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라는 마라톤을 달리고 있는 여러분께 이 일기장을 선물합니다. … 육아 일기, 기도 노트, 감사 일기, 운동의 기록으로 쓰셔도 좋습니다. 무엇이 되었든 나만이 쓸 수 있는 10년의 기록을 남겨 주세요. 그 이야기는 누구도 깨뜨릴 수 없는 한 권의 책이 될 것입니다.”

백과사전 못지않은 두께의 10년 다이어리. 표지엔 2026-2035란 숫자가 적혀있다. /밤의서점

서울 서대문구 대신동 ‘밤의서점’에서 다이어리를 주문하면 이런 편지가 함께 동봉된다. 백과사전 못지않은 두께의 다이어리 겉면엔 2026-2035란 숫자가 적혀 있다. 이 다이어리는 올해부터 2035년까지 10년간 쓰는 ‘10년 다이어리’다. 1월 24일이라고 적힌 페이지를 펼치면, 2026년부터 2035년까지 10개 연도가 적힌 칸이 있다. 다이어리를 써 나가다 보면 작년 같은 날짜엔 자신이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 재작년은 어땠는지 10년치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이 서점 김미정(49) 점장은 “원래 노트와 만년필 수집하는 걸 좋아하는 ‘문구 덕후’라 해외여행 가면 꼭 서점이나 문구점을 찾는데, 그때 처음 10년 다이어리를 접했다”며 “독립 서점을 열면서, 서점에 오는 사람이라면 나처럼 기록과 문구를 좋아하는 분이 많다고 생각해 10년 다이어리를 제작하게 됐다”고 했다. 이 서점은 2018년부터 매년 다른 디자인의 ‘10년 다이어리’를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10년 다이어리 내지. 한 날짜에 10개년이 있다. /밤의서점

몇 년 전만 해도 ‘10년 다이어리’ 같은 다년(多年) 다이어리는 국내엔 판매처가 드물어 독일 문구 브랜드 ‘로이텀’이나 일본 ‘미도리’ ‘호보니치’ ‘NU’ 등을 직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최근에는 달라졌다. 국내 여러 브랜드에서 ‘5년 다이어리’ ‘10년 다이어리’ 같은 여러 해 기록이 가능한 다이어리 제품을 출시하고 있다. 특히 올해는 5년 다이어리를 작성할 경우 2030년까지 쓸 수 있어, 딱 떨어지는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에겐 5년 다이어리가 인기라고 한다. 재작년 말 개그맨 김영철이 자신의 유튜브에서 “진짜 살면서 너무 잘하고 있는 것”이라고 소개해 화제가 된 것도 ‘5년 다이어리’다. 조금 더 짧은 시간의 기록을 원하는 이들은 ‘3년 다이어리’도 많이 선택한다.

한 해 쓰는 다이어리도 점차 사라지는 시대, 다년 다이어리를 선택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20년간 몸담았던 직장을 그만두고 최근 새 일을 모색 중이라는 조모(45)씨는 “10년 후면 50대 중반인데, 10년 동안 나란 사람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삶을 기록하고 반추해 보고 싶어 10년 다이어리를 구입하게 됐다”며 “아직 첫해라 쌓인 기록이 많이 없지만 점차 기록이 쌓이면서 3년 전, 5년 전 나와 마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기대도 되고 설레는 마음”이라고 했다.

개그맨 김영철이 "살면서 너무 잘하고 있는 일"이라고 소개했던 5년 다이어리./유튜브

재작년 아이를 낳은 직장인 이정민(35)씨는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아이 모습을 기록하고 싶어 ‘10년 다이어리’를 장만했다. 이씨는 “매일 일상이 쌓이니 별다른 글솜씨가 없어도 저절로 근사한 ‘육아 일기’가 되더라”며 “지난 기록을 읽다 보면 아이가 커 가는 과정은 물론 엄마로서 나 역시 매년 성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올해 결혼 10주년을 맞이한 김모(44)씨는 최근 결혼기념일 선물로 10년 다이어리를 샀다. 그는 “아내에게 앞으로의 10년도 잘 부탁한다는 뜻으로 10년 다이어리를 선물했다”며 “결혼 20주년이 돼 함께 이를 돌아보면 큰 의미가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다이어리 판매자이기 전 오랜 시간 다이어리를 써온 애용자이기도 한 김미정 점장은 “10년 다이어리의 매력이라고 하면, 어느 시기 자기 자신의 패턴을 발견하게 된다는 점”이라며 “1·2월의 나는 많은 계획과 다짐을 하면서 아침 시간을 활발히 사용하고, 가을의 나는 좀 감상적인 기분에 자주 젖고, 일이 몰리는 바쁜 시기엔 10년 다이어리를 공백으로 두는 일도 왕왕 있더라”고 했다. 그는 “10년 다이어리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내가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경험을 제공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