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유현호

“참 예의 없는 일인데요. (조국) 대표한테 정치적인 걸 제안하면서 문자를 보냈다는 것도, 참… 이준석 대표답다. (중략) 형식적으로 참… ‘뭐 없다’란 생각이 들고.”(조국혁신당 신장식 의원)

“신장식 의원이 희한한 소리를 하는데, 조국 대표께 제가 보낸 문자 전문을 공개합니다. 어디에 싸가지론이 등장할 개연성이 있는 거죠?”(개혁신당 이준석 대표)

한국 정치판의 오래된 레퍼토리인 ‘싸가지론’이 또 등장했다. 이번엔 문자메시지가 도화선이 됐다. 이준석 대표가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에게 문자메시지로 야당 대표 연석회의를 제안한 것을 신장식 의원이 비판하자, 이 대표가 이를 즉각 자신을 향한 싸가지론으로 규정하며 정면 반박한 것이다.

한국 정치사에선 ‘무슨 말을 했나’보다 ‘어떻게 말했나’가 더 크게 다뤄지는 장면이 반복돼왔다. 싸가지론은 내용을 따지기보다 말투·태도·절차 등을 문제 삼아 공세를 펼칠 때 소환되는 전략적 프레임이다. 단순한 예의범절 논란을 넘어, 기존의 질서·격식을 중시하는 관점과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직설적 소통 방식이 충돌하는 지점이다. 여의도에서 굳어진 이 잣대는 정치 담장을 넘어 사회 전반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싸가지론을 두고 한쪽은 “사람에게는 지켜야 할 선이 있다”고 말하고, 다른 쪽은 “메시지로 맞서기 어려우니 메신저를 공격하는 것”이라고 반박한다.

◇여의도를 넘어 사회 전반으로

조항범 충북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에 따르면, ‘싸가지’는 처음 돋아나는 어린잎을 뜻하는 ‘싹’에 접미사 ‘-아지’가 붙은 말로, 본래는 어떤 일이나 사람이 잘될 것 같은 낌새나 징조를 뜻하는 ‘싹수’와 같은 의미다. 이런 맥락에서 ‘싸가지 없다’는 표현은 장차 잘될 가능성이나 장래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가망이 없다는 것이다. 존재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이 말은 무례한 사람을 비난하는 표현으로 쓰였고, 예절이나 버릇이 없다는 뜻으로 굳어졌다.

지난 2005년 열린우리당 회의에서 유시민(오른쪽) 당시 의원과 김영춘 의원이 서로를 바라보는 모습. /조선일보DB

싸가지 유무로 정치인을 평가하는 프레임인 싸가지론이 정치 무대에 자리 잡게 된 계기로 자주 거론되는 장면이 있다. 2005년 김영춘 전 의원은 유시민 전 의원을 향해 이렇게 언급했다. “‘옳은 소리를 저토록 싸가지 없이 말하는 재주는 어디서 배웠을까?’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이게 널리 회자되며 싸가지는 유 전 의원을 설명하는 상징적 표현처럼 굳어졌다. 당시 그의 날카롭고 직설적인 화법을 두고 ‘내용은 맞지만 불편하다’는 인식이 정치권과 대중에 퍼져 있었고, 김 전 의원의 말은 이를 공론화한 것이었다. 싸가지론에 대해 초반에는 특히 민주당에서 예민하게 반응했다. “우리가 이렇게 몰락한 것은 싸가지가 없어서”(김부겸·2007년) “참여정부는 쉽게 말해 싸가지가 없는 정권이었다”(정성호·2008년) 등의 자성이 터져 나왔고, 공천 배제 기준으로도 거론됐다. 강준만 전북대 명예교수는 2014년 낸 책 ‘싸가지 없는 진보’에서 싸가지를 ‘심한 무례’ ‘도덕적 우월감’ ‘언행 불일치’ 등을 지적할 때 쓰이는 말이라고 정리했다.

싸가지론은 곧 정치권 전반으로 확산했다. 특히 직설적 화법으로 상대를 몰아붙이거나, 위계나 관행 등을 거스르는 것처럼 보이는 정치인들에게 따라붙었다. 이준석 대표가 대표적이다. 아버지뻘인 안철수 의원을 ‘안철수씨’라고 부르거나 한국에서 60년 넘게 산 인요한 전 의원에게 ‘미스터 린턴(Mr. Linton)’이라고 칭하는 언행은 논란을 불러왔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도 싸가지론의 단골 표적이다. 장관 시절 거취를 묻는 의원에게 “그냥 의원님 혼자 궁금해하시면 될 것 같다”고 답하는가 하면, “민주당은 저 없으면 어떻게 사셨을지 모르겠다” “민주당 조금만 더 힘내주십시오. 어차피 입장 바꿀 거 아닙니까?” 등의 발언이 이어지면서 그의 화법을 문제 삼는 목소리가 나왔다. 이재명 대통령도 싸가지론의 주요 타깃이었다. 2017년 문재인 전 대통령과 맞붙은 대선 경선 토론에서 이 대통령은 “그런가 아닌가만 말해달라” “A를 물으면 A를 답하라”고 몰아붙이는 등의 모습으로 반발을 샀다. 이 대통령은 2020년 경선 당시를 회고하며 “제가 좀 싸가지가 없었던 것 같다. 과했던 측면이 있다”며 몸을 낮췄다. 반대로 ‘싸가지 있음’을 전략적 자산으로 삼아온 정치인들은 논란이 될 만한 발언을 해도 그간 구축해 놓은 ‘품성의 방패’ 덕분에 설화를 비켜 가곤 했다.

지난 2024년 이른바 '하극상' 논란 뒤 손흥민 선수가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과 글. 당시 이강인 선수가 런던으로 손 선수를 찾아가 사과했다. /인스타그램

싸가지론은 정치권 바깥으로 번졌다. 2024년 국민신문고에는 축구 선수 이강인의 국가대표 자격을 박탈하라는 민원이 접수됐다. 2023 카타르 아시안컵에서 대표팀 주장 손흥민과의 충돌로 ‘하극상’ 논란이 불거진 탓이다. “아무리 공을 잘 차도 싸가지 없는 사람은 퇴출해야 한다”(홍준표 당시 대구시장)는 공개 발언이 나왔고, 이강인을 광고 모델로 기용한 기업들에 대한 불매 운동까지 벌어졌다. 이강인이 직접 런던으로 건너가 손흥민에게 사과하고, 손흥민이 소셜미디어에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을 올리고서야 사건은 일단락됐다.

직장에서도 싸가지론은 작동한다. 업무 성과보다 호칭·말투 같은 태도를 우선적으로 평가하는 이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상사에게 짧게 답하거나 회식이나 야근 같은 관행에 거리를 두는 행동은 곧잘 ‘싸가지 없다’는 평가로 이어진다. 직장 내 MZ세대의 비율이 커지면서 싸가지론의 유효성은 더 커졌다.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2022년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요즘 젊은 세대는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지 않는다”는 응답이 75.5%에 달했다. 2024년 중앙노동위원회 조사에서도 향후 가장 심해질 직장 내 갈등으로 ‘MZ세대와의 갈등’(43.3%)이 1위로 꼽혔다. ‘싸가지’라는 잣대가 직장 내 세대 전쟁의 핵심 지표가 된 셈이다.

◇우리나라에서 강력한 까닭은

한국 사회에서는 ‘능력이 있어도, 싸가지 없으면 탈락’이라는 인식이 비교적 폭넓게 퍼져 있다. ‘싸가지도 능력’이라는 주장이 나올 정도다. 선거 때마다 유권자들 사이에서는 “일 잘해도 싸가지가 없어서 표를 줄 수 없다”는 말이 공공연히 오가고, 싸가지 없다는 낙인이 찍힌 정치인들은 적극적으로 항변하며 ‘싸가지 있음’을 입증하려 안간힘을 쓴다.

채용 시장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펼쳐진다. 커리어 플랫폼 사람인이 기업 인사 담당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채용 1순위로 가장 많이 꼽힌 항목은 ‘밝고 예의 바른 태도를 지닌 지원자’였고, 가장 뽑기 싫은 유형으로는 ‘태도가 불손하고 예의 없는 지원자’가 지목된 바 있다. 잡코리아 조사에서도 신입 채용에서 가장 중요하게 평가하는 요소로 ‘인성과 태도’가 업무 능력을 앞섰다.

태도가 능력보다 먼저 평가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회심리학자 수잔 피스케(프린스턴대 교수) 등이 제시한 ‘고정관념 내용 모델(SCM)’에 따르면, 인간은 특정 대상이나 집단을 인식할 때 ‘따뜻함’과 ‘유능함’이라는 두 축을 활용한다. 사람들은 상대의 능력을 판단하기에 앞서, 그 의도가 우호적인지(따뜻한지)부터 가늠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인간이 상대가 자신에게 해가 될 가능성이 있는지를 먼저 판단하도록 진화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유능하지만 따뜻하지 않다고 인식되는 대상, 즉 능력 있지만 싸가지 없는 사람은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기 쉽다.

싸가지론이 한국 사회에서 강하게 작동하는 배경에는 예의범절과 위계를 중시해 온 유교적 사회 문화가 깔려 있다. 개인의 말과 행동은 단순한 표현 방식이 아니라, 공동체의 질서와 규범을 존중하는지에 대한 신호로 읽혀왔다. 문화심리학자 미셸 겔펀드(스탠퍼드대 교수)는 한국을 사회적 규범이 엄격하고 위반에 대한 관용이 낮은 ‘빡빡한(tight) 사회’로 분류했다. 이런 사회일수록 규범이 촘촘하게 작동하며, 이를 얼마나 성실히 준수하는지가 신뢰와 평가의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경향이 있다. 이런 환경에서 ‘싸가지 없는’ 행위는 공동체의 안정성을 해칠 수 있는 일탈로 간주되기 쉽다.

지난해 5월 18일 대선 후보자 1차 TV 토론회에서 개혁신당 이준석(왼쪽) 당시 후보와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의 모습. /KBS

이런 맥락에서 싸가지론은 일종의 사회적 필터로 기능해 왔다. 개인의 태도가 그 사람이 우리 공동체에 적합한 인물인지, 일을 맡길 만한 자격이 있는지를 가늠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작동해 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싸가지론이 지닌 문제가 적지 않다. 무엇이 무례인지에 대한 합의가 없어 자의적 판단이 내려지기 쉽고, 논쟁의 초점이 내용에서 태도로 옮겨 가면서 토론이 차단되기 쉽다. 메시지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메신저의 인성을 심판하는 쪽으로 논의가 기울면서, 정작 본질은 뒷전으로 밀려나는 일이 반복된다.

김형준 배재대 석좌교수는 “소위 ‘싸가지 없는’ 언행은 공동체가 공유해 온 규범이나 관례를 위반하는 행위이고, 이를 ‘싸가지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스스로의 논리나 소통 역량이 부족한 걸 자인하는 행위”라며 “싸가지론이 반복 소환되는 현상 자체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