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다마니아’(Fridamania). 멕시코 국민 화가 프리다 칼로(1907~1954)를 향한 열광적 숭배를 가리키는 말이다. 짙은 일자 눈썹, 풍성한 꽃 장식, 화려한 전통 의상까지 한번 보면 잊기 힘든 강렬한 이미지로 대표되는 글로벌 아이콘. 미술계 변방으로 여겨지던 멕시코 출신, 게다가 평생 신체적 장애를 안고 살았던 여성 화가는 어떻게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존재가 됐을까? 기적 같은 성공 신화의 비밀은 프리다의 일기, 그리고 남편이자 멕시코 유명 화가였던 디에고 리베라(1886~1957)의 자서전에 담겨 있다.
◇거장과 소녀의 첫 만남
1922년 멕시코시티 에스쿠엘라 국립예비학교 강당에서 서른여섯 살의 디에고 리베라는 벽화 ‘창조’를 그리고 있다. 14년간의 유럽 유학을 마치고 멕시코 혁명이 막을 내린 고국으로 돌아온 지 1년 남짓, 그는 신생 정부의 요청을 받아 공공 건물 벽면을 민중의 캔버스로 삼는 벽화 운동을 주도하고 있었다. 벽화 운동은 혁명 이후 국가 정체성을 확립하고 인디오 문화를 부흥시키겠다는 정치·사회적 의지가 짙은 프로젝트였다. 디에고의 ‘창조’는 그 서막을 알리는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 역사적인 작업 현장을 지켜보던 학생들 사이에 열다섯 살의 프리다 칼로가 있었다. 소녀는 디에고에게 당돌하게 물었다. “당신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방해가 되나요?” 디에고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뇨 아가씨, 오히려 도움이 됩니다.” 그는 자서전에 프리다의 첫인상을 이렇게 적었다. “소녀는 몇 시간이고 앉아 내 붓의 모든 움직임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비범한 존엄성과 자신감, 눈에 서린 기묘한 불꽃을 잊을 수 없었다.” 이 만남으로부터 6년이 흘러 두 사람은 다시 마주한다. 이번에는 교육부 건물 벽화 작업 현장이었다. 스물한 살이 된 프리다가 자신이 그린 그림 세 점을 디에고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여자가 아니라 화가로서 이 그림들이 가치가 있는지 솔직히 말씀해 주세요.”
◇격려에서 격정으로
그녀가 당대 멕시코 최고 화가인 디에고의 조언을 구하러 온 데에는 절박한 사정이 있었다. 1925년 프리다가 열여덟 살 되던 해, 그녀가 탄 버스가 전차와 충돌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강철 난간이 프리다의 옆구리를 뚫고 자궁을 관통하며 척추와 쇄골, 갈비뼈, 골반, 다리가 부서졌다. 의사가 되겠다는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전신 깁스를 한 채 병상 침대에 갇혀버린 나날이 이어졌다.
그녀의 가족은 프리다가 누운 채로도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천장에 거울을 달고 침대에 특수 이젤을 설치해줬다. 그림은 극심한 통증과 절망 속에서 그녀가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그 후 3년 동안 프리다는 초인적 정신력으로 다시 걷는 법을 익히며 일상을 되찾아갔다. 평생 서른두 번의 수술을 견뎌야 했을 만큼 사고 후유증은 끝내 그녀를 떠나지 않았지만 고통의 시간은 그녀를 의사가 아닌 화가로 다시 태어나게 했다. 이 시기에 완성된 ‘여동생 크리스티나 초상화’는 그 뛰어난 재능을 보여준다.
프리다가 가져온 그림을 찬찬히 살펴본 디에고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당신은 재능이 있어요. 유럽 미술을 모방하지 말고 자신만의 진실을 그려야 해요.” 디에고의 조언과 격려는 프리다의 인생을 결정짓는 전환점이 됐다. 거장의 인정에 용기를 얻은 그녀는 그를 집으로 초대했다. 예술적 교감은 곧 걷잡을 수 없는 열정으로 번져갔다. 디에고에게 이미 가정이 있었고, 그가 많은 여성을 유혹하는 바람둥이라는 사실도, 스물한 살의 나이 차이도 장벽이 되지 못했다.
◇날개를 달아준 헌사
1929년 결혼 이후 디에고는 자신이 맡은 벽화 프로젝트 현장과 미국 및 유럽 여행에 늘 프리다와 동행했고, 저명한 예술가들과 교류할 기회를 제공했다. 멕시코의 뿌리에서 창조적 영감을 찾아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며, 프리다의 후원자이자 멘토 역할을 자처했다.
특히 전통 의상인 테우아나(Tehuana)를 적극적으로 권했다. 이 화려한 옷은 프리다에게 두 가지 의미를 지녔다. 첫째는 실용성이었다. 바닥까지 내려오는 긴 치마와 풍성한 주름은 여섯 살 때 앓은 소아마비로 가늘어진 오른쪽 다리와 교통사고로 손상된 다리를 자연스럽게 가려줬다. 둘째는 정치·미학적 선언이었다. 전통을 전면에 내세운 패션을 통해 자신을 멕시코 역사와 정체성의 상징으로 연출할 수 있었다. 프리다의 독보적인 스타일은 훗날 그녀가 세계무대에 진출했을 때 단번에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는 결정적인 무기가 됐다.
디에고의 조언과 프리다 스스로 다듬어 간 예술적 자아가 완벽하게 결합한 작품이 ‘테우아나 차림의 자화상’이다. 그림 속 프리다는 화려한 테우아나 드레스를 입은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이마 한가운데 제3의 눈처럼 디에고의 작은 초상이 박혀 있다. 머릿속을 24시간 지배하는 남편을 향한 숭배와 집착에 가까운 사랑을 고백하는 그녀만의 방식이었다. 디에고의 멘토링은 예술적 조언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멕시코 최고 화가라는 자신의 명성과 인맥을 총동원해 프리다가 예술가의 경력을 쌓을 수 있도록 길을 닦아줬다. 1938년 뉴욕에서 열린 첫 개인전, 이듬해 파리 전시의 성공적 개최에도 디에고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 그는 여러 인터뷰에서 아내를 향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프리다는 당대 최고의 화가다. 나는 그녀를 내 아내가 아니라 그녀의 예술을 사랑하는 열렬한 숭배자로서 세상에 추천한다.”
◇희망의 나무여, 굳세어라
남성 중심적인 미술계에서 국민 화가가 보증하는 천재성은 프리다가 디에고의 아내라는 꼬리표를 떼고 예술가로 성장하는 데 날개를 달아줬다. 디에고가 프리다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자신의 삶을 그릴 수 있는 용기였다. 그는 육체적 고통으로 침대에 누워 있는 날이 더 많았던 프리다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그릴 주제가 없다면, 당신 인생을 그려요.” 당대는 여성 화가들에게 모성애를 자극하는 아름다운 주제를 기대했다. 그러나 프리다는 디에고의 응원에 힘입어 그 금기를 깨뜨렸다. 부서진 신체, 유산(流産)의 고통 같은 지극히 사적이고 충격적인 화면을 세상에 드러냈다. 대표적인 예가 척추 수술 후 극심한 통증 속에서 완성한 ‘희망의 나무여, 굳세어라’다.
낮과 밤으로 나뉜 화면에 두 명의 프리다가 등장한다. 왼쪽 프리다의 등에는 수술 흉터 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오른쪽 프리다는 멕시코 전통 의상을 입고 의자에 앉아 척추 보정 코르셋과 ‘희망의 나무여, 굳세어라’라고 적힌 깃발을 두 손에 들고 있다. 그녀가 겪은 육체적 고통과 이를 스스로 이겨내려는 강한 의지를 보여준다. 디에고는 프리다의 자전적 그림에 최고의 찬사를 바쳤다. “프리다 이전에는 어떤 여성도 캔버스에 이토록 고통스러운 시(詩)를 담아낸 적이 없다.”
디에고는 동시에 프리다의 인생에서 가장 큰 고통을 함께 안겨준 존재이기도 했다. 1939년 디에고의 외도를 견디다 못해 프리다는 이혼을 감행하지만 이듬해 재혼한다. 고통스러웠지만, 헤어져서는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강렬한 애증 관계 속에서 프리다는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토로했다. “내 인생에는 두 번의 큰 사고가 있었다. 하나는 전차에 깔린 것, 또 하나는 디에고를 만난 것.”
◇계속되는 ‘프리다마니아’
1953년 4월 멕시코시티 현대미술 갤러리에서 프리다의 생애 첫 멕시코 개인전이 열렸다. 개막일, 그녀의 건강 상태는 최악이었지만 테우아나 의상과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모습으로 침대에 누워 관객을 맞이했다. 끝까지 예술가로 남고자 했던 의지를 보여주는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이듬해 프리다는 47세로 생을 마감했다. 그녀가 남긴 일기의 마지막 장에는 평생 그녀를 옭아맨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갈망하는 심경이 담겨 있다. “이 외출이 즐겁기를,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1959년 멕시코 정부는 디에고 리베라의 전 작품을 역사적 기념물로, 이어 1984년에는 프리다 칼로의 전 작품을 국가 예술 기념물로 지정했다. 부부 예술가의 작업이 나란히 국가 자산이 된 전무후무한 사례가 탄생한 것이다. 지난해 11월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프리다가 1940년 그린 자화상 ‘꿈(침대)’이 5470만달러(약 800억원)에 낙찰되며 역대 여성 작가 작품 최고가 기록을 경신했다. ‘프리다마니아’가 한때의 열광을 넘어 미술사의 정점으로 올라섰음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프리다 열풍은 올해도 이어져 미국 휴스턴미술관, 영국 테이트모던 등 세계 유수의 미술관이 그녀의 업적을 조명하는 전시를 개최한다. 프리다는 더는 디에고의 아내로 호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가 됐다. 디에고는 분명 프리다를 예술로 이끈 멘토였다. 그러나 고통 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고 자신의 길을 끝까지 걸어간 건 프리다 자신이었다. “디에고는 자신을 스승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나를 자극해서 그림을 더 잘 그릴 수 있게 해줬다. 어쨌든 나는 내 길을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