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자사 낭공대사비, 954년, 높이 218cm. 국립중앙박물관 서화실에 전시돼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서화실이 개편 공사를 마치고 지난 26일 새롭게 문을 열었다. 상설전시관의 전시실을 개편할 때에는 낡은 시설을 개선하고 학계와 대중의 관심을 고려해 전시 구성을 다듬는다. 전시 내용을 잘 전달하고 관람객이 전시를 더 즐겁게 경험할 수 있도록 디자인도 새롭게 한다.

서화실 감상의 즐거움 중 하나는 1년에 3~4차례 교체 전시로 전시품이 자주 바뀐다는 점이다. 맛집에 비유하면 메뉴가 자주 바뀌는 곳이다. 거의 모든 전시품이 교체되지만 고정 메뉴처럼 항상 전시되는 유물도 있다. 화려한 귀부(비석을 떠받치는 거북 모양 받침돌)나 이수(비석 위에 얹는 머릿돌)는 없지만 세월이 묻어나는 풍모가 범상치 않은 태자사(太子寺) 낭공대사비다.

비석의 사연은 다음과 같다. 신라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역대 왕들의 존숭을 받던 이름 높은 선승(禪僧)인 행적(行寂·832~916)이 916년 입적하자 경명왕은 이듬해 낭공대사라는 시호를 내리고 당대 최고 문장가인 최치원의 동생 최인연에게 비문을 짓도록 했다. 비는 신라 말 어지러운 상황으로 바로 세워지지 못했고, 고려시대 954년에야 세워졌다. 비가 세워진 태자사 터는 현재 안동 도산면에 자리한다. 비 앞면에는 최인연이 낭공대사의 생애를 기록하고 그의 공덕을 기린 글이, 뒷면에는 낭공대사 제자인 순백(純白)이 비를 조성한 사연을 적은 후기가 새겨져 있다.

비석의 글씨는 승려 단목(端目)이 신라를 대표하는 명필 김생(711~790 이후)의 글씨를 집자(集字)한 것이다. 집자는 글씨를 모은다는 것이다. 이를 알고 비석을 보면, 실제로 쓴 글씨와는 달리 흐름이 다소 어색한 부분도 발견할 수 있다. 그렇지만 높이 2m가 넘는 비의 앞과 뒤를 돌아보며 이를 빼곡히 채운 3000자가 넘는 글자를 보고 있노라면, 이처럼 많은 크기와 모양이 맞는 글자를 찾고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구성한 실력과 정성에 감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다.

비석의 좌측면도 눈여겨볼 만하다. 여기 새겨진 글씨는 조선 16세기에 추가된 것으로, 영주 군수 이항이 글을 쓰고 문인 박눌이 글씨를 썼다. 여기에 이항은 일찍이 김생의 필적을 보고 용이 날뛰고 호랑이가 누워 있는 것 같은 기세를 느꼈다고 적고 있다. 이항은 1509년 당시 봉화라 불린 곳의 한 절터에 김생의 글씨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가 낭공대사비를 발견했고, 이를 영주로 옮겼다. 많은 사람이 비를 보기 위해 모여들었다고 하는데, 낭공대사비에 관한 이러한 관심을 잘 보여주듯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낭공대사 탁본은 현재 여러 점 전한다. 전시실에는 낭공대사비와 함께 18세기 유명한 서화 수장가였던 김광국이 엮은 탑본첩이 전시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