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려주세요.” 생명이 위협받을 때 내뱉는 절박한 외침. 112나 119 신고에서 들을 법한 구조 요청. 그런데 요즘 꽤 흔해졌다. 그저 ‘이걸 어쩐다?’ ‘관심 좀 가져달라’ 정도의 의미로, 또는 ‘너도 구린 데 많으니 내 흠 정도는 덮어줄 수 있잖아’란 은근한 회유와 협박으로 말이다.
이 유행의 원조는 인터넷 주식·코인방이다. 고점에 물리거나 손실이 커진다 싶으면 “살려주세요, 본전만 뽑으면 다시는 얼씬 안 할게요” “살려줘요, 제발 공매도 금지 좀” 같은 글이 주르륵 올라온다.
이는 코로나 이후 빚투·폭락장이 펼쳐질 때 처음 유행한 표현이다. 2021년 한 정신과 의사가 낸 주식 중독 극복기 책 제목이 ‘살려주식시오’였다. 물론 남이 살려줄 방법은 없다. 이건 ‘좋은 정보 좀 달라’는 부탁 또는 푸념 섞인 감탄사에 가깝다.
온라인 게임과 소셜미디어 등에서도 ‘살려달라’는 말이 흔하게 오간다. 휴대폰 배터리가 닳아 급하게 보조배터리를 빌려야 할 때, 담뱃불을 빌릴 때도 “살려다오”를 외친다.
‘살려주세요, 끼워주세요’라는 차량 스티커도 등장했다. 끼어들면 안 되는 구간에서 상습적으로 끼어드는 운전자들에게 ‘초보운전’ ‘아기가 타고 있어요’의 약발이 떨어진 탓이다.
어린이·청소년 사이에서도 “살려줘”가 유행어다. 서울 대치동에 본원을 둔 한 유명 수학학원은 원생에게 ‘살려주세요 쿠폰’ 일명 ‘살주 쿠폰’을 지급한다. 학원이 설정한 각종 규칙 위반 때 벌점을 받지 않게 하는 ‘면책 쿠폰’이다. 이 학원 관계자는 “애들이 바닥에 돈은 떨어져도 안 줍지만, 살주 쿠폰을 흘리면 쟁탈전이 벌어져 쿠폰 실명제까지 도입했다”고 했다.
‘살려주세요’는 책임 회피와 협박의 치트키가 되기도 한다. ‘저속노화’ 정희원 박사는 동료를 스토킹·공갈미수 가해자로 고소하고선 뒤로는 “선생님, 살려주세요”란 문자를 보냈다.
이혜훈 기획예산처 장관 후보자도 갑질·투기 의혹이 일자 야당 의원들에게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 메시지를 보냈다고 알려졌는데, 본인은 부인했다.
강선우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022년 지방선거 당시 서울시의원 공천신청자 김경씨에게 1억원을 받았다며 당 공천관리위원회 김병기 간사에게 “의원님, 저 좀 살려주세요”라고 했다. 돈은 돌려주지 않은 상태로, 이는 ‘그냥 공천 주세요’란 말과 다름없었다. 다음 날 정말 김경 시의원이 단수 공천됐기 때문이다.
서로 살려주던 사람들은 서로 목을 물고 늘어지는 사이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