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직 맞벌이 부부인 김수명(46·가명)씨는 중학생 외동딸(15)이 3월 개학에 맞춰 전학을 하게 돼 급하게 이사 준비를 하고 있다. 김씨 딸은 지난해 12월 같은 반 ‘절친’ A에게 학폭을 당했다고 신고했다. 사실 확인을 거치는 과정에서 A도 괴롭힘을 당했다며 ‘맞폭’으로 신고했다. 양측 부모의 감정싸움이 얽히며 변호사까지 동원한 전면전이 진행 중이다.
김씨는 “내가 알던 학폭과 요즘 학폭은 너무 다른 것 같다”며 “너무 은밀하고 치밀해져서 예민한 사춘기 아이들의 세계를 헤집어놓는다”고 말했다. 고데기로 상징되는 드라마 ‘더 글로리’ 같은 물리적 폭력은 예전만큼 흔하지 않다. 흔적이 남지 않게, 괴롭힘인지 아닌지 애매하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뤄지는 게 특징이다. 가해자를 특정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이른바 ‘스텔스 학폭’, 드러나지 않으니 피해 학생은 더 고통받는다.
‘단뎀 지옥’과 디지털 ‘파묘’
김씨 딸이 괴롭힘을 당한 통로는 ‘인스타그램’이었다. 같은 반 친구들과 인스타그램에 여러 개 비밀 계정을 두고 DM(직접 메시지·direct message)으로 대화하거나 24시간 이후 사라지는 ‘스토리’를 올려 소통하는데, 여기에서 김씨 딸을 저격하는 글이 올라온 것이다. 수시로 만들어졌다 사라지는 ‘단뎀(단체 DM)’에서 딸의 외모나 행동, 차림새 등을 비꼬는 글이 올라왔다. 중학교 내내 친하게 지냈던 아이들이 가담했고, 그중 A는 절친이었다.
김씨는 “얼마 전까지도 즐겁게 지내는 것 같았던 애가 갑자기 친구들에게 ‘손절’당했다며 난리 치니 당황스러웠다”며 “혹시나 해서 가끔 아이 몰래 휴대전화 통화 기록, 메신저 기록을 찾아봤는데 DM 지옥이라니, 영 헛다리를 짚고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김씨도 처음에는 딸이 주장하는 학폭 상황이 심각하지는 않다고 봤다. 아이들 사이에 흔히 벌어지는 감정싸움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딸은 정신과 치료를 받았고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가고 싶다”며 괴로워했다. 김씨는 “가해자들이 딸을 때리거나 욕한 것은 아니었지만, 친구라고 생각하는 사이에서 교묘하게 조리돌림을 당한 게 큰 충격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익명으로 질문하고 답변하는 형태의 채팅 플랫폼인 ‘에스크(asked)’도 학폭 심의위원회에 단골로 오르는 신문물이다. 이 플랫폼에서 성적인 모욕 글을 올리는 경우가 많은데, 익명이기 때문에 가해자를 찾기가 어렵다. 보호자 대부분은 학폭위에 가서야 이런 채널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서울에 사는 이하율(14·가명)양은 이른바 ‘디지털 파묘(흑역사 캐기)’라 불리는 괴롭힘을 당했다. 이런 식이다. 친구들이 하율이 부모의 SNS를 뒤져 하율이의 어릴 적 사진을 찾아낸 뒤 단체대화방에 올린다. “어머~ 저게 눈이야? 눈인 줄 몰랐잖아. 매력 쩐다” “무슨 물고기 같아. 귀엽다” 단톡방 도마 위에 오른 하율이는 한참 동안 이런 품평의 대상이 됐다. 스스로는 너무나 모욕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친구들은 학폭 조사에서 “귀여워서 그런 건데요” “우리 원래 그러고 노는데요”라고 주장했다. 하율이 케이스를 맡았던 상담센터 관계자는 “이런 경우 교사는 어느 편을 들기 어렵고 같이 어울리지 말라는 해법밖에 줄 수 없는데, 하율이 또래 아이들은 친구 무리에서 떨어져 나오면 진짜 고립된다는 공포가 더 크다”고 말했다.
학폭이 더 은밀해지는 것은 통계로도 확인된다. 최근 10년 사이(2015~2024년) 겉으로 드러나기 쉬운 폭행·상해와 금품 갈취는 각각 19%, 7.6% 줄었지만, 모욕·명예훼손은 65건에서 348건으로 4.4배 늘어났다(서울경찰청). 성폭력도 192건에서 709건으로 2.7배 늘었다. 서울경찰청 하동진 청소년보호계장은 “CCTV 보편화로 ‘퍽치기’ 같은 금방 잡히는 범죄가 줄어든 것처럼, 학폭도 아이들이 처벌의 위험성을 학습하다 보니 눈에 보이는 폭력이 아닌 은밀하고 교묘한 형태로 변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AI와 딥페이크… 괴물로 진화한 학폭
‘자녀에게 스마트폰을 언제 사줄 것인가’라는 대다수 학부모의 고민은 학폭과도 연관돼 있다. 학교 주변에서 벌어지는 많은 학폭과 청소년 범죄가 사이버 폭력이기 때문이다. 사춘기에 접어든 남매를 키우는 주부 김진영(45)씨는 “작년에 친구 아들네 학교에서 수십 명이 연루된 딥페이크 사고가 나서 동네가 발칵 뒤집혔다고 했다”며 “아들은 나쁜 게임과 음란물, 딸은 채팅 앱과 딥페이크 범죄에 노출될까 봐 늘 노심초사한다”고 말했다.
최근 전남에서 10대 딥페이크 사건이 공론화됐다. 한 음란물 사이트에 이 지역 여학생들의 사진이 연달아 올라왔는데, 수사 결과 같은 지역 남학생의 소행으로 드러났다. 가해 학생의 핸드폰에서는 딥페이크 성착취물 40여 장이 발견됐고, 중고생 등 피해자는 20여 명에 달했다. 그런데 가해 학생 측은 오히려 교사 등 주변 사람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해 논란이 됐다. 학폭 지원 기관인 푸른나무재단 김미정 상담본부장은 “딥페이크 피해 학생은 가해자를 찾을 수 없어 스스로 결백을 밝혀내야 하는 상황에 몰리기도 한다”며 “피해자로서 제대로 보호받기 어렵고, 가해자가 친구 등 주변 사람인 경우가 많아 밝혀졌을 때 충격도 더 크다”고 말했다.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산하 중앙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에 따르면, 지난해 피해를 신고한 10대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는 3052명으로, 관련 조사를 시작한 2018년(111명)의 30배 가까운 수준으로 증가했다. 경찰청에 따르면, 2024년 11월부터 작년 10월까지 발생한 딥페이크 범죄 피의자 중 10대가 61.8%에 달했다. 학폭 전문인 한아름 변호사는 “청소년들이 비교적 어리숙해 더 쉽게 적발되는 경향이 있지만, 최근 몇 년 사이 딥페이크 성범죄 관련 사건 의뢰가 크게 늘었다”며 “한 동네가 들썩일 정도로 규모가 큰 사건도 있었고 전국적으로 다발하는 상황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딥페이크까지 가지 않더라도 몰래 친구나 교사 등의 사진을 찍어 공유하고 품평하는 것도 불법 소지가 있다. 학폭 상황에서 영상물 제작·유포가 문제가 되는 경우도 많다. 한 변호사는 “같은 무리 친구들끼리 찍은 단체 사진에서 피해 학생의 얼굴만 가린 뒤 프로필 사진으로 올린다거나, 무릎 꿇고 사과하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 공유하는 행위 등은 모두 학폭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학폭=빨간 줄, 억제제 될까
올해 대학 입시에서는 ‘학폭 무관용 원칙’이 거듭 확인됐다.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진선미 의원이 공개한 ‘2026학년도 수시 전형 학폭 반영 현황’에 따르면, 전국 4년제 대학 170곳에 학폭 가해 전력을 가진 수험생 3273명이 지원했는데, 이 중 2460명(75%)이 불합격했다. 특히 서울대·연세대·고려대 등 서울 주요 11개 대학은 151명 중 150명이 낙방했다.
하지만 이렇게 불이익이 크다 보니 가해자 측의 대응이 더 교묘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우려도 나온다. 입시를 무사히 넘기기 위해 법정 분쟁으로 끌고 가 시간을 지연하는 게 대표적인 사례다. 학폭 신고가 들어가면 가해자로 지목된 쪽에서도 ‘맞폭’으로 거는 경우가 늘어나는 것도 비슷한 이유다.
징계 조치는 1호부터 9호까지로 나뉘는데 비교적 낮은 수준인 1~3호는 학교생활기록부(생기부)에 기재하지 않는다. 4호(사회 봉사)·5호(특별 교육 또는 심리 치료)는 생기부에 기록한 뒤 졸업 2년 후 삭제되고, 6호(출석 정지), 7호(학급 교체), 8호(전학)는 졸업 후 4년 후 삭제할 수 있다. 가장 심각한 9호(퇴학) 조치는 영구히 기록된다. 박시영 변호사(서울 지역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는 “높은 처분을 받은 경우 생기부에 기록하지 못하도록 즉각 집행정지 신청, 행정소송으로 가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며 “‘학폭 필패’인 올해 입시 결과를 볼 때 관련 송사는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