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27. / 운행 20일 차. 위도 83도 20분 / 누적 거리 404.95㎞ / 해발 고도 1178m. 잠자리에 들기 위해 버너를 끄니 텐트 위로 사라락 눈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작은 소리도 크게 들리니 바람이 없고 눈이 내려 흐리다.)
20일 동안 해를 본 날이 일주일도 안 되는 것 같다. 블리자드가 불거나 흐린 날이 훨씬 더 많았다. 위도가 83도를 넘어서며 바람이 줄고 하늘이 다시 흐려지기 시작했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흐린 날에는 많이 춥다. 태양이 아침엔 내 어깨의 왼쪽에서 시작해 등 뒤를 돌아 오른쪽으로 떨어지면 운행이 끝난다. 태양이 떠 있을 때는 걷는 동안 등 뒤로 두툼한 외투를 걸친 것처럼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흐린 날은 해가 모습을 감추니 외투의 온기가 사라진다.
왼쪽에서 태양이 비칠 땐 오른쪽 어깨가 시리고, 오른쪽에서 태양이 비칠 땐 왼쪽 어깨의 재킷 안쪽에 땀이 얼어 있다. 오전 오후 걷고 나면 저녁엔 방풍 재킷이 얼음 갑옷이 된다. 태양이 등 뒤에 있기 때문에 얼굴은 늘 그늘져 있다. 그래서인지 입김이 얼어붙어 서너 시간만 지나면 고드름으로 변해 있다. 입김이 대부분 공기 중으로 사라졌을 텐데 고드름이 제법 크다. 해발고도가 1000m를 넘고 나서부터는 고드름을 오전 오후에 한 번씩 뜯어내야 할 정도로 맺혀 있다.
한국에서 남극 횡단을 준비할 땐, 냉동고와 같은 얼음 사막에 혼자 서서 10시간 이상씩 걷는다는 것에 대한 느낌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숨을 쉬는 데에도 근육이 필요할 정도로 힘들지 않을까라는 생각은 했다. 냉동고 속 삶에서 유일하게 노출되는 부위가 얼굴이라 안면 보호용 마스크를 특별 제작했다. 아주 섬세한 작업이었다.
자칫했다가는 이 마스크로 인해 스키 고글에 습기가 찰 것이고 습기가 얼어 버리면 잘 보이지 않아 또 문제가 된다. 스키 고글에 맞춤 제작해서 여러 가지 샘플을 만들고 테스트를 한 결과였다. 내가 보기엔 충분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만들어서 입혀 보내는 사람들은 혹시라도 문제가 생겨 다치기라도 할까 봐 나보다 내 몸을 더 걱정해 줬다. 일하고 있는 회사(노스페이스)의 용품팀 주영찬 부장은 남극 횡단을 위해 장갑과 안면 마스크를 특별 제작해 줬다.
태양의 온기가 힘을 잃을 때면 여기저기 손수 만들어 준 마음의 온기로 하루를 견딘다. 2023년 남극점 탐험 중 39일 차에 우연히 만났던 오스트레일리아 탐험가들은 나를 보자마자 안면 마스크와 장갑을 어디서 살 수 있는지 물어보기도 했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노스페이스 매장에서는 발견하지 못했다면서 말이다. ‘당연하지! 이거 하나뿐인 거야’
호흡도 얼어붙게 만드는 남극을 위해 준비한 또 다른 비장의 무기는 다름 아닌 소고기 볶음 고추장이다. 비장의 무기인 고추장을 500g밖에 가져오지 않았는데 이제 두 숟가락밖에 남지 않았다. 회사에서 친해진 명진 언니의 모친께서 내가 남극에 간다고 손수 만들어 주신 귀한 식재료다. 난 500g밖에 필요하지 않았는데 5㎏도 넘게 만들어 주셨다. 마음은 통째로 썰매에 싣고 와서 팍팍 비벼 먹고 싶었지만 겨우 500g밖에 가져오지 못했다. 남겨두고 온 고추장 생각을 하면 입안에 침이 고였다. 반찬은 오직 고추장뿐이고 건조된 미역을 여분으로 조금 가져왔다. 불린 미역은 금방 바다에서 건져 올린 것처럼 파릇파릇하게 살아났다. 이걸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 입안에서 남해의 싱싱함이 팔딱팔딱 춤을 추는 것 같다. 원초적인 에너지가 충전되는 기분이다.
어릴 때에는 어른들이 해외여행을 떠날 때 왜 튜브 고추장을 챙겨 다니시나 싶었다. 언제부턴가 매번의 원정에서 다른 반찬은 없어도 입맛을 돋우는 칼칼한 고추장 한 통은 꼭 챙겨 다니기 시작했다. 고추장은 염분 때문에 남극의 추위에도 얼지 않으니 너무 좋다.
남은 고추장은 두 숟가락뿐! 음식에 문제가 생겨 먹을 것도 달리고, 힘들어서 입맛도 없어 아끼지 말고 생각날 때 먹어 치우자는 마음이다. 음식이 상해 먹을 수 있는 게 줄어버렸으니 썰매의 짐을 500g이라도 빨리 줄여야겠다는 단순한 계산의 결과다. 없으면 아예 생각할 필요도 없으니까 오히려 그편이 더 나아 보였다. 그렇게 먹을까 말까 싶은 고민거리도 줄이고 무게도 줄였다. 추위를 이기는 고추장 맛은 죽기 전까지 잊지 못할 것 같다. 역시 한국인은 고추장 파워야!
※아시아 최초로 남극 대륙을 단독으로 도보 횡단한 산악인 김영미의 ‘남극, 끝까지 한 걸음’을 격주로 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