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 미도산에서 찍은 서울고속버스터미널 일대. /김두규 제공

흔히 서울 강남을 ‘부의 상징’이라 말한다. 자연스럽게 풍수상 길지라는 평이 따른다. 그러나 냉정히 살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 점을 가장 명확하게 짚은 인물이 박시익(1943~) 박사다. 한양대 건축공학과 졸업 후 고려대에서 국내 최초로 풍수지리를 주제로 석·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터에 대해 늘 솔직담백하다. 돌려 말하지 않는다. 박 박사의 지론은 단순명쾌하다.

“부자가 되는 터가 있고, 부자가 사는 곳이 있다.” 그에 따르면 강남은 후자에 가깝다. 부자들이 모여 살기에 편한 곳이지, 기업과 부가 창출되는 터는 아니다. 실제로 대기업 본사가 강남보다 강북, 특히 사대문 안에 압도적으로 많은 현실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고 강남 전체가 길지가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풍수가 요구하는 조건을 충족한 곳에는 예외 없이 굵직한 건물과 기업이 들어섰다.

풍수상 길지의 조건은 용·혈·사·수(龍·穴·砂·水)를 구비해야 한다. 주산에서 이어지는 지맥[龍]이 분명해야 하고, 건물이 안착할 방정한 터[穴]가 있어야 하며, 주변의 산과 언덕[砂]이 이를 보호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결정적인 요건은 물[水]이다. 이런 조건을 갖춘 땅은 처음부터 드러나기보다 대개 우연한 계기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운이 따라야 한다.

잠실 123층 롯데월드타워가 대표적이다. 한강과 석촌호수에 둘러싸인 이곳은 전형적인 득수국(得水局), 즉 ‘물명당’이다. 그러나 이 땅은 처음부터 풍수를 따져 잡은 터가 아니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올림픽조직위원회가 자금 마련을 위해 체비지를 처분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박세직 위원장은 최악의 경우에도 자금 조달이 가능하다는 이유로 롯데를 선택해 강권했고, 신격호 총괄회장은 기업보국이라는 신념에 따라 이를 수락했다.

이후 롯데는 대박을 터뜨렸다. 땅속에서 질 좋은 모래가 나왔다(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퇴적된 모래). 당시 건설 붐으로 모래 가격은 문자 그대로 금값이었다. 모래를 팔아 매입 대금 상당 부분이 충당될 정도였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것은 그 땅에 무엇을, 어떻게 짓느냐였다. 신격호 회장은 “언제까지 고궁만 보여줄 수는 없다. 그 나라의 빛나는 볼거리로서 마천루만 한 것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탄생한 롯데월드타워는 세계에서 여섯째로 높은 초고층 빌딩으로 대한민국과 서울의 위상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롯데월드타워가 한창 지어지던 때, 현대차그룹은 삼성동 옛 한전 부지에 115층, 571m 규모의 신사옥을 짓겠다는 구상을 발표했다. 롯데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현대차그룹이 높이를 낮추는 것으로 계획을 바꿨지만 실현됐다면 대한민국 최고 마천루가 됐을 것이다.

1930년대 미국 뉴욕에서는 크라이슬러 빌딩과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이 최고 높이를 놓고 경쟁했다. 이 경쟁은 결과적으로 뉴욕의 ‘마천루 숲’을 선도했고, 도시 가치를 비약적으로 끌어올렸다. 둘은 경쟁자가 아닌 대대적(對待的) 존재였다. 필자는 롯데와 현대차가 강남 평지에 새로운 ‘마천루 숲’을 견인하는 대대적 관계가 되기를 기대했다.

서울시는 지난해 11월 서울고속버스터미널 건물을 허물고 최고 60층 이상 주상 복합 단지와 입체 환승 센터 등을 짓는다는 내용의 구상안을 발표했다. 이 터는 ‘장소성(placeness)’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이다. 경부선과 호남선, 그리고 신세계백화점이 결합된 이곳은 지난 50년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거의 예외 없이 이용해 온 장소다. 서울로 오는 사람, 서울을 떠나는 사람, 그리고 오는 사람 맞이하고, 가는 사람 작별하는 기쁨과 슬픔의 감정들이 켜켜이 쌓인 곳이다.

필자는 인근 ‘S아파트’에서 2004년부터 2017년까지 살았다. 오가는 길에 이곳을 유심히 살폈다. 고속버스터미널 남쪽에는 미도산이라 불리는 작은 산이 있다(미도아파트와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 사이). 서리풀공원과 몽마르뜨공원을 품고 있다. 두 공원을 이고 있는 지맥은 청권사(효령대군 묘와 사당)를 지나 우면산으로 이어진다. 필자의 산책 코스였다. 도심 개발 속에서도 중심 지맥이 전혀 다치지 않고 미도산까지 내려오다가 한강을 조금 앞두고 멈춰 선다. 바로 지금의 고속버스터미널 자리다. 큰 용[황룡·黃龍]이 큰 강을 건너는 황룡도강형(黃龍渡江形)의 길지가 분명하다.

서울고속버스터미널 복합 개발 구상안은 이 터가 가진 장소성과 풍수적 가치를 구현해 서울의 스카이라인을 새롭게 변모시킬 마천루의 등장을 예고하고 있다. 뉴욕이나 도쿄의 혁신적인 도심 개발 사례들처럼, 서울의 공간 가치를 높이고 글로벌 경쟁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