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 부다페스트 시내 투어의 집결지는 페스트 시가 동쪽 시민공원이다. 시내 중심가 언드라시 대로 아래로 다니는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세체니 온천 역에 내렸다. 100년 넘는 역사를 지닌 온천으로 관광 명소다. 궁전같이 화려한 온천 건물을 뒤로하고 작곡가 안익태 흉상부터 찾았다. 2012년 서울시가 세운 흉상 아래엔 이름과 생몰연도(1906~1965)가 적혀 있었다. 1938년부터 리스트 음악원에서 수학했다는 희미한 기록이 전부였다.
안익태는 왜 이 도시에 흉상으로 남아있을까. 그는 1936년 여름 잘츠부르크에서 명지휘자 펠릭스 바인가르트너와 브루노 발터가 이끈 지휘 아카데미에 참가했다. 빈 국립오페라극장 예술감독을 지낸 바인가르트너의 도움 덕분인지 그해 9월 11일 부다페스트에서 헝가리 국립교향악단을 지휘할 기회를 잡았다. 베토벤 ‘에그몬트’ 서곡과 슈베르트 미완성 교향곡, 그리고 우리 민요를 편곡한 ‘전원’(방아타령)을 연주했다. 라디오 중계까지 한 이 연주회는 안익태의 지휘자 공식 데뷔를 알리는 무대였다. 1938년 6월 27일엔 헝가리 국립오페라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한국 환상곡’까지 선보였다.
안익태는 1938년 10월부터 1941년까지 부다페스트에 머물며 리스트 음악원에서 수학했다. 당대 최고의 헝가리 작곡가인 졸탄 코다이와 에르뇌 도흐나니를 사사하면서 음악적 기량을 끌어올렸다. 안익태의 지휘자 경력은 부다페스트에서 출발했다.
◇리스트가 초대 원장 맡은 음악원
부다페스트 공항에 내리자마자 호텔에 가방만 던져놓고 리스트 음악원으로 향했다. 이날 저녁 음악원 대극장에서 실내악 연주가 있었다.
1875년 개원한 음악원은 리스트가 기틀을 닦고 버르토크가 제자를 키워낸 곳이다. 이런 클래식 음악의 성지에서 연주를 듣는다는 상상만 해도 떨렸다. 먼저 아르누보 스타일의 고풍스러우면서 화려한 실내 분위기에 압도됐다. 프랑스 피아니스트 피에르 로랑 에마르를 중심으로 버르토크, 쇤베르크, 브람스 작품을 연주했다. 버르토크가 제자를 길러낸 학교에서 버르토크 음악을 듣다니, 특별한 경험이다.
◇帝國의 유산, 국립오페라극장
언드라시 대로변 국립오페라극장은 1884년 개관한 네오르네상스식 화려한 건물이다. 이보다 15년 전 들어선 빈 국립오페라극장과 닮은꼴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가 건축비를 댔다. 개관 초 구스타브 말러가 음악감독을 맡아 급성장했다.
이 극장에서 본 발레 ‘메리 위도우’는 서구 극장 못잖은 높은 수준이었다. 연주에 나선 오케스트라가 80여 년 전 안익태의 ‘한국환상곡’을 연주한 악단이라니, 더 애착이 갔다.
이탈리아 스타 테너 비토리오 그리골로의 리사이틀도 인상적이었다. 도니체티 ‘사랑의 묘약’ 중 ‘남몰래 흘리는 눈물’로 시작한 연주는 샹송과 칸초네, 재즈와 영화음악까지 넘나들며 청중을 들었다 놨다 했다. 춤까지 추며 익살 부리던 그리골로는 앙코르로 푸치니 ‘토스카’의 ‘별은 빛나건만’을 부르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리스트 피아노가 국립박물관 대표 유물
헝가리에서 리스트의 유명세는 압도적이다. 헝가리 국립박물관에서도 리스트를 만날 수 있다. 베토벤이 소유했다가 리스트에게 넘어간 피아노다. 리스트가 이 박물관에 와서 연주한 피아노라고 했다.
아홉 살 때부터 헝가리를 떠나 파리에서 성장한 리스트는 헝가리어를 거의 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가 연주한 피아노를 국립박물관 대표 유물로 내세울 만큼 국민 음악가 대접을 받는다. 부다페스트 공항도 그의 이름을 땄을 정도다.
◇홀로코스트 비극 알리는 주인 잃은 신발
부다페스트 곳곳엔 굴곡 많은 현대사의 자취가 남아 있다. 페스트 쪽 다뉴브 강가에 어지럽게 널린 주인 잃은 신발들도 그중 하나다. 1944년 10월부터 1945년 2월까지 파시스트 민병대원들에게 살해당한 유대인들을 추모하는 기념물이다. 10대 청소년들이 대부분인 민병대원들은 한겨울 추위 속에 유대인들의 옷을 벗기고 철사로 3명씩 손목을 묶은 뒤 가운데 사람의 등에 총을 쏴서 강물에 빠뜨렸다. 외국인 단체 여행객을 안내하던 가이드는 “나치가 유대인들을 살해했다”고 에둘러 설명한다. 실제론 헝가리인들이 저지른 반인도적 범죄다.
◇‘스탈린의 아이들’ 진주
헝가리의 전후(戰後) 상황은 한국 현대사와도 겹친다. 소련군이 진주한 후, 대규모 약탈·강간·체포가 자행됐다. 15만명이 성폭행당하고 수많은 사람이 소련으로 끌려가 강제 노동에 시달렸다고 한다.
모스크바로 망명했던 공산주의자 300명이 부다페스트로 돌아온 것도 익숙한 장면이다. ‘스탈린의 아이들’은 소련군의 후원 아래 권력을 장악한 후 2차 대전 때 파시스트 정부와 싸운 토착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했다. 내무장관까지 지낸 러이크 라슬로는 스탈린이 파견한 KGB 요원에게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미제(美帝) 간첩이라고 자백하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 당시 인구 1000만명도 안 되는 헝가리에서 3년간 150만명이 기소되고, 그 절반이 투옥당했다.
1956년 12월 소련은 부다페스트에 전차를 앞세우고 군대를 투입해 압제에 맞서던 시위대를 진압했다. 청소년을 비롯한 수많은 시민들이 죽었다. 시인 김춘수는 분노했다. 장준하가 이끌던 잡지 ‘사상계’(1957년 4월호)에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을 실었다.
‘다뉴브강(江)에 살얼음이 지는 동구(東歐)의 첫겨울… 느닷없이 날아온 수발의 쏘련제 탄환은/땅바닥에 쥐새끼보다도 초라한 모양으로 너를 쓰러뜨렸다’.
이념과 폭력에 희생된 약소민족의 아픔을 함께한 이 시는 ‘반공시’로 폄하된 적도 있다. 하지만 세월을 견디고 살아남아 김춘수의 대표작이 됐다.
부다 언덕에서 찍는 인생 샷과 다뉴브강 야경뿐 아니라 이 도시엔 곱씹을 만한 역사와 음악이 넘친다. 부다페스트 출신 저널리스트 빅터 세베스티엔의 ‘부다페스트’(까치글방)를 읽고 가면 더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