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와 최근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가진 치맥 회동에서 신간 ‘슈퍼 모멘텀’을 선물했다. 하이닉스가 SK그룹에 인수된 후 HBM(고대역폭 메모리)을 개발해 성공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책이다. SK하이닉스가 최초로 개발한 HBM은 AI(인공지능) 연산의 병목을 해결한 AI 인프라의 핵심으로 꼽힌다. 코스피 6000 시대를 이끌고 있는 ‘반도체 메가 사이클’의 원동력이다.

지난 5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클라라의 한국식 호프집에서 가진 최태원 SK그룹 회장과의 만찬회동에서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가 신간 '슈퍼모멘텀'을 펼쳐보이고 있다. 최 회장이 황 CEO에게 선물한 책이다. /연합뉴스

#2. 재테크에 열심인 전업주부 서명은(55)씨는 최근 수소문 끝에 한 책을 찾았다. 기아차 출신인 이신행 전 의원이 삼성전자의 기아차 인수 비화를 소설 형식으로 쓴 책 ‘이씨춘추’. 1997년 출간 당시 큰 화제였는데 절판돼 구하기가 어려웠다. 서씨는 투자 안목을 기르기 위해 ‘기업사’와 ‘산업사’를 공부하는데 많은 시간을 쏟고 있다. 그는 “결국 우리 경제를 이끌어가는 건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대기업인데, 삼성·현대차 같은 곳도 기업사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된 책이 없는 게 아쉽다”고 했다.

설 명절 이후 주식 시장의 상승 랠리가 이어지고 있다. ‘삼전(삼성전자)’ 주가는 20만원, ‘하닉(SK하이닉스)’은 100만원대에 안착했다. 이들 대장주 하나 없는 사람은 ‘포모(Fear Of Missing Out·소외되는 데 대한 두려움)’에 시달리기 십상이다. 이 같은 투자 열기 속에 사람들은 기업의 경영 성과나 전략뿐만 아니라 총수 일가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며 단순한 관심 차원을 넘어 ‘주주 팬덤’을 형성하고 있다.

민주화 시대를 넘어 자본의 시대로

“현금 빼고 다 오른다”, “현금은 쓰레기다(Cash is trash)”. 투자가 일상이 된 요즘은 자본이 최대 화두다. 40~50대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이 민주화였다면, 민주화·산업화가 성숙기에 접어든 단계인 지금은 거의 전 연령의 관심이 자본으로 옮겨갔다. 군대에서는 사회 초년병인 군인들을 대상으로 금융 교육이 활발하고, 가상 자산과 주식 투자 교육 시장에서 가장 큰 고객층은 ‘50~60대 여성’이다. 지난해 급등장에 60대 이상 여성 투자자들이 전 연령대 중 가장 높은 수익률을 기록한 것으로 집계됐다(본지·NH투자증권).

성별과 연령대를 떠나 자산 증식, 투자에 대한 욕구가 활발하다는 얘기다. 이런 대한민국에 기업이 더 이상 타도의 대상이 아니라 나의 부(富)를 증식시켜줄 동반자 같은 존재가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최근 증시 활황기를 거치며 기업을 대하는 대중의 태도와 인식은 한층 친밀하고 수평적으로 변했다. 총수 일가의 행보는 이제 연예인의 일상처럼 소비된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과 젠슨 황 CEO의 ‘깐부 회동’은 아이돌 팬 미팅을 방불케 할 정도로 대중이 몰리는 이벤트였다. 아들이 서울대에 합격한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의 ‘엄마 일상’도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다. 최근 이재용 회장이 ‘혼밥’ 하는 모습이 목격된 일본 교토의 한 라멘집은 한국인 관광객들의 방문 코스가 되기도 했다.

지난해 4월 초, 일본 교토의 한 소규모 라멘집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으로 추정되는 남성이 혼자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 포착된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며 온라인상에서 화제다. /유튜브 채널 ‘포그민’

흥미로운 점은 이 같은 기업에 대한 팬덤 현상이 내 자산을 불려줄 기업의 본질과 역사를 파고드는 ‘공부’로 자연스럽게 확장되고 있다는 것이다. 대기업에 다니는 김종찬(44)씨는 재테크 유튜브 채널을 여럿 구독하고 있으며, 회사 내에 소모임도 꾸려 경영 관련 서적을 함께 공부한다. 그는 “기업이나 산업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는 웬만한 드라마보다 재미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1~2세대 기업가들이 남긴 자서전은 여전히 관심을 끄는 콘텐츠다.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자서전 ‘호암자전’(1986년 초판 발행)과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1991년 초판 발행), ‘이 땅에 태어나서 – 나의 살아온 이야기’(1998년 초판 발행)는 서점에서 스테디셀러로 팔리고 있다. 이 책들은 교보문고 ‘주간 베스트’ 목록에 올라 있다. 김재철 동원그룹 명예회장이 지난해 출간한 경영 에세이 ‘인생의 파도를 넘는 법’도 주목을 받았다. 권오현 전 삼성전자 회장이 삼성에서 보낸 33년의 시간을 회고하며 정리한 ‘초격차’(2018년), ‘배틀 그라운드’라는 전세계적인 히트 게임을 만들어낸 회사 크래프톤의 성공기를 담아낸 ‘크래프톤 웨이(2021년)’ 같은 책은 출간된 지 몇 년 됐지만 기업에 관심 있는 많은 사람이 꾸준히 찾아보는 책이다.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에서 한 시민이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자서전을 살펴보고 있다. 해외 기업과 기업가, 투자 방법론 등에 대한 책은 넘쳐나지만 우리 기업사를 연구한 책은 많지 않다./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서학 개미’들 덕분에 일론 머스크와 스티브 잡스, 대만 반도체 회사 TSMC를 분석한 책들도 잘 팔린다. 스스로를 ‘테슬람(테슬라 추종자)’이라고 말하는 변호사 이승민(47·가명)씨는 “일론 머스크 책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며 “포트폴리오를 짤 때 테슬라의 비즈니스 모델과 일론 머스크의 발언이 중요한 지표가 된다”고 했다.

“서사 경제에 대한 니즈 늘어”

‘슈퍼 모멘텀’을 펴낸 유민영 ‘플랫폼9와3/4’ 대표는 “기업사 읽기, 산업과 경제에 대한 연구·관찰은 자본주의적 욕망의 가장 지적인 표출”이라고 말했다. 유 대표는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AI 시대, 한국 기업은 어떤 위치에 있나’ ‘한국 경제에 SK하이닉스가 없었다면’이라는 질문에서 하이닉스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그를 비롯한 필진들이 먼저 하이닉스의 문을 두드렸고 최태원 회장을 비롯한 20~30명의 전·현직 임원을 입체적으로 인터뷰해 서사를 정리했다.

하이닉스가 SK그룹에 인수된 후 HBM(고대역폭 메모리)을 개발해 성공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책 '슈퍼 모멘텀'을 펴낸 유민영 '플랫폼9와3/4' 대표.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유 대표는 “서사 경제의 시장이 커지고 있다”며 “주주들이 과거보다 적극적이고 유기적으로 움직이는데, 단순한 제품·서비스가 아니라 기업의 서사를 소비하는 데 대한 욕구가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글로벌 빅테크들은 ‘개발자’가 아닌 ‘커뮤니케이션 인재’ 채용을 늘려가고 있다. 오픈AI는 미국 본사 비즈니스 커뮤니케이션 총괄 자리에 38만7000~43만 달러의 연봉을 내걸었고, 아마존웹서비스는 연봉 11만4000~18만8500달러 조건으로 커뮤니케이션 매니저 채용 공고를 냈다. AI 기반의 가짜·저질 콘텐츠가 쏟아지는 부작용이 커지면서, 역으로 정제되고 설득력을 갖춘 이야기를 설계하는 역량이 더 중요해진 것이다.

이러한 갈증을 반영하듯 슈퍼 모멘텀은 투자자와 취업 준비생은 물론 기업의 열독률도 높다고 한다. 유 대표는 “삼성 사람들에게 많은 피드백을 받았는데, ‘자극’이라는 표현을 썼고, 꽤 세밀하게 읽었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하이닉스를 포함해 기업에 계신 분들이 ‘우리 역사를 알게 됐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고 했다.

최태원 회장을 비롯한 20~30명의 전현직 임원을 입체적으로 인터뷰한 SK하이닉스의 이야기, '슈퍼 모멘텀'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이 같은 뜨거운 관심은 역설적으로 그동안 국내에서 이런 수요를 충족할 만한 기록이 충분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해외에서는 나이키 창업자 필 나이트의 자서전인 ‘슈독(Shoe Dog)’, 넷플릭스 창업자 리드 헤이스팅스가 회사의 경영 전략을 소개한 책 ‘규칙 없음(No Rules Rules)’처럼 기업이 밟아온 성공과 실패의 궤적, 내부의 치열한 고민을 꼼꼼히 기록해 대중과 자연스럽게 소통하는 경우가 흔하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삼성·현대 등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대기업조차 회사와 리더에 대한 객관적 기록을 남기는 데 소극적이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는 오랫동안 기업을 비판과 견제의 대상으로 바라봐온 사회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유민영 대표는 본지 인터뷰에서 "'객관적 기업사'에 대한 니즈가 커지고 있다"며 "경제사·산업사·기업사 영역에서 많은 사람들의 분투와 노력, 성과를 알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유 대표는 “한국은 식민과 가난, 독재, 분단을 넘어선 특별한 나라인데, 21세기에 와서야 기업·산업을 투명하고 객관적으로 보게 된 것 같다”며 “자산에 대한 욕구와 기대가 보편적이고 광범위해지면서 공평하게 기업을 보려는 시선이 커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