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보가 난무하는 가운데 (…) 모든 사실이 확인된 이후 공개적으로 소통하고 사과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 (…) 오정보가 확산되는 상황에서도 정부의 ‘기밀 유지’ 요청을 엄격히 준수했습니다.”
쿠팡 개인정보 유출 사태 이후 김범석 쿠팡Inc 의장이 지난달 발표한 사과문의 일부다. 이 사과문이 공개된 직후 온라인에는 “분량 대다수가 자기 정당화”라는 제목의 분석 게시물이 올라왔다. 게시물 작성자는 사과문을 문장 단위로 나누며 “‘오정보 난무’ ‘정부 요청’ 등 외부 요인을 언급해 사과가 늦어진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며 “결국 ‘미안하지만 우리도 사정이 있었다’는 조건부 사과로 읽힌다”고 주장했다. “고객이 겪었을 불편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 없어 마음으로 쓴 글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평가도 덧붙였다.
사과문이 심판대 위에 오르는 시대다. 정치인이나 기업인·방송인 등의 사과문이 공개될 때마다 문장의 속뜻과 전제를 해석하려는 시도가 이어진다. 잘못 쓴 사과문은 사태를 진화하기는커녕, 오히려 불씨를 키운다.
◇조사 하나가 책임 회피 근거로
사과문을 분석하는 이들은 단어와 표현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한다. 조사 하나, 서술어 하나가 책임 회피의 근거로 지목되기도 한다. 지난달 ‘주사 이모’ 논란으로 사과문을 발표한 방송인 박나래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사실 관계를 차분히 확인해야 할 부분이 있어 법적 절차를 진행 중”이라는 문장을 두고 “‘확인해야 할 부분’이라는 표현을 통해 사안을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고 축소하고 있다”는 해석이 분분했다.
물론 사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다. 하지만 그 마음을 담아내는 그릇인 ‘언어’ 역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해졌다. 사과문 쓰기는 이제 기술의 영역에 가까워지고 있다. 온라인에서는 ‘사과문에 넣으면 안 되는 표현’ 목록이 공유된다. ‘본의 아니게’는 고의가 아니었음을 강조하는 변명으로 읽히고, ‘유감’은 상황은 안타깝지만 자신의 잘못은 아니라는 말처럼 느껴지기에 사과문에 넣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유 불문하고 사과한다’는 말은 무엇을 잘못했는지 밝히지 않은 무책임한 태도로, ‘잘못된 행동인 줄 몰랐다’는 표현은 자기합리화로 지적받는다.
전문가들은 이런 현상을 텍스트 중심 소통이 일상이 된 우리 사회의 한 단면으로 분석한다. 직접 만나 말로 사과하던 문화가 줄고 카카오톡 같은 텍스트 메시지가 주요 소통 수단이 되면서 오로지 문장만으로 상대의 진심을 가늠해야 하는 상황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말투나 표정, 맥락이 사라진 텍스트 환경에서는 상대의 의도를 추정하기 위해 문장 자체에 더 집중하게 된다”며 “그 습관이 사과문 독해에도 적용되는 동시에 남 역시 나를 평가한다는 집단적 도덕주의가 발현되며 더욱 엄격해지는 것”이라고 했다.
그동안 공인들의 사과에 반복적으로 실망해 온 경험이 사과문에 담긴 의도부터 따져보게 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구 교수는 “연예인이나 정치인, 기업인 등의 사과가 실질적 보상이나 구조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며 “신뢰가 작동하지 않을수록 사람들은 말의 진정성보다 말이 어떤 의도를 감추고 있는지 먼저 살피게 된다”고 했다.
◇책임 주체 흐리지 않아야
어떻게 써야 잘 쓴 사과문으로 평가받을까. 전문가 조언을 받아 몇 가지를 소개한다. 우선 ‘어떤 일이 있었는지’보다 ‘무엇이 잘못이었는지’를 분명히 밝히고 책임의 주체를 흐리지 않아야 한다. 이동귀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대중은 사과문에서 감정을 느끼기보다 책임이 명확히 귀속되는지를 본다”며 “잘못의 성격을 단정적으로 규정하고 설명이나 해명으로 빠지지 않을수록 신뢰를 얻는다”고 했다.
조건문을 쓰지 않는다. ‘상처를 받았다면 죄송하다’ ‘불편했다면 죄송하다’ 같은 말은 상황적인 요인에 책임을 전가하는 느낌을 주기 쉽다. 자신과 관계없는 타인의 잘못은 언급을 피한다. “다들 하기에 나도 했다”는 식의 문장은 변명문으로 읽히기 쉽다. 상대의 고통이 덜어지기를 바라는 목적으로 쓰는 글인 만큼 자신의 마음이 아프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강조해서도 안 된다.
가장 중요한 건 ‘책임을 지기 위한 행동’, 즉 직책에서 물러나거나 사퇴 등을 명시하고 ‘재발 방지’ 대책을 내놓는 것이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잘못에 상응하는 대가를 ‘구체적인 행동으로’ 치르겠다는 내용을 분명히 제시할 때 비로소 진정성 있는 사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