌었다. ‘언젠가 내 이름으로, 내 발로, 내 의지로 세상에 우뚝 설 거야.’

-아이들 뒷바라지에 드는 비용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요.

“첫째가 특목고에 갔는데, 거긴 부잣집 아이들이 많았어요. 아이가 딱 한 번, 유명 강사에게 배워보고 싶다고 한 적이 있어요. 오죽하면 그런 말을 했을까 싶으면서도, ‘동네에서 배우면 안 되겠느냐’고 되물을 수밖에 없었지요. 첫째는 묵묵히 혼자 공부해 의대에 들어갔습니다. 둘째는 중3 때 발레를 하고 싶다고 했어요. 아이를 데리고 무용 학원에 가서 상담을 받는데, 원장이 제 행색을 보고 노골적으로 무시하더군요. 둘째는 오빠가 받은 대출금으로 발레를 배웠고, 지금은 발레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쳐요. 다행히 아이들이 스스로 잘해줬지만, 그때는 자식 뒷바라지 하나 제대로 못 해주는 무능한 내가 너무 싫었어요.”

-자녀 교육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아이를 유심히 관찰해서 아이가 어디에 흥미를 느끼고 재능이 있는지 알아봐 주려고 노력했어요. 재촉하지 않았죠. 봄에 피는 벚꽃이 예쁘다고 해서, 가을에 필 코스모스에 왜 꽃을 피우지 않느냐고 다그치면 그 뿌리는 썩어버리고 말아요. 장미는 초여름에 만개하고, 단풍은 가을이 돼야 붉게 물드는 법입니다. 한겨울에 피어나는 동백꽃은 얼마나 강인하고 아름다운데요. 아이가 가진 고유한 빛을 발견하고 그 아이의 계절이 오기를 믿고 기다려주는 게 중요해요. 아이들도,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예요.”

◇터널의 끝은 반드시 있으니 끝까지 가보기를

그의 아버지는 무학(無學)의 농부였지만 입버릇처럼 말했다. “도둑질 빼고는 무엇이든 배워라.” 늘 누워있던 어머니는 작은 일에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우리 막내딸, 나중에 제 이름 가진 것 꼭 하나 할 거다!”

―어릴 적 꿈은 무엇이었나요.

“성악가와 박사요. 오랫동안 잊고 살았는데 뒤늦게 공부하며 다시 떠올렸어요. 뭔가 되고 싶던 어린 시절의 내가, 공부할 용기를 준 것 같아요.”

-세상을 원망한 적은 없었나요.

“원망이 없었다면 위선이죠. 하지만 원망해 봐야 달라질 게 없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았어요. 우유 배달할 때 쇼윈도에 비친 제 얼굴을 본 적이 있어요. 너무 지치고 슬퍼 보여서, 보는 게 괴로웠어요. 그때부터 웃는 연습을 했어요. 신기하게도 웃으면 에너지가 생겨요. 힘들 때는 책을 보며 버텼습니다. ‘대지’ ‘대망’ ‘토지’ 같은 책에서 위로를 받았고, 심리학과 자기 계발서도 많이 읽었어요. 힘들수록 웃고, 미운 마음이 들수록 칭찬해야 한다는 걸 배웠어요.”

임정열 전무가 작년 3월 한국국제협력단(KOICA)과 함께 소방기술을 전수하러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했을 때 모습. /임정열 전무 제공

-공부하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한 순간이 있나요.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일을 하는, 쓸모 있는 사람이 됐다는 느낌이 들 때. 제 일이 누군가의 생명을 구하는 데 일조할 수 있어서 좋아요. 그리고 아이들이 저를 자랑스러워할 때요. 소방기술사 시험에 합격하고 나서 큰아이가 ‘엄마는 정말 대단해. 엄마니까 해낸 거야’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네 공부가 훨씬 더 어렵지’라고 하니, 아이가 그러더라고요. ‘엄마 공부가 훨씬 더 어려워요.’ 그 한마디가 제게는 훈장처럼 느껴졌어요.”

그가 출연한 한 유튜브 채널에는 이런 댓글이 달렸다. “나이 많아서, 아이 키우느라, 여자라서… 마치 못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못 한다’ 외쳐댄 지난날을 반성합니다. 이분 앞에서는 정말 어떤 변명도 할 수가 없네요. 저도 제 이름 석 자로 다시 살아보겠습니다.”

-‘제2의 임정열’을 꿈꾸는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터널의 끝은 반드시 있다’. 저 역시 IMF 이후 10년 넘게 이 어둠이 언제 끝날지 몰라 불안해하며 헤맸습니다. 하지만 주저앉아 울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긴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펼쳐질 눈부신 풍경을 맞이하려면 준비가 돼 있어야 하잖아요. 기회와 운은 누구에게나 오지만,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결코 잡을 수 없으니까요. ‘안 되면 어떡하지?’란 생각은 하지 마세요. 일단 시작했다면 ‘된다’는 믿음으로 끝까지 가보세요. 터널 너머의 풍경은 오직 끝까지 간 사람만이 받을 수 있는 선물입니다.”

그의 좌우명은 ‘감사만(감사·사랑·만족)’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만족’을 강조했다. “한때 자격증(건축전기설비기술사)을 보태 업계에서 독보적인 존재가 돼볼까 하는 생각도 있었어요. 하지만 제게 주어진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대신 소방을 더 깊게 파고들 생각입니다. 요즘 건축물은 점점 초고층화되고 지하 공간은 더 깊어지고 있어요. 제가 설계에 참여한 영동대로 지하 공간 같은 복잡한 구조물에서 화재 양상이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아직도 공부할 게 산더미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