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6대 왕 단종은 오랜 기간 사극에 단골로 등장했지만, 주인공이었던 적은 드물었다. 영화 ‘관상’이나 드라마 ‘공주의 남자’처럼 단종 폐위의 결정적 계기가 된 ‘계유정난’을 다룬 드라마와 영화는 끊이지 않았지만, 그 속에서 단종은 보조적 역할에 머물러 왔다. 올해 첫 1000만 관객 영화에 등극한 ‘왕과 사는 남자(이하 왕사남)’는 그런 단종을 전면에 내세웠다. 2026년 단종은 어떻게 1000만 관객과 공명(共鳴)하게 된 것일까.
단종의 생애는 ‘역사가 스포(일러)’란 말이 나올 정도로, 교과서나 역사책 등을 통해 익히 알려져 있다. 영화를 만든 장항준 감독도 “처음엔 이 작품을 고사했었다”며 “모두가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는지 다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왕으로 즉위했으나, 야욕에 눈먼 숙부에 의해 이를 빼앗기고 결국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삶 말이다.
‘왕사남’은 이 단종을 기존과 다른 각도로 조명한다. 궁중 암투의 나약한 희생양이 아닌, 유배지에서 민초들과 어울리며 시간을 보내는 따뜻하지만 카리스마 있는 이홍위(단종의 이름)다.
영화 평론가 김도훈은 “단종 이야기는 오래됐지만, 결코 낡은 이야기는 아니다”라고 했다. 오히려 셰익스피어 비극처럼 세대에 관계없이 많은 사람을 울려 온 고전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에서 살짝 비틀거나 숨겨진 이야기를 꺼내는 걸 좋아한다”며 “단종 폐위까지는 누구나 다 알지만, 유배 이후는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이 지점에 새 서사를 입혀 다 아는 이야기를 새롭게 느껴지게 만든 것이 단종 열풍의 비결일 것”이라고 했다.
실제 영화에서 세조가 된 수양대군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유배지 영월에서 폐위된 왕의 밥을 해주고 잠자리를 살피는 엄흥도(유해진)로 대표되는 ‘광천골’ 사람들의 모습이 비중 있게 그려진다. 이를 통해 위기의 순간 백성을 구하는 이홍위, “측우기를 만든 사람은 노비였다”며 신분 따지지 않고 직접 백성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이홍위 등 현 시대가 바라는 지도자의 모습을 충실하게 투영해낸다.
조선 전기 연구자인 김범 국사편찬위원회 편찬연구사는 “기존에 알려진 단종 이야기만으로도 이미 눈물겹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여기에 민중들과 호흡하고 백성을 아끼며 부조리한 일에 맞서 저항하는 모습까지 보이니 관객 입장에선 더 크게 이입하고 빠져들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했다. 김 연구사는 “특히 단종이 ‘소년’이란 점이 소구하는 바가 클 것”이라며 “17세 어린 소년에게 저렇게까지 했다는 점에서 반향이 더 큰 것 같다”고 했다.
영화는 화려한 성공 신화보다 실패하더라도 옳은 일을 하는 작은 영웅에 더 공감하는 최근의 관객 정서와도 맞닿았다. 정치적으로 성공했을지 몰라도 조카를 내쫓고 무력으로 왕권을 찬탈한 세조보다 실패했지만 의롭게 스러진 단종에게 관객이 감정을 이입한다는 것이다.
김도훈 평론가는 “최근 관객들은 부정에 맞서 저항하다가 죽거나 실패한 작은 영웅 이야기에 오히려 마음을 쏟는 경우가 많다”며 “그 대표적인 예가 영화 ‘서울의 봄(2023년)’”이라고 했다. 쿠데타군과 진압군이 맞선 1979년 12월 12일 밤을 그린 이 영화는 쿠데타를 막지 못하고 비극적으로 끝난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는데도, 1312만 관객을 동원했다. 실제 장항준 감독은 영화 ‘서울의 봄’의 성공을 보고 ‘왕사남’을 밀어붙일 용기를 얻었다고 한다.
단종 역 배우 박지훈(27)은 단종 열풍의 화룡점정이다. 드라마 ‘약한영웅’ 등에 출연했던 박지훈은 “단종은 너여야만 한다”는 장 감독의 세 차례 러브콜 끝에 캐스팅됐다. 영화 속 박지훈의 눈빛 연기를 보면 장 감독의 삼고초려가 납득이 간다. 그는 운동으로 건강하게 뺀 살이 아니라 진짜 식음을 전폐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 두 달간 사과 위주 식단으로 15㎏가량 감량했다고 한다. 온라인상에선 일찌감치 “단종 오빠” “단종 앓이 중” 등 신드롬급 반응이 나오고 있다. 최근 단종 유배지인 강원도 영월 청령포를 찾는 방문객은 전년 대비 5배 이상 급증했고, 예스24 기준 ‘단종’ 관련 도서의 판매는 전년 동기 대비(2월 4일~3월 3일) 약 80배 증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