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가’라는 도시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나보코프 소설 첫 장이 떠올랐다. <롤-리-타. 혀끝이 입천장을 따라 세 걸음 걷다가 세 걸음째 앞니를 가볍게 건드린다. 롤. 리. 타.> 감히 나보코프를 따라 해본다. <말-라-가. 혀가 입천장을 한 번 친 후 두 걸음을 더 걷다 입술에 못 미쳐 탄성처럼 주저앉는다. 말. 라. 가.>
바늘구멍 찬바람에도 무릎이 시린 나이, 겨울 여행지로 스페인 말라가가 떠올랐다. 그곳에서 시작, 시에라 네바다의 찬 기운과 론다의 아찔한 협곡에서 정신을 다잡고, 다시 포르투갈 나자레로 달리는 코스의 여행.
말라가: 햇볕과 피카소가 특산품인 도시
말라가(Malaga)는 세비야·그라나다와 더불어 안달루시아 3대 교통 요지다. 아프리카에서도 지척이라 8세기부터 15세기 후반까지 아프리카 무슬림의 지배를 받았다. 유럽 대부분의 도시가 그렇듯, 11월 마지막 주부터 광장 주변은 크리스마스 조명으로 훤하다. 동네 사람, 외지인 할 것 없이 들뜬 밤으로 몰려나왔다. 경량 패딩 하나 입고 찬란한 밤길을 목적지 없이 걸었다. 하지만 다음 날 깨달았다. 어떤 조명도 말라가의 태양을 따라올 수 없다는 것을. 겨울 태양은 밝고 성숙했다. 강렬하지만 찌르지 않는다. 마술적 리얼리즘의 작가 마르케스는 말라가 태양을 이렇게 찬미했다. “여기 말라가에서 빛을 발명한 것 같다.”
말라가 최고의 문화 상품은 피카소다. 아버지가 투우 화가이자 미술 교사였던 가정에서 자란 피카소는 말라가에서 태어나 10세 때 다른 지방으로 이주했다. 성인 피카소는 프랑스와 서로 사랑에 빠졌다. 파리 피카소미술관은 ‘도라 마르의 초상’ 등 피카소의 대표작과 거의 모든 시기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뉴욕 현대 미술관(MOMA)에서 ‘아비뇽의 여인들’,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에서 ‘게르니카’를 본 이들은 말한다. “정작 피카소 고향에는 볼 만한 작품이 없다.”
그러나 큐비즘 대신 피카소의 초기작, 구상 작품을 좋아하는 기자에게는 말라가 피카소 미술관도 좋은 선택이었다. 1923년 작 ‘당나귀를 탄 폴(Paul On Donkey)’은 파리에 정착한 피카소가 아들 폴을 그린 초상화. 신고전주의적으로 아이를 격조 있게 묘사하면서도 그 선이 예민하고 곱다. 충격적으로 현대적인 흑백의 ‘삼미신(The Three Graces)’ 역시 넋을 잃고 몇 번이나 봤다. 피카소 생가 박물관은 미술관에서 10분 정도 거리. “크기도 작고 볼 것 없다”고들 하는데, 이곳은 더 정답고 좋았다. 오직 잉크로만 그린 여러 점의 투우 스케치는 아버지도 좌절시킨 꼬마 피카소의 재능을 그대로 보여준다. 피카소를 싫어하는 건 가능하지만, 그의 천재성을 부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걸 또 깨달았다.
그라나다(Granada): 알함브라를 봤다면 플라멩코까지
스페인에서 관광객 최다 포인트는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성가족성당, 바르셀로나)가 늘 1위, 그다음이 그라나다의 알함브라(Alhambra·붉은 성)이다. 만년설을 자랑하는 시에라 네바다 산맥을 요새 삼아 이슬람은 이베리아 반도를 점유했었다. 1238년 건설을 시작한 알함브라는 요새와 여러개의 궁전이 들어선 복합 단지. 이슬람 건축의 기본인 완벽한 대칭으로 유명하기에 ‘그리드(grid)’ 마니아라면 반드시 가봐야 하는 곳이다. 14만m², 4만 평이 넘는 공간에 알카사바 요새, 그 유명한 코마레스궁, 사자궁 등 나스르 궁전, 카를로스 5세 궁전, 여름 별궁 헤네랄리페 등이 들어앉아 어느 정도 둘러보려면 네댓 시간은 머물러야 한다.
알함브라는 대개 두 번 본다. 오전에 한 번 관람하고, 해 질 무렵 알바이신 지구의 ‘미라도르 데 산 니콜라스 전망대’에서 보는 뷰가 또 대단하다. 멀리 시에라 네바다 산맥과 낙조로 물들어 붉은 황금빛으로 빛나는 석양의 알함브라를 보는 것이다. 그라나다 여행의 정석이다.
그라나다에서는 밤에 호텔 방에 있어선 곤란하다. 평소 관심이 있건 없건 플라멩코를 한번 봐야 한다. 스페인 플라멩코 본거지는 세비야와 그라나다를 꼽는다. 세비야가 오페라 스타일의 기교 높은 플라멩코를 발전시켜 왔다면, 그라나다는 격정과 즉흥성을 강조한다. 그라나다의 사크로몬테 지구는 언덕배기에 자리 잡은 집시 마을. 집시들이 토굴에서 발전시켜온 플라멩코는 특별히 ‘잠브라(Zambra) 플라멩코’라 불린다. 밸리 댄스처럼 관능적이고,격정적 발구르기로 심장을 때린다.
그라나다에서는 동굴형 공연장에서 소규모로 공연을 보는 게 좋다. 공연장이 작은 경우 남녀 무용수, 가수 한 명, 기타리스트 1명으로 구성된 4인조 팀이 한 시간가량 춤을 추고 노래한다. 발을 어찌나 굴러대는지 혈관 속 콜레스테롤이 씻겨 나가는 느낌이었다.
격정적인 춤 앞에서 내내 무용수를 걱정했다. “저렇게 발을 구르면 무릎이 나갈 텐데….” 세비야의 플라멩코는 훨씬 더 세련되고 규모도 컸지만, 기회가 된다면 그라나다에서 한 번 더 보고 싶다. 무작정한 성실, 그걸 감당할 체력, 동료간의 호흡…. 한의 춤이 아니라, 희망의 춤을 봤다.
론다(Ronda): 세월이 만든 거대 협곡, 그 위에 투우장이 있다
1912년 12월 레이나 빅토리아 호텔 208호에 투숙, 2개월여를 머문 시인 릴케는 호텔에 이런 글을 남겼다. “나는 어디에서건 꿈의 도시를 찾아 헤맸다. 마침내 론다에서 찾았다.”
그로부터 10년 여 지난 1923년, 투우에 빠진 청년이 론다를 찾는다. 훗날 투우의 미학을 다룬 책 ‘오후의 죽음’을 쓴다. 청년은 종군 기자가 되어 15년 후 그곳을 다시 찾았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에 론다와 스페인, 투우에 대한 사랑을 녹여냈다. 헤밍웨이다. 론다를 이렇게 표현했다. “스페인으로 신혼여행을 가거나, 누군가와 도망치려 한다면 론다로 가라… 실패한다면, 차라리 파리로 가서 새 친구를 사귀어라.”
론다는 해발 750m, 거대한 협곡 위에 들어앉은 도시다. 아찔한 협곡은 날고 싶은 욕망과 떨어지고 싶은 생각, 살고 싶은 욕망과 죽어도 괜찮겠다는 호기심을 동시에 자극한다. 이 대칭적 욕망 때문에 많은 작가가 짝사랑해왔다.
여러 협곡으로 이뤄진 론다를 세 다리가 잇는다. 그중 ‘엘 타호(El Tajo)’ 협곡 위의 ‘누에보 다리(Puente Nuevo)’가 가장 크고 압도적이다. 1759년 착공, 석회암을 수직 100m 쌓아올려 1793년 완성했다. 스페인 내전(1936~1939) 때 공화정파가 파시스트를 누에보 다리에서 밀어 사형을 대신했다. 헤밍웨이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이 에피소드를 안달루시아 가상의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로 묘사했다. 아치형 교각 중간에는 널찍한 공간이 있다. 다리 완성 후 처음엔 경비실로 쓰이다 정치 상황에 따라 임시 호텔, 고문실, 감옥 등 쓰임새가 여러 번 바뀌었다. 지금은 지질 전시관으로 쓰고 있다. 누에보 다리를 오가며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탐험하고, 교각 아래로 걸어 내려가고, ‘헤밍웨이 산책길’을 걷는 것이 론다 여행의 거의 모든 것이다.
유럽인들은 스페인 투우의 본거지, 론다의 투우 경기장에 꼭 들른다. 오디오 가이드를 따라 차근차근 투우 역사를 듣다 보면, 몰랐던 투우의 매력을 알게 된다. 변형된 전쟁, 엄격한 형식미, 신분 상승과 맞바꾼 강렬한 긴장…. “투우는 예술가가 죽음의 위험에 처하는 유일한 예술”이라는 헤밍웨이 분석이 절로 이해가 된다.
나자레(Nazare): 수면 아래 5㎞ 협곡이 만드는 압도적 파도
7년 전, 이탈리아인 단체 관광에 끼어 포르투갈 관광을 간 적이 있다. 나자레 해변가에 도착했을 때 포르투갈인 가이드가 높은 언덕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반대편 해안이 서핑으로 엄청 유명한 곳이에요. 걷기는 힘들고, 푸니쿨라 타면 됩니다.” 한 여성이 물었다. “서핑? 거기 볼 거 많아요?” 그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레스토랑은 여기가 더 좋아요.” 상당수가 밥을 택했고, 기자도 그 무리에 있었다. 돌아와서 TV를 보다가 알았다. 그곳이 세계 최고 서퍼 가렛 맥나마라가 30m 파도를 탄 나자레 노스 비치(Praia do Norte)였다는 걸.
사람의 코는 간사하다. 그라나다, 론다의 공기로 호사하고 나니 대도시 세비야의 공기가 코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서쪽으로 달려, 요즘 남유럽의 파리 대접을 받는 리스본, 빈티지의 도시 포르투에 닿아도 공기가 달지 않았다. 순수한 대서양 냄새를 맡으러 나자레로 차를 몰았다. 마침 12월, ‘빅 웨이브’가 몰려오는 나자레 바다에는 세계 최고의 서퍼들과 그들의 도전을 담으려는 방송 중계차들이 몰려든다. 수영 못하는 추운 계절, 나자레는 그때가 성수기다.
나자레는 잔잔한 해수욕장이 있는 아랫마을과 대서양을 내려다보는 윗마을로 나뉜다. 윗마을은 ‘바다 180도 뷰’가 나온다. 유서 깊은 나자레 성모 마리아 성당의 아줄레주(Azulejo)는 실내 장식으로 쓰여 색이 바래지 않고 생생하게 파랗다. 포르투 상벤투 기차역, 알마스 성당의 바랜 타일과 비교할 수 없이 곱다. 윗마을 정상에서 15분쯤 걸어 내려가니...
물 천지다. 들숨에 수평선이 들어오고, 날숨에 파도가 되어 빠져나간다. 서서 보고 앉아서 보고, 입 벌리고 보다가 입 다물고 보다가, 끝도 없이 물만 봤다. 몇 시간이라도 앉아 있겠다.
나자레 파도가 세계 최고인 이유는 물 아래에 깊이 5㎞의 해저 협곡이 있기 때문이다. 해저 협곡을 지나는 물이 해안가에 다다르면 물의 에너지가 수직 방향으로 솟는 파도 증폭 현상이 일어난다고 한다. ‘높은 파도의 원인은 깊은 협곡 때문이다’. 문과생은 이렇게 압축적으로 이해했다. 그저 바람만 파도를 일으키는 건 아닌 것이다.
영상의 날씨라지만, 차가운 겨울 바다에서 서핑을 하는 이가 수십 명이었다. 세상에 이해 못 할 스포츠가 여럿이지만, 서핑도 기자에게 그랬었다. 하염없이 그들을 바라보다 서퍼들의 발 밑을 생각해본다.
나자레 바다는 뱃 속에 론다 협곡 수백 개를 품었다. 거대한 파도는 깊은 속내의 표시다. 서퍼들이 다르게 보였다. 깊은 협곡 위에 파도로 만든 다리, 서퍼들은 그 ‘파도의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