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너무 교만한 거 아닙니까? 의료 서비스를 받으러 온 소비자가 있어야 의사도 있는 것 아닌가요?”
무릎이 아파 고민하며 몇 달을 대기한 후 최근 한 대학병원에서 진료를 받던 내가 정형외과 의사에게 던진 말이다. 드디어 대면을 하게 된 그 의사, 검사 차트는 본척만척, 다리를 한번 비틀어 보더니 “노화예요. 가만히 있다 때 되면 인공관절 수술 받는 것 말고는 별 도리가 없어요”라고 한다. 게다가 “수술 이전 다리근육 강화운동? 별 도움 안 돼요. 여기저기에서 다른 치료받고 오면 아예 수술을 거절할 테니 그리 아세요”라며 일말의 희망까지 끊어내는 듯한 그 냉랭한 언사에 내가 발끈한 것이다. “아픈 게 무슨 큰 죄냐?”며.
집 근처 동네 작은 의원에서 “현재 관절염 3기로 4기가 되면 인공관절 수술을 받아야 한다”기에 겁먹고 구원요청차 큰 병원에 갔던 거다. 내 격한 반응에 움찔하는 의사를 뒤로한 채 나오면서 “저 사람 출근 전 부부싸움 하고 나온 거 아니야?”라며 상대의 심사를 점쳐보지만 섭섭함이 가시질 않았다. 그 의사, 미안했던지 간호사 편에 주의사항과 운동요령 설명서를 전달하기에 마음 풀기로 했다. 시간이 가고 진정이 되자 “그놈의 ‘노화’라는 단어에 내가 과민반응한 것 아닌가?” 하는 자책도 들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외치며 살고 있는데 자꾸 ‘노화’를 주입, 상기시키니 ‘노년 콤플렉스’에라도 걸린 건가 해서 말이다.
나이 앞자리에 7이 붙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몸 여기저기에서 고장신호를 보낸다. 어느 병원을 가든 의사들은 이구동성으로 ‘노화가 원인’이니 ‘당연한 결과’라며 반응이 시큰둥하다. 그런 대답을 들은 후의 심정은 “그래, 또 노화 탓이로군. 더 이상 고민 않고 대충 주사나 약 주고 때우면 되는 거냐?”라는 씁쓸함이었다. 하긴 우리 또래들과 하는 주된 대화가 어느덧 갖가지 신통한 의사 및 병원 명단 나누기가 됐다. 그러니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게 아니라 ‘질병과 친구처럼 지내야 하는 노년기’에 진입한 게 맞는 걸까 싶어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이 나이에 통과의례인 양 다들 겪는 문제는 무릎 관절염에 당뇨·백내장·잇몸질환·이명·불면증 등 수두룩하다. 나이 든 장·노년 사람들이 흔히 하는 ‘착각 목록’ 중 선두가 “인생은 60부터” “자기만은 안 늙을 줄 안다”인데 정직한 몸이 ‘정신 차려라’며 이실직고 중인 셈이다. 그러니 심통을 부리다 곧장 기가 죽는 거다.
그러나 나는 외친다. “착각이 뭐 어때서?”라고. “세상 마음먹기 달려 있다”는 말도 있고 “사람의 영혼이 육체를 지배한다”는 말도 체험으로 증명되지 않는가 말이다. 그래서 ‘착각의 미학’이라는 언어도 꿋꿋하게 회자되고 있는 거다. 누구나 제 잘난 맛에 살고, 우리들의 일상에서 착각이 쟁쟁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눈이 멀고 착각해서 느닷없이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또 그 수많은 멋진 예술 작품도 대상물을 비현실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탄생한 게 아닌가. 우리의 모든 활동은 즐거운 척, 건강한 척 등 ‘좋은 착각’이 있어 더 생기발랄할 수 있는 거다. 조물주가 잘 살아내라며 선물한 ‘착각의 자유’, 실컷 누리는 게 현명한 거다. “인생 늙는 것은 못 막지만, 늙음을 대하는 태도는 선택할 수 있다”는 말도 있잖은가.
요즘은 흐르는 시간이 마치 만져지는 물체인 양 농밀하게 느껴진다. 하나둘, 가까운 지인들과의 헤어짐이 시간의 실체를 증언한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그리됐다. 당해 봐야 안다.
여전히 또래들과 나누는 ‘건강용 수다’ 도중 누군가 무릎을 치며 제안한다. “에잇, 우리 친구들 병원 나들이 ‘찐경험’도 살릴 겸 이참에 실력 있고 친절한 명의(名醫)들 소개 유튜브라도 할까? 까짓것 돈도 벌고 시간도 알차게 보내게.” 모두를 잠시 들뜨게 만든 그 제안, 일단 구미가 당긴다. 인플루언서? 다들 두고 보잔다! 여전히 ‘착각은 자유’이며 씩씩한 생존 무기인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