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한문 현판 아래 한글 현판을 추가 설치한 모습을 상상해 만든 가상 이미지. /광화문 훈민정음체 현판 설치 국민 모임

누구도 예상 못 한 ‘1+1’이었다.

지난달 20일 국무회의에서 최휘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광화문 한글 현판 추가 설치 검토안’을 이재명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경복궁의 얼굴, 광화문 3층 누각 처마에 있는 기존 한자 현판 밑에 한글 현판을 하나 더 걸자는 것이었다. 최 장관은 “외국 관광객이 엄청 오는 곳인데 한자만 있는 건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며 “한글 현판을 추가하면 문화재 원형을 지키려는 정신에 더해 한글이라는 시대적인 요구도 포용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중국 자금성에도 만주어 현판과 한자 현판이 있다”고 했다. ‘가갸날’ 제정 100주년을 맞는 올해, 이 같은 “역사적 유연성”을 벤치마킹하자는 것이다.

◇이랬다가 저랬다가→둘 다

1968년 12월 11일 광화문 복원 기념식에서 공개된 한글 현판.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다. /국가기록원

수십 년 되풀이된 광화문 현판 논란이 또 불붙었다. 발단은 196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6·25전쟁으로 파괴된 경복궁을 재건하며 그해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한글 현판을 달았다. 서울의 중심, 왕궁의 정문, 권력의 정점이라는 상징이 더해지며 광·화·문 세 글자는 정치적 활자가 됐다. 정권이 바뀌며 ‘흔적 지우기’ 목소리가 거세졌다. 노무현 정부였던 2005년 문화재청은 정조 임금의 글씨를 집자해 현판을 바꾸기로 방침을 정했다. 그러나 정조 재임기 경복궁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상태였기에 연결고리가 없고, 당시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노 대통령을 정조에 비유했다는 설화까지 불거지며 공방 끝에 흐지부지됐다. 이듬해 ‘광화문 제자리 찾기’ 사업으로 박정희 정권의 철근 콘크리트 광화문은 철거됐고, 현판도 19세기 경복궁 중건 시 공사 책임자였던 훈련대장 임태영의 한문 필체로 2010년 교체됐다.

잡음은 계속됐다. 불타 사라진 현판 실물 대신 일본에 남아 있던 흑백사진을 디지털로 되살려 제작한 탓에 불완전한 복원이라는 비판이 비등했다. 심지어 현판에 균열이 생겨 불과 몇 달 만에 재교체가 의결되기도 했다. 그러자 한글 단체는 ‘정신적 복원’을 역설했다. 완벽한 복원이 불가능하다면 의미에 집중하자는 주장이었다. “한글이 태어난 경복궁의 정문이자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공간인 광화문에 한자 현판이 걸려 있으면 여전히 중국의 속국 같은 인상을 줄 수 있다”(서예가 강병인)는 것이다. 한문이냐 한글이냐, 20년 넘게 불씨가 사그라들지 않자 ‘한문+한글’이라는 절충안까지 등장한 배경이다. 그러나 정준모 미술평론가는 “국민을 설득할 자신이 없으니 속 편하게 둘 다 달아버리자는 행정 편의적 발상”이라며 “그런 논리라면 글로벌 시대인데 영어 현판은 왜 안 다느냐”고 말했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2010년 광화문 복원 공사 도중 부착되고 있는 한문 현판. 19세기 경복궁 중건 당시 훈련대장이었던 임태영의 글씨다. /오종찬 기자

윤석열 정부 시절이던 2024년에도 유인촌 문체부 장관이 ‘세종대왕 나신 날’을 맞아 광화문 현판을 한글로 바꾸자고 제안했지만 그해 국정감사에서 최응천 국가유산청장은 문화유산 복원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2005년 이후 문화재 복원 연구자들이 내린 결론은 결국 19세기 중건 당시의 ‘보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달 국무회의에서 허민 국가유산청장은 대통령에게 “(광화문 한글 현판 추가에) 저희도 적극 지원할 생각”이라고 맞장구쳤다. 다만 종묘 앞 개발에 대해서는 “수백 년간 유지해 온 역사 문화 경관과 가치를 직접적으로 위협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학계에서는 우려가 쏟아지고 있다. 문화유산에 현대의 가치를 덧씌우려는 시도가 자칫 위험한 국수주의로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장유승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는 “뭔가를 빼는 것뿐 아니라 더하는 것도 손상의 범주에 들어가는데 현판을 새로 다는 행위는 이 분야에 조금만 전문성이 있어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심각한 변형”이라며 “10여 년간 전문가 심의를 거쳐 원형 보존으로 합의된 사안을 전례 없는 방식으로 뒤집는 이유가 궁금하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차라리 전광판으로 바꾸라”는 주장도 나온다. 소모적 실랑이를 반복할 바에는, 한글이든 한문이든 영어든 모조리 표기하라는 일침이다.

◇자부심인가, 자격지심인가

그래픽=송윤혜

‘門化光’ 현판이 ‘광화문’으로 잠시 탈바꿈한 적이 있다. 2014년 광복절,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프란치스코 교황의 시복식을 맞아 한글문화세계화추진본부가 덜컥 감행한 일이었다. 이른 아침 기중기를 동원해 기존 한문 현판을 한글로 쓴 ‘광화문’ 펼침막으로 덮어버렸다. “많은 세계인이 우리나라가 중국이나 일본의 속국으로 알고 있는데 (한문 현판이 중계되면) 아직도 우리나라를 중국 한자를 쓰는 나라로 여길 수 있다”며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글자인 한글을 가진 자주 문화 국가로서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라고 했다. 1시간쯤 지나 천 조각은 철거됐다.

K컬처의 영향력이 여느 때보다 막강해지자 이 같은 ‘수정주의’는 더 힘을 얻고 있다. 한글 전도사 방탄소년단(BTS)의 첫 복귀 무대가 다음 달 광화문 광장으로 결정되면서 일대는 또 한 번 세계적 중심지로 부상할 예정이다. 그러나 현재는 현재, 역사는 역사로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광화문에 한글 현판을 달아 놓는다고 조선 왕조가 한자 문화권이었다는 사실 자체가 가려지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서울의 한 사립대 사학과 교수는 “우리 전통적 문자 생활에서 한문이 차지해 온 비중을 무시하고 이를 부끄러워하거나 한글 현판으로 교체하면 국격이 올라간다고 보는 건 너무 나간 해석”이라고 말했다.

◇표기법? 글씨체? 크기는?

2010년 제작본의 고증 오류 논란으로 재제작에 착수해 2023년 새로 걸린 광화문 현판. /고운호 기자

정부는 올해 한글날에 맞춰 현판 설치 계획에 속도를 낸다는 계획이다. 다만 의견 수렴에는 적지 않은 난관이 예상된다. 현재 광화문 현판은 ‘門化光’으로 적혀 있다. 권위 있는 건물 현판의 경우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는 당대의 우횡서(右橫書)가 반영됐기 때문이다. 이 기준을 따른다면 한글 현판 역시 한문처럼 ‘문화광’이 돼야 한다. 세종 정신에 입각해 ‘훈민정음’ 표기법을 따를 경우에는 현대의 한글 표기와 달라 이에 대한 고민도 불가피하다. 현판 크기와 비율, 구현할 필체의 후보군을 놓고도 진통이 일 것으로 보인다.

졸속 추진은 부실 제작으로 이어져 왔다. 2010년 복원 당시 문화재청이 광화문에 내건 한문 현판은 흰 바탕에 검은 글씨였다. 즉각 고증 오류가 지적됐다. “근정전·근정문·흥례문 같은 다른 경복궁 현판은 검은색 바탕에 금색 글씨를 썼다”는 것이다. 이후 2016년 미국 스미스소니언박물관에 소장된 광화문 사진(1893년 무렵)이 공개되면서 논란이 다시 불거졌다. 재차 검증에 나선 문화재청은 2018년에야 “검은 바탕에 금박 글씨가 원형이 맞다”고 잘못을 인정했다. 엉뚱한 현판은 2023년 교체될 때까지 13년이나 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