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달력, 연이은 빨간색 날짜를 접하니 부담감이 몰려온다. 입장에 따라 느낌은 다르리라. 젊은 친구들에게는 마음 설레는 황금 연휴 기간, 그 윗세대들에겐 묵직한 차례상과 함께 오랜만에 친지들이 ‘집합’하는 기회로 떠오른다. 집안 대소사를 주관했던 부모 세대와 작별 후, 이제 차례상을 떠안아 ‘최일선’에 배치된 중장년 주부들 입장은 또 다르다. 세상이 급변, 윗세대의 ‘책임’은 물려받고 아랫세대의 ‘의무’는 못 챙기는 ‘낀 세대’의 대표 주자가 된 거다. 이제 명절은 위아래 세대가 함께 즐기는 ‘가족 모임’보다는 점차 ‘고루한’ 윗세대의 ‘면피용 겉치레’로 시들어가는 모양새다.

전 부치기는 주부들 '명절 스트레스'의 주요 요인이다./게티이미지뱅크

“글쎄, 애들이 설날을 며칠 앞당기잔다. 연휴 중 해외여행 가는 인파가 폭주해 일정 조율이 안 된다네” “굳이 설날에 여행 가느냐고 나무라면 작년에도 1·2월 출국 여행객이 가장 많아 540만명을 넘었다는 숫자를 들이대더라. 자기네만 유난한 게 아니라나.” 장년 여성들이 이맘때면 토해내는 불만 중 한 자락이다. 또 수십 년을 함께 겪어온 남편들의 무성의한 태도와 여성들이 짊어지는 불공평한 노동, 자식들의 무관심과 합류 거부 등에 대한 푸념이 매년 줄을 잇는다. 특히 맞벌이까지 1인 4역을 감당했던 여성들은 정작 자신을 낳아 길러준 친정 부모님 차례에는 코빼기도 보이지 못하니 그 ‘억울함’ 넘치는 푸념도 이해가 간다. 청·장년의 아랫세대는 “세상이 어느 땐데 구시대 전통을 그대로 고집하시나, 이제 달라져야 한다”며 일손 합류를 꺼리는 젊은 제 아내를 감싸고 돌거나 부부싸움 중이다. 매년 반복, 변화의 조짐이 없는 이런 설전들이 임계점에 달하면 ‘명절 이혼’ 등으로 확장된다. 언론에는 명절 직후 이혼 건수가 연간 평균보다 10% 이상, 가정폭력 신고는 40% 이상 증가한다는 통계도 떠돌곤 한다.

설날은 친지들이 모여 조상께 감사하고 온정을 나누는 전통 명절이다. 이제는 그런 정의가 거리감이 느껴진다. 현실의 어두운 뒷모습은 “잔뜩 시들어가는 설날의 의미를 되짚고 변화된 새판을 짜야 한다”고 일러준다. 단순히 누군가의 노고를 덜어주자는 품앗이 차원의 얘기가 아니다. 우려할 일은 제각기 고립돼 섬을 이루고 사는 불안한 세태다. 고립에 제동을 거는 전환점이 절박하다는 얘기다. 1인 세대는 현재 782만9000가구, 전체의 35.5%다. 특히 70세 이상은 49.4%, 60대는 43.4%(2024년 말 통계기준)다. 또 고독사는 한 해 4000명에 이르고 매년 증가 중이다. 무자녀나 외둥이 가정이 일반화돼 출산율은 세계 최하위권이다. 가족이 붕괴 중이다. 국민 대부분이 휴대전화에 예속돼 종일 스스로 고립 중인 것. 최근 주변의 중·장년 형제들은 부모와 작별 후 상속 분쟁으로 저마다 형제간 연결고리를 끊어내는 게 다반사다. 그러니 외둥이 자식은 4촌 형제 만나기도 힘들다. 모임마저 온라인으로 대체 가능하다.

그러나 살다 보면 삶의 궁극적인 가치는 돈과 효율·편리에 있지 않음을 알게 된다. 당장 필요한 그것들도 결국 가족·친지 간의 결속과 사랑을 이끄는 도구일 때 제 빛을 발한다. 세상을 바꾸는 인류의 엄청난 노력도 결국 행복한 인간의 삶이 지향점인 게다. 또 차례상 앞에 선 그들과 내가 하필 동(同)시대, 이 나라에 출현, 혈연과 결혼으로 맺어진 기적의 소산임을 떠올리면 새삼 애틋한 거다.

올해 설날은 부서진 친인척 관계 회복의 전환점이 되길 소망한다. 늘 수고 많은 그에게, 연락이 끊겼던 친지들에게 ‘미안하다’ ‘고맙다’ ‘사랑한다’며 먼저 다가서자. 살다 보면 ‘말 한마디가 천 냥 빚 갚듯’ 세상사 의외로 단순하게 확 풀릴 때가 있더라. 부디 설 명절이 ‘숙제’가 아니라 사랑과 웃음꽃 만발하는 가족 공동체 ‘축제’로 되살아나길 소망한다. “우리 국민 중 우울증 등으로 진료받은 환자가 연간 283만명, 5년 전에 비해 40% 가까이 늘었다”는 최근 언론보도가 떠오른다. 부디 서로 먼저, 관계 회복의 물꼬를 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