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과 한국 대중문화가 전 세계의 눈과 귀를 점령하고 있다. 하지만 풍요 속의 빈곤이라 할까. 국내 원조 ‘빠순이’ ‘팬심’은 묘하게 소외감이 든다. 나의 아이돌이 전 세계를 누비며 위상을 드높이고 있는 게 뿌듯하지만, 이제 ‘본가’는 뒷전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해외에서 K팝이 승승장구하는 것과 별개로, 국내 팬들은 뒷전으로 밀려났다는 박탈감을 호소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국내 팬은 뒷전으로 밀려난 느낌
대기업에 다니는 배지혜(42)씨는 중고생 시절에는 ‘GOD’와 ‘OPPA’ 팬이었고, 20대 때는 ‘슈퍼주니어’를 좋아했다. 최근 10년간은 ‘아미(BTS 팬)’였다. 스스로 아이돌 1세대부터 쭉 이어온 ‘빠순이’의 산증인이라고 자부한다. 그런데 요즘은 ‘탈덕(좋아하는 것을 그만두는 것)’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고 느낀다. 배씨는 “학창 시절에는 방송사 앞에 가서 진을 치고 있으면 ‘오빠들’과 대화할 수 있었고, 콘서트 티켓이 10만원이 안 되던 시절도 꽤 길었다”며 “요즘은 팬 미팅 추첨권을 뽑으려고 앨범을 사재기해야 하고, 콘서트 티켓은 수십만 원에 달한다”고 말했다.
10년 가까이 ‘블랙핑크’ 팬이었던 이정원(38)씨도 “앨범·콘서트·굿즈 등에 수백만원씩 써가며 좋아했는데, 이젠 너무 글로벌 셀럽이 돼 멀어진 느낌”이라고 말했다. 국내에서는 보기 어려워지고, 해외 방송이나 명품 브랜드 행사에 등장했다는 소식이 더 많아 거리감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씨는 “SNS 포스팅 한 장의 가치가 수억원이라고 하는데, 요즘 아이돌들은 한국 팬들이 키워 인기가 높아지면 해외로 나가 사진 몇 장 찍고 돈 쓸어 담는 일에만 혈안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물론 그 덕에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대표적인 대한민국 효자 수출 산업으로 자리 잡았지만, 팬덤으로 바라보는 심정은 복잡하다는 것이다. K팝이 아닌 ‘수출팝’이 됐다는 말도 그래서 나온다.
콜드플레이보다 비싼 걸그룹 콘서트
최근 걸그룹 ‘아일릿’의 콘서트 티켓 가격이 공개되며 갑론을박이 일었다. 지난해 데뷔한 아일릿은 다음 달 첫 투어 콘서트를 여는데, 간단히 포토타임 등을 가질 수 있는 밋앤그릿(M&G) 표가 25만3000원, 공연 준비 현장을 미리 보는 사운드체크석이 22만원, 일반석이 16만5000원으로 책정됐다.
콘서트 장소(구 핸드볼경기장)나 비슷한 체급의 가수가 15만~18만원 선에서 티켓값을 설정하는 것과 비교하면 너무 비싸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지난해 트와이스와 로제, BTS 진 등이 참여한 콜드플레이 내한 공연의 스탠딩석은 13만원이었고, 2024년 12월 두아 리파 공연에서는 가장 비싼 좌석이 16만~17만원대였다. 해외 유명 가수보다 한국 신인 그룹의 콘서트 표가 훨씬 비싼 역전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K팝의 ‘소비 팬덤’이 이런 인플레이션을 부추기고, 이렇다 할 제동이 걸리지도 않는 상황이다. 정덕현 대중문화 평론가는 “아이돌 산업이 얼마를 쓰느냐에 따라 팬으로서 나의 등급이 매겨지는 팬덤 문화를 부추기고 있다”며 “돈이 없으면 팬이 될 수 없고, 지금의 비정상적인 콘서트 가격도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아무리 비싸게 팔아도 늘 ‘완판’ 행진이기 때문에 값은 계속 올라간다는 것이다. 정 평론가는 “연말 시상식에서 여러 아이돌 그룹이 어울려 공연을 하고, 전 국민이 떼창을 하던 낭만의 시절은 이제 끝난 것”이라고 했다.
‘민희진 논란’ 때 공론화된 ‘음반 사재기’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음반에 아이돌의 포토카드나 팬사인회 당첨권 등을 끼워 팔다 보니 팬들은 이런 ‘부록’을 얻으려고 듣지도 않는 음반을 수백 장씩 산다. 엔터테인먼트 회사는 이를 부추기고 이용한다. ‘세븐틴’의 팬인 정수연(35·가명)씨는 “세븐틴 팬 사인회 당첨 안정권에 들려면 음반에 500만원을 써야 한다”며 “다른 가수 팬인 친구는 60만원 쓰고 팬 사인회에 당첨됐다고 해서 ‘싸다’고들 했다”고 말했다.
팬 소비를 기반으로 하는 구조인 만큼, 아이돌의 활동·소통·방향성에 팬들의 목소리가 더 크게 반영되는 측면도 있다. 단순한 ‘아이돌 덕질’로 치부할 문제가 아닐 수 있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