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을 1년 앞두고 동아시아 국제정치 환경은 격랑에 휩싸였다. 1949년 8월 29일,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했다. 이로써 4년 동안 미국의 핵 독점 시대는 막을 내리고, 핵무기를 앞세운 미·소 냉전이 본격화됐다. 같은 해 10월 1일, 국공 내전에서 승리한 마오쩌둥은 중화인민공화국(이하 중국) 수립을 선포했다. 인민해방군에 연전연패하던 중화민국 장제스 정부는 12월 7일 대만으로 쫓겨났다. 그해 12월 마오쩌둥은 모스크바를 방문해 장기 체류하면서 스탈린과 새로운 중·소 관계를 협의했다.
이런 국제정치 환경에서 미국의 트루먼 민주당 행정부는 국공 내전에서 부패와 무능으로 한계를 드러낸 장제스 국민당 정부(이하 대만)를 ‘사석(死石)’ 삼아 마오쩌둥 중국과 관계를 개선함으로써 중·소 간에 틈을 벌리는 일종의 ‘쐐기 전략’을 구상했다. 1950년 1월 5일 트루먼 대통령은 “대만은 중국의 일부이며 미국은 대만에 군사 원조를 하지 않을 것”이라 천명했다. 담화의 형식을 빌렸을 뿐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협상 중인 마오쩌둥에게 보내는 화해 메시지였다.
그 연장선상에서 미 국무장관 애치슨은 1월 12일 워싱턴 프레스 클럽에서 ‘아시아의 위기: 미국 정책의 시험대’라는 제목의 연설을 했다. 6·25 전쟁의 발발 원인을 둘러싼 격렬한 논쟁과 억측을 불러일으킨 ‘애치슨 라인’이 처음 언급된 바로 그 연설이었다. 그러나 태평양 방어선은 곁다리로 언급된 문제였고, 연설의 핵심은 중국 문제였다.
“장제스는 중국 역사상 그 어떤 통치자보다 더 큰 군사력을 지녔었다.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경제적·군사적 지원도 받았다. 그런데 4년 후 무슨 일이 일어났나? 그의 군대는 녹아 없어졌고, 그는 남은 군대와 함께 작은 섬에서 난민이 됐다. 중국인들은 국민당 정부에 대한 지지를 완전히 철회했다.”
대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애치슨은 중국에 소련의 영토 침탈 야욕을 경고했다. “제정 러시아가 연해주를 분리·병합한 것처럼, 소련도 여전히 중국 영토의 절반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의 분리·병합 공작을 추진하고 있다. 외몽골 병합은 이미 완료했고, 만주 병합도 거의 마무리해 간다. 내몽골과 신장에서도 소련 요원들이 공작을 진행하고 있다. 중국 인민들은 미국이 아니라 소련에 분노해야 한다.”
그러나 중국과 소련 사이를 이간함으로써 중국의 외교 정책을 친미로 끌어들이려 했던 애치슨의 계획은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중국과 우호 조약 체결을 주저하던 스탈린은 애치슨의 연설에 자극받아 중국이 제시한 조건을 수락하고 조약 체결을 서둘렀다. 1월 21일 중국과 소련은 애치슨의 연설을 비난하는 성명을 각각 발표했고, 2월 14일 ‘중소우호동맹’을 체결했다.
애치슨 라인으로 알려진 미국의 태평양 방어선에서 대만이 제외된 것은 확실했다. “일본의 패전과 군축은 미국에 일본의 안보를 위해 필요한 군사적 방어를 떠맡을 임무를 부여했다. 방어선은 알류샨 열도를 따라 일본과 류큐 제도(오키나와) 그리고 필리핀 제도까지 이어진다.”
알류샨 열도는 알래스카의 부속 도서이고, 일본과 류큐 제도는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무장해제당한 채 맥아더의 연합군 최고사령부(GHQ) 관할 아래 있었다. 필리핀은 1946년 미국의 승인 아래 독립하기 전까지 45년 동안 미국령이었다. 이들은 모두 방어를 미국이 책임지지 않을 수 없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1948년 8월 정부를 수립해 미군정에서 벗어나고, 이듬해 6월 미군이 군사고문단 500명을 남기고 철수한 남한이 미국의 방어선에 포함되는 것은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웠다. 더욱이 남한은 미국의 방어선에서 명백히 제외된 것도 아니었다.
“태평양 다른 지역이 공격받으면 처음에는 공격을 받은 국가가 저항해야 한다. 그다음 유엔 헌장에 따라 문명화된 세계 전체의 약속에 의존해야 한다. (…) 미국은 일본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 정도는 덜하지만 남한도 마찬가지다.” 애치슨은 대만처럼 ‘더 이상 남한을 방어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 아니라 남한이 독립국인 만큼 먼저 스스로 방어하고, 그다음 ‘유엔을 통해 문명화된 세계 전체가 방어해야 함’을 강조했다. 반년 후 6·25전쟁이 발발하자, 애치슨이 공언한 대로 국군, 유엔군 순으로 남한을 방어했다.
애치슨의 연설 직후 이승만 정부는 남한이 미국의 태평양 방어선에서 배제된 것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우려하기는커녕 연설 이튿날 이승만 대통령은 장면 주미대사를 통해 “이번 귀관의 성명은 실지(失地) 회복과 반공 투쟁에 총력을 다하고 있는 한국 국민을 고무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됐다”라며 애치슨 국무장관에게 감사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남한이 애치슨 라인에서 배제된 것보다는 프레스 클럽 연설 일주일 후 미국 하원에서 6000만달러 한국 원조 법안이 부결된 것을 더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프레스 클럽 연설 직후 큰 주목을 받지 못한 애치슨 라인은 반년 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워싱턴 정계에서 정쟁의 핵심 쟁점으로 부상했다. 공화당 매카시 상원의원은 “애치슨 라인이 남한에 공산주의자의 공격을 불러온 ‘그린 라이트’였다”고 트루먼 민주당 행정부를 맹비난했다. 이승만의 측근들도 애치슨을 향한 비난에 가세했다. 임영신은 “공산주의자들이 어느 정도 화력으로, 얼마나 대담하게 공격할 것인가를 떠보기 위한 미국의 계획된 실험이었다”는 음모론을 제기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애치슨의 연설 10개월 전인 1949년 3월 소련에 ‘무력에 의한 통일 방침’ 즉 ‘남침 계획’을 통보했다.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남침 지원을 요청하면서 “한반도 같은 작은 지역의 내전에 미국이 개입할 리 없다”고 장담했지만, 그 근거로 애치슨 라인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애치슨이 신문기자들 앞에서 선언했다고, 실제로 전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이 남한을 방어할지, 하지 않을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사실일 수도, 함정일 수도 있었다.
김일성과 스탈린은 신문에 보도된 애치슨의 연설을 근거로 남침을 결정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김일성은 미국이 개입하기 전 조기에 남한을 적화통일할 수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전쟁을 일으킨 것이지 애치슨이 파놓은 덫에 빠져 무모한 남침을 도모한 것이 아니었다.
참고 문헌
구자룡, 끝나지 않은 전쟁 6·25, 화정평화재단, 2023
도진순, ‘1950년 1월 애치슨의 프레스 클럽 연설과 하나의 전쟁 논리’, 한국사연구 제119집, 2002
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2-Ⅱ, 글항아리,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