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곡의 절벽은 아래로 갈수록 오래된 지층이 나타나는 게 보통이지만, ‘오보케 협곡’은 지각 변동과 융기로 지층이 뒤집혀 반대다. /도쿠시마현

시코쿠(四國)는 일본 열도를 이루는 네 개의 큰 섬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국내엔 덜 알려졌다. 혼슈·홋카이도·규슈에 비해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많지 않다. 시코쿠는 이름 그대로 가가와현·에히메현·도쿠시마현·고치현 네 지역으로 나뉘는데, 그중 도쿠시마현은 일본의 옛 풍경을 비교적 온전히 간직한 곳으로 꼽힌다.

이는 지리적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 도쿠시마는 시코쿠의 동쪽 끝에 위치해 있다. 북쪽은 세토 내해와 맞닿았고, 남쪽과 서쪽은 시코쿠 산지가 둘러싼 구조다. 농업과 어업이 발달한 반면, 철도와 고속도로망은 다른 지역보다 늦게 정비됐다. 혼슈 중심의 근대화 흐름에서 한 발 비켜 서 있었던 셈이다.

이 같은 배경이 도쿠시마의 매력이 돼 여행객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 대도시보다 덜 화려하지만 일본의 옛 모습이 남아 있고 사람이 적어 조용하며 느린 여행지. 최근 일본 소도시 여행이 인기를 끌면서 한국 2030 중에서도 도쿠시마를 찾는 이들이 많다.

나루토 해협에선 시속이 최대 20㎞에 달하는 소용돌이를 볼 수 있다. 좁은 해협을 통과하며 속도를 얻은 물이 암반 지형에 부딪히며 만드는 자연 현상으로 3~4월이 관측에 제일 좋은 때다. /도쿠시마현

나루토 해협의 세계 3대 소용돌이

인천공항에서 1시간 40분 만에 도쿠시마 아와오도리 공항에 도착했다. 예전엔 간사이나 다카마쓰 공항을 경유해야 했지만, 2024년 12월부터 주 3회 직항편이 운영되고 있어 접근성이 한층 높아졌다.

여행의 시작은 공항에서 차로 20분가량 거리에 있는 나루토 해협이었다. 세토 내해와 태평양의 물길이 만나는 이곳은 도쿠시마 관광지 중 가장 이름난 곳이다. 이 길목은 연중 내내 거친 조류가 흐르는데 평균 유속이 시속 13㎞, 최대 20㎞에 달하는 소용돌이(우즈시오·うず潮)를 만들어 낸다. 이탈리아 메시나 해협, 캐나다 세이모어 해협과 함께 세계 3대 조류로도 불린다. 일본의 유명한 애니메이션 ‘나루토’가 이곳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졌다.

1년 중 소용돌이를 보기 가장 좋은 때는 3~4월이고, 시간대에도 영향을 받는다. 간조와 만조에 소용돌이가 커지는데 여름부터 가을까지는 오전 10시 전후와 오후 5시 전후, 겨울과 봄에는 오전 10시 전후와 오후 3시 전후가 가장 적당한 때라고 한다.

소용돌이를 즐기는 방법은 두 가지다. 소용돌이 위에 건설된 전망 시설인 ‘우즈노미치’를 찾거나, 관조선을 타는 것이다. 우즈노미치는 혼슈와 시코쿠를 잇는 오나루토교의 하부에 설치돼 있다. 입구에 들어서자 사방이 투명한 창으로 된 450m 길이의 전망 시설이 눈에 들어왔다. 45m 아래에서 펼쳐지는 소용돌이를 관찰할 수 있도록 발아래 군데군데가 투명한 유리로 설계돼 있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소용돌이는 압도적이다. 에메랄드빛 물이 원을 그리듯 휘감기더니 중앙이 움푹 꺼지며 하얀 거품이 솟는다. 그러다가 다시 잔잔해진다. 좁은 해협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속도를 얻은 물이 암반 지형에 부딪히며 만드는 자연현상이다. 다만, 차량이 다닐 때마다 느껴지는 진동과 거센 바람 등은 피하기 어렵다. 겨울 날씨인데도 손에 땀이 났다.

더 가까이 소용돌이를 즐기고 싶다면 관조선에 오르면 된다. 30~40분 간격으로 배들이 거대한 소용돌이 코앞까지 접근한다. 선원이 ‘미기(오른쪽)’ ‘히다리(왼쪽)’를 외치며 소용돌이의 방향을 알려준다.

아와오도리 춤부터 벚꽃 명소까지

도쿠시마 관광에서 아와오도리(阿波踊り)는 가장 역동적인 볼거리다. 아와는 도쿠시마의 옛 이름이고 오도리는 춤을 뜻하는데, 매년 8월이면 축제가 열리고 이 춤을 구경하러 일본 각지에서 도쿠시마로 관광객이 모여든다. 일본 전체를 통틀어서도 가장 유명한 축제 중 하나다. 이 기간 10만명가량이 전통 음악에 맞춰 아와오도리를 추며 행진한다. 그렇다고 여름에만 이 춤을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도쿠시마역 근처에 있는 아와오도리 회관에선 매일 주·야간 공연이 열린다.

‘아와오도리’는 도쿠시마 지역 전통 춤이다. 아와는 도쿠시마의 옛 이름이고 오도리는 춤을 뜻한다. 아와오도리 회관에선 매일 공연이 열린다. /도쿠시마현

북, 피리, 샤미센(일본 전통 현악기), 가네(꽹과리) 등 전통 악기가 내는 2박자 리듬은 중독성이 강하다. 이 리듬에 맞춰 남자들은 자세를 크게 낮춰 무술이라도 하듯 손발을 움직이고, 여자들은 전통 의상인 유카타를 입고 허리를 꼿꼿이 편 뒤 손을 높이 들어 앞뒤로 흔든다. 한국의 추석과 비슷한 일본의 오봉(お盆)에 조상들을 맞기 위한 춤이 발전한 것이라고 한다.

공연에는 관객들이 아와오도리 춤사위를 배울 수 있는 시간도 마련돼 있다. 일어나서 함께 박자에 맞춰 춤을 배우고, 배우들과 함께 무대 위로 올라가 춤을 추기도 한다. 쭈뼛대고 있으면 무대에서 아와오도리 축제의 유명한 구호가 울려 퍼진다. “춤추는 바보와 보는 바보, 같은 바보라면 춤추는 게 낫다.” 관람객이 무대에 올라 춤을 춰보는 건 흔치 않은 기회니, 눈치 보지 말고 무대에 오르는 걸 추천한다.

회관 5층에서 케이블카인 로프웨이를 타고 5분여간 이동하면 비잔산 정상에 있는 비잔 공원으로 이동할 수 있다. 도쿠시마 도심 경관은 물론 오나루토교와 세토 내해도 감상할 수 있다. 봄철에 이곳을 찾는다면 벚꽃으로 둘러싸여 사진을 찍기에도 좋다.

‘이야노 가즈라바시’라 불리는 넝쿨 다리는 안전을 위해 3년에 한 번씩 기존 다리를 해체하고 넝쿨을 새로 엮는다. /도쿠시마현

‘큰 걸음으로 걷기 위험한’ 협곡

또 다른 자연을 만나기 위해 도쿠시마 시내에서 차로 두 시간가량 달렸다. 산세는 금세 험준해졌다. 터널을 지나 굽이진 길을 오르내리다 보니 이야(祖谷) 계곡에 닿았다. 이곳은 ‘이야노 가즈라바시’라 불리는 넝쿨로 엮은 전통 다리가 있는 곳이다. 높이 약 14m, 길이 45m, 폭 2m인데, 사진으로 본 것보다 길고 높았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넝쿨을 움켜쥐게 된다.

이 다리는 단순한 관광 시설은 아니다. 예전 산간 지역 주민들이 골짜기를 건너기 위해 사용하던 이동로다. 일본 산간 지역은 수종이 빽빽하고 골짜기가 깊은 게 특징이다. 넝쿨 다리는 그런 지형에서 강을 건널 현실적 선택지였던 셈이다.

다리는 지금도 전통 방식으로 유지된다. 안전을 위해 3년에 한 번씩 기존 다리를 해체하고 새로 엮는다고 한다. 사용되는 넝쿨은 인근 산에서 자라는 다래나무 계열이다. 아무 넝쿨이나 쓸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충분한 수분을 머금어 질긴 상태여야 한다.

요시노강을 따라 조금 더 이동해 오보케 협곡으로 갔다. 오보케는 ‘큰 걸음으로 걷기 위험한 곳’이라는 뜻인데, 이름처럼 거칠고 험하다. 유람선을 타고 협곡 안으로 들어가자 양쪽의 절벽과 바위의 절경이 펼쳐진다. 가이드는 급류가 오랜 세월 바위를 깎아내 지금의 협곡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이 지역은 지질학적으로도 의미가 있다. 일반적으로는 지면 아래로 갈수록 오래된 지층이 나타나는 게 보통인데, 이곳은 반대다. 협곡의 위쪽 암석이 더 오래된 층이다. 지각 변동과 융기로 인해 지층이 뒤집히며 형성된 결과라고 한다. 일본 열도의 형성 과정을 연구하는 데도 중요한 장소다.

요시노강은 일본 3대 급류 가운데 하나로도 꼽힌다. 상류로 올라가면 물살이 거칠어 래프팅 명소로도 유명하다. 실제로 협곡 인근에서는 노란 고무보트를 타고 급류를 가르는 이들을 볼 수 있었다.

초록빛 귤과 라멘, 고구마

바다와 강, 산 지형이 빚어낸 도쿠시마. 그 자연을 대변하는 음식을 맛보는 것도 여행의 큰 즐거움이다. 도쿠시마역 주변은 시내에 해당하지만 대형 상업 지구라기보다는 오래된 간판의 가게들이 많다.

생선 가게 앞에는 세토 내해에서 올라왔다는 도미가 놓여 있었고, 과일 가게에는 도쿠시마의 상징 중 하나인 초록빛 감귤(스다치)이 망에 담겨 있었다. 이 지역 생산량이 일본에서 가장 많다고 한다. 식당에선 이 감귤을 생선구이, 우동, 회, 심지어 맥주 위에 얇게 썰어 올리는 게 보통이다. 실제 생선 위에 짜보니 향이 그대로 퍼진다. 레몬보다 부드럽고 산뜻하다. 도쿠시마 사람들은 “스다치 없는 음식은 허전하다”고 말한다.

도쿠시마 라멘 역시 이 지역을 대표하는 음식이다. 일본 라멘이 대개 맑거나 진한 돈코츠(돼지뼈) 국물로 나뉜다면, 도쿠시마 라멘은 간장 베이스에 돼지뼈 육수를 더해 색이 짙고 걸쭉하다. 국물은 갈색에 가깝다. 현지에서는 시나소바(支那そば)라 부르며, 돈코츠 육수에 진간장을 더하고 양념이 된 삼겹살을 올리는 게 특징이다.

좌석에 앉아 한 그릇을 받아 들었다. 얇은 면 위에 얹힌 건 달게 양념한 돼지고기와 날계란 노른자였다. 점원은 노른자를 풀어 국물과 섞어 먹으라고 알려줬다. 짜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생각보다 부드럽다. 현지 손님들은 밥 한 공기를 추가해 국물에 말아 먹었다. 한국인에게 낯설지 않은 친숙한 모습이다.

후식으론 모래밭에서 재배되는 나루토 킨토키(鳴門金時) 고구마가 제격이다. 당도가 높고 식감이 좋아 일본 내에서도 인기가 높다. 상점 대부분에서 구운 고구마나 튀김, 고구마 만주·아이스크림 등 다양한 안주를 판매한다. 스다치의 산뜻한 향, 간장과 돼지뼈 육수가 어우러진 라멘의 깊은 맛, 나루토 킨토키의 단맛까지. 바다와 산, 강이 내놓은 도쿠시마의 식탁을 맛봤다면 도시의 절반은 이해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