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발 한파가 한반도를 덮쳤다. “혓바닥이 델 만큼 뜨겁고 김이 무럭무럭 떠오르는 시뻘건 장국을 대하고 앉으면 우선 침이 꿀꺽 넘어가고 아무리 엄동설한에 언 얼굴이라도 저절로 풀리고 온몸이 녹아서 근질근질해진다. 어쨌든 대구 육개장은 조선 사람의 특수한 구미를 맞추는 고춧가루와 개장을 본뜬 데 그 본래의 특색이 있다.” 1929년 12월 1일자 잡지 ‘별건곤’에 ‘달성인’이라는 필명의 저자가 쓴 ‘대구의 자랑 대구탕반’이란 기사다. 한국인이면 엄동설한에 뜨끈하고 얼큰한 국물이 간절한 건 시대를 초월하는 모양이다.
대구는 육개장의 본고장이다. 달성인은 위 기사에서 “대구탕반은 본명이 육개장이다. … 시방은 큰 발전을 하여 본토인 대구에서 서울까지 진출하였다”고 했다. 서울의 가장 오래된 식당 중 하나인 ‘조선옥’(1937년 창업)에서는 여전히 육개장을 ‘대구탕’이라 부른다. 과거 서울에서 대구식 육개장이 크게 유행해 대구탕(大邱湯)이라 부르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다. ‘개를 대신한 소고기국’이란 뜻으로 대구탕(代狗湯)이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음식사학자 이성우도 ‘한국요리문화사’에서 “대구식 육개장이 서울로 올라와 대구탕이 되었다”고 했다. 육당 최남선은 ‘조선상식문답’에서 대구탕을 대구 향토 명물로 꼽았고, 소설가 김동리는 자신이 대구에서 먹었던 대구탕 추억을 떠올렸다.
‘육개장 1번지’ 대구에서는 많은 육개장집이 여전히 성업 중이다. ‘따로국밥’ ‘선지해장국’ ‘육개장’ ‘소고기국밥’ ‘한우국밥’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1월 현재 가장 맛있는 육개장집은 어디일까? ‘아무튼, 주말’이 음식·외식업계 전문가 9명에게 ‘으뜸이라고 생각하는 대구 육개장집을 10곳씩 골라달라’고 요청했다. 본인과 관련된 곳은 배제했다. 1등부터 10등까지 순위별로 10점부터 1점까지 매겨 합산했다.
◇대구 육개장 원형 간직한 옛집식당
대구 육개장은 ‘전통·가정식 육개장’ ‘따로국밥’ ‘선지해장국’ 등 크게 세 갈래로 발전했다. 이번 ‘대구 육개장 베스트10’ 조사에서는 ‘옛날식당’이 1위에 오른 데 이어 ‘벙글벙글식당’(2위) ‘온천골’(3위) ‘성암골가마솥국밥’(4위) 등 전통·가정식 육개장이 상위권을 휩쓸었다. 이춘호 대구음식문화학교 교장은 “과거 대구 양반집에서 끓이던 방식으로, 지금도 토박이 가정에서는 이렇게 먹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대구식 육개장이란 무엇일까. 이걸 알려면 ‘개장[狗醬]’ 즉 개고깃국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경상도에서는 개장을 유달리 즐겼다. 하지만 개고기를 먹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들을 위해 개 대신 소고기로 끓인 게 바로 육개장이었다. 소 대신 닭을 사용하면 닭개장이 된다.
대구 육개장은 다른 지역보다 훨씬 매운맛이 특징이었다. 여름에는 ‘대프리카(대구+아프리카)’, 겨울에는 ‘대베리아(대구+시베리아)’라고 불릴 만큼 혹독한 더위와 추위를 겪는 대구에선 매운 음식이 필요했다.
그래서일까, 대구 육개장은 붉고 걸쭉한 고추기름이 다량 들어간다. 여름에는 땀을 배출해 체온을 낮추고, 겨울에는 찬 몸을 데워주는 역할을 한다. 엄청나게 많은 양의 대파를 넣어 달큰한 감칠맛을 낸다. 고사리 등 다른 채소는 거의 들어가지 않는다. 고기를 결대로 찢는 서울식 육개장과 달리 네모나게 칼로 썰어 넣는다. 다진 마늘을 대량으로 추가해 화력을 강화하는 것도 대구 육개장의 특징이다.
달성공원 근처 오래된 골목 안에 숨듯 자리한 옛날식당은 1948년 개업해 80년 가까운 전통을 이어온 노포다. 자개 장식이 박힌 장롱과 타일로 바른 부엌 등 시골 할머니댁을 연상케 하는, 그야말로 옛집이라 할 만하다. 김도형 대구 ‘신암태양칼국수’ 대표는 “옛집식당에서 처음 먹고 ‘어머니가 끓인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맛이 똑같아서 깜짝 놀랐다”고 했다.
사태·무·대파를 기본으로 하는 전통 대구 육개장을 낸다. 선지는 들어가지 않는다. 사태로 초탕을 70% 끓이고 상에 낼 때 재탕한다. 대파는 껍질을 몇 꺼풀 벗겨 흙 냄새가 나지 않게 하고, 80% 정도 끓인 뒤 찬물에 식혀 하얀 대 부분의 단맛을 천천히 우려낸다.
1964년 창업한 벙글벙글식당은 한우 사골을 12시간 고아낸 육수에 양지·대파·무만 넣어 끓인다. 박준형 대구 ‘회성각’ 대표는 “대파 특유의 단맛이 매콤하고 진한 기름과 섞이며 만들어내는 감칠맛이 가히 독보적”이라고 평가했다.
동네잔치 때마다 불려다니며 소고기 국밥을 끓여주던 할머니에게 비법을 전수 받았다는 ‘온천골’은 가정식 소고기국에 가장 흡사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태원 한국프랜차이즈산업협회 대구경북지회 명예회장은 “온천골 육개장의 비결은 ‘절제의 미(味)’에 있다”고 했다. “대파와 무, 한우만으로 단순하면서도 깊은 맛을 냅니다. 가장 익숙하면서도 가장 세련된 육개장의 정점을 보여줍니다.”
◇국과 밥 분리한 국일따로국밥
대구를 대표하는 음식 따로국밥은 6·25전쟁 이후 등장했다. 이번 조사에서 5위에 오른 ‘국일따로국밥’은 따로국밥이 탄생한 식당으로 이름 높다. 식당 창업주인 고 서동술씨는 1946년 대구 한일극장 옆 공터 나무시장에서 나무를 팔았다. 식성 까다로운 남편(서동술씨)을 위해 아내 김이순씨가 나무시장까지 와서 점심을 해주고 갔다. 김씨는 특히 국밥을 잘 끓였다. 나무꾼들이 “나도 좀 달라”며 몰려들었다. 이에 김씨가 무쇠솥을 수레에 싣고 와 팔기 시작한 게 이 식당의 소박한 출발이다.
나무꾼들에게만 팔던 1940년대에는 국을 밥에 말아 팔았다. 6·25가 터지고 전국에서 대구로 몰려든 각계각층 피란민이 식당을 찾으면서 예상 못 한 문제가 발생했다. 양반 출신들이 “상놈이나 먹는 음식”이라며 장국밥을 멸시했고, 국과 밥을 따로 달라고 했다. 결국 국일은 국과 밥이 분리된 ‘따로’라는 메뉴를 국내에서 처음으로 만들게 된다. 국과 밥을 분리해 내는 것은 당시에는 흔치 않았고, 국일을 유명하게 만들었다.
요즘은 대구의 다른 육개장집에서도 밥을 국에 말지 않고 따로 낸다. 하지만 국일은 서빙 방식뿐 아니라 들어가는 재료에 있어서도 전통 대구 육개장과는 차이가 있다. 전통 대구식 육개장이 양지·사태 등 소고기로 국물을 내는 것과 달리, 국일의 따로국밥은 소뼈, 즉 사골 육수를 쓴다. 여기에 선지를 대파, 무, 고춧가루 양념장과 함께 올리는 게 또 다른 차이다. 이 교장은 “사골과 선지를 쓰는 다른 지역의 장터국밥과 대파·무만 들어가는 대구 육개장이 섞이며 새로운 갈래를 만들어냈다”고 했다.
6위에 오른 ‘대덕식당’은 1979년 문을 열어 대구를 대표하는 선지 해장국 식당으로 자리매김했다. 사골 육수에 대파와 무 대신 우거지가 주축이 되고 선지가 들어간다. 맵다기보다 구수하고 시원하다. 서울 ‘청진옥’이나 경기도 ‘양평해장국’을 연상케 하는 맛이다. 7위에 오른 ‘참한우소갈비집’은 한우 갈비로 이름난 식당이지만 육개장도 훌륭하다. 갈비용으로 다듬고 남은 고기를 듬뿍 넣어 끓이는지 국물이 진하고, 기름이 많았지만 불쾌하지 않고 기분 좋은 고소함이 가득하다.
달서구 신당동 ‘조선 38육개장’은 2013년 문을 열었으니 대구 육개장집 중에선 업력이 짧은 편이지만 9위에 오르는 저력을 과시했다. 대구 육개장 명가는 물론 서울·부산·울산·순천 등 전국 내로라하는 식당을 돌며 육개장 맛의 방향을 잡았다. 사골 육수에 소고기는 대구식으로 칼로 썰지 않고 서울식으로 찢어 넣는다. 대구 육개장 맛의 핵심인 무는 물컹한 식감이 고밀도 육수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해 쓰지 않는다. 이처럼 대구 육개장은 시대와 입맛에 맞춰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