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3월 17일 오후 2시, 언더우드 2세(원한경) 명예총장 부인을 비롯한 연희대학 교수 부인 20여 명은 언더우드 사택(현 언더우드가 기념관)에서 제3회 유엔총회에 한국 대표단 일원으로 참가해 ‘대한민국 정부 승인’이라는 대업을 완수하고 돌아온 모윤숙을 초청해 강연을 들었다. 한참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복면을 쓴 괴한 2명이 정문과 뒷문으로 들이닥쳐 권총으로 언더우드 부인을 저격하고 도주했다. 오른쪽 가슴에 총상을 입은 언더우드 부인은 백낙준 총장 부인의 차로 세브란스병원으로 후송되던 도중 사망했다.
정치적 목적에서 한국인이 미국인을 살해한 사건은 1908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장인환·전명운 의사가 ‘친일 외교관’ 스티븐스를 처단한 지 41년 만에 처음이었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일본이 한국을 병탄하는 데 앞장섰던 죄과가 있었던 반면, 언더우드 부인은 일생을 한국과 한국 청년을 위해 헌신했을 뿐 그 누구에게도 원한을 살 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는 차이가 있었다.
1890년 서울 정동에서 태어난 원한경은 경신학교와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한 ‘신촌 원씨’ 시조 언더우드 1세(원두우)의 외아들이었다. 1906년 한국을 떠나 뉴욕대학에서 공부했고, 1912년 북장로회 선교사로 고향인 한국으로 돌아왔다. 부친이 설립한 경신학교 교사,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봉직했고, 1934년 연희전문학교 제3대 교장에 취임했다. 1919년 3·1운동 당시 수원 제암리에서 벌어진 기독교인 학살 사건을 세계에 알렸다. 1941년 12월 진주만 공습 직후 외국인 수용소에 수감됐다가 이듬해 5월 미국으로 추방됐다. 해방 이후 미군정청 고문 자격으로 고향인 한국으로 돌아왔고, 1947년 명예총장으로 연희대학에 복귀했다.
원한경의 부인 에델 반 와그너 언더우드는 1888년 미국 미시간주에서 태어났다. 불우한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가사 도우미로 일하면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졸업했다. 1912년 서울외국인학교 단 한 명뿐인 교사로 초빙됐고, 한국 교회에서 만난 원한경과 결혼해 슬하에 4남 1녀를 뒀다. 연희전문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고, ‘절제 소녀관’을 설립해 불우한 소녀들에게 보금자리를 제공했다.
범인은 남로당 학생 조직인 조선민주학생연맹(민주학련) 위원장 김석준을 비롯한 연희대 학생 9명이었다. 연희대 학생들이 한때 연희대 영어 강사로 봉직했고, 설립자의 며느리이자 명예총장의 부인인 ‘미국인 스승’을 백주에 사택까지 찾아가 살해한 패륜을 저지른 것이었다.
민주학련은 겉으로는 ‘민주 학원 건설’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남로당의 지령에 따라 파업 동조, 동맹 휴업, 테러, 삐라 살포 등 학업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정치 투쟁에만 열을 올린 조직이었다. 민주학련 소속 학생들은 언더우드 부인이 살해된 1949년 3월에만 한양공대에 사제 수류탄을 투척했고, 서울대 사범대학 손진태 학장을 자택에서 권총으로 살해하려다 실패했다.
부인의 사망 소식을 접한 원한경은 미국에서 반한 감정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아내를 살해한 것은 공산당이지, 한국인이 아니다”라고 한국인을 변호했다. 이승만 대통령과 이범석 국무총리가 조의를 표하며 ‘교육장(敎育葬)’으로 장례를 치를 것을 제안했지만, 원한경이 고사해 장례는 연희대학 ‘학교장(學校葬)’으로 치러졌다. 언더우드 부인의 시신은 양화진 외국인 묘원 시어머니 묘소 옆에 안장됐다.
경찰은 “범인들이 모윤숙을 살해하려 했지만 총탄이 빗나가는 바람에 언더우드 부인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원한경은 경찰이 한미 관계가 악화되는 것을 우려해 그렇게 발표했을 뿐, 범인들이 처음부터 언더우드 부인을 노렸을 것이라 확신했다. 미군 철수를 석 달 앞두고, 한국에 대한 미국인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남로당이 의도적으로 미국인 선교사 부인을 살해했을 것이라는 합리적 의심이었다. 남로당이 민간인 모윤숙을 표적으로 삼았다면, 굳이 언더우드 사택까지 찾아가 범행을 저지를 이유가 없었다.
범인들은 수사를 받으면서도 잘못을 뉘우치거나 사죄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담당 검사에게 “당신을 우리 손으로 죽이겠소”, “당신 집 주소가 어디요?”라고 협박했다. “어떤 판결을 받을 것으로 예상하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사형이겠죠”라고 빈정거리고는 “그러나 3심까지 끝나려면 3년 6개월 정도 걸릴 것이고, 그때까지는 틀림없이 인민공화국이 수립될 것이니, 결국 죽는 것은 검사 당신이지 우리가 아닐 것이다”라고 호기를 부렸다.
재판 결과 김석준·배경환 등 주범 4명은 사형, 한병희 등 종범 3명은 무기징역, 나머지 2명은 각각 징역 5년과 2년을 선고받았다. 원한경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고인은 한평생 한국 젊은이들을 사랑했으므로 아무리 살인자라고 하더라도 처벌은 하되 사형에 처하는 것은 원치 않는다”고 유족을 대표해 진정서를 보냈다. 이 대통령은 예수의 사랑을 실천한 유족의 고귀한 뜻을 헤아려 형이 확정되면 법과 절차에 따라 감형을 검토해 보겠다고 회답했다.
“형이 확정되기 전 인민공화국이 수립될 것”이라는 살해범들의 확신처럼 2심이 진행되는 동안 6·25전쟁이 발발했고,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6월 28일 이후 살해범 9명은 모두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났다. 서울 수복 이후 명륜동에서 체포된 무기수 한병희를 제외한 8명은 모두 월북했다. 사형수 배경환은 6·25전쟁 휴전 이후 간첩으로 남파됐다가 군경에 체포돼 1963년 14년 만에 사형이 집행됐다.
원한경은 “대학 졸업식에 엄마와 함께 참석하겠다”는 고명딸 그레이스(원은혜)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1950년 1월 미국으로 일시 귀국했다. 한국을 떠나며 기자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이곳 한국에서 태어났고, 나의 어머니와 아내는 이 땅에 묻혔다. 두 아들이 현재 이곳에서 일하고 있다. 연희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간 아들 같은 청년 2000여 명, 그리고 수많은 친구들이 있는 이곳 한국으로 나는 곧 돌아올 것이다.”
6·25전쟁이 발발했음에도 원한경은 약속대로 1950년 10월 ‘미군 정보부대(G-2)’ 민간인 고문 자격으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큰아들 원일한과 막내아들 원득한도 미군 장교로 참전했다. 이듬해 2월, 원한경은 부산에서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전시(戰時)였지만 장례는 사회장으로 엄수됐고, 서울 수복 이후 그의 시신은 양화진에 있는 아내와 어머니 묘소 곁에 안치됐다.
<참고 문헌>
서정민, 언더우드家 이야기, 살림, 2005
오제도, ‘원 박사 부인의 죽음’, 추적자의 증언, 한국안보교육협회, 1981
이병도 외, ‘원 부인 피살 사건’, 해방20년사, 희망출판사, 1965
한지은, ‘언더우드 家의 여성 선교사들’, 한국학논집, 제60집, 2015
홍이표, ‘언더우드 부인 저격사건의 진상과 의미’,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35호,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