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유현호

1907년, 브라질 의사 샤가스는 철도 건설 노동자들에게서 유행하던 말라리아를 해결하기 위해 미나스제라이스주로 간다. 살충제를 이용한 모기 박멸로 문제를 해결한 뒤 원래 있던 연구소로 돌아가려는데, 마을 주민이 그를 붙잡았다. “우리 마을엔 이상한 저주가 있어요. 평소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죽어요. 제발 좀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황당하기 그지없는 이야기. 보통 사람 같으면 나중에 다시 오겠다며 가버릴 테지만, 샤가스는 이 저주를 풀어보겠다고 마을에 머물며 연구를 시작한다.

의심 가는 것은 모조리 조사하던 샤가스는 어느 날 동물 몸에 붙어 피를 빨던 빈대를 발견한다. 빈대를 해부해 현미경으로 관찰한 결과 편모가 달린 작은 기생충이 헤엄치는 게 보였다. 해당 편모충을 원숭이에게 주사한 결과 원숭이는 곧 앓아누웠고, 혈액 속에서는 편모충이 수도 없이 발견됐다. ‘혹시 사람에서도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을까?’ 당시 미나스제라이스주 마을은 초가집이 주를 이뤘고, 빈대에 물리는 사람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샤가스는 마을 주민들의 혈액을 조사했는데, 그중 딱 한 명, 열이 나고 한쪽 눈이 부어 있는 베르니체라는 두 살짜리 여자아이에게서만 편모충을 발견할 수 있었다.

위대한 연구자는 작은 단서도 놓치지 않는 법. 샤가스는 마을에 떠돌던 괴소문, 그러니까 30~50세쯤 되는 사람들이 갑자기 죽는 게 이 편모충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샤가스는 갑자기 죽는 사람이 나올 때마다 부검을 시행했는데, 그들 대부분이 심장이 커지는 등의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 놀랍게도, 샤가스는 그들의 심장 근육에서 베르니체의 혈액에 있던 그 편모충이 도사리고 있는 걸 찾아낸다.

여기서 의문점 하나. 베르니체를 제외하곤 다른 사람들의 혈액에 이 편모충이 없던 이유는 무엇일까? 샤가스는 오랜 기간의 연구 끝에 그 해답을 찾아낸다. 첫째, 훗날 크루스파동편모충으로 명명된 이 기생충은 빈대를 통해 사람에게 감염된다. 둘째, 인체 감염 후 편모충은 1~2주 정도 혈액에 머무르는데, 이때 열이 나고 눈 한쪽이 붓는 등의 증상이 생긴다. 셋째, 그 뒤 편모충은 조직으로 숨어버리고, 증상은 없어진다. 마을 사람 대부분에게서 편모충이 발견되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다. 넷째, 열이 떨어지면 이제 나았다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인 반응. 하지만 환자의 30%에선 편모충이 서서히 심장과 소화관 등을 망가뜨리고, 그 결과 심부전 등의 증상으로 환자가 급사할 수 있다. 이 과정이 10~20년에 걸쳐 일어나기 때문에 ‘멀쩡하던 이가 갑자기 죽는다’는 괴소문이 퍼지게 된 것이다. 감염 초기에 별 증상이 없다가 10년쯤 지난 뒤 본격적인 증상이 생겨 사망에 이르기 때문에 이를 ‘신종 에이즈’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샤가스병이 에이즈보다 더 심각한 이유는 병의 초창기, 그러니까 열이 날 때 약을 써야지, 만성기에 접어들면 대책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샤가스가 이 병의 원인과 발병 기전, 그리고 진단법까지 혼자 발견하는 동안 다른 나라에선 이 병에 무관심했다. 치료약도 1970년대에야 나왔고, 그나마도 다른 감염병 치료에 쓰려고 개발된 것인데 ‘샤가스병에도 효과가 있으니 써본다’ 정도였다. 왜 그랬을까? 샤가스병은 전 세계적으로 800만명의 감염자가 있지만, 그게 다 브라질을 비롯한 중·남미에만 몰려 있었다. 치료약제 개발은 잘사는 나라에서 감염자가 있을 때 착수하는 게 자본의 논리였으니, 샤가스병이 푸대접을 받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무관심의 대가는 가혹했다. 다음 뉴스를 보자. “2025년 9월 뉴욕포스트 등에 따르면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샤가스병이 최소 32개 주에서 발견됐다고 발표했으며, 일부 과학자들은 이를 미국 내 토착 질환으로 공식 인정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현재까지 미국 내 감염자는 약 30만명으로 추산되며, 최소 8명이 국내 전파로 감염된 것으로 보고됐다.”

지금은 글로벌 시대. 국가 간 이동이 활발히 일어나고, 이를 통해 한 지역의 감염병이 다른 지역으로 퍼지는 게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얘기다. 예컨대 마두로 치하의 베네수엘라에서 800만명이 조국을 등졌다는데, 베네수엘라 역시 샤가스병의 유행지다. 만약 이들이 이주한 곳에 샤가스병의 매개체인 특정 종의 빈대가 있다면 평생 중남미에 간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감염이 이루어질 수 있다! 위 기사에서 ‘최소 8명이 미국 내 전파로 감염됐다’는 대목은 이미 이 병이 미국에서 토착화됐다는 뜻이다. 또한 보유 숙주인 설치류 등의 분변에 오염된 음식물을 먹고 감염되는 경우도 있으니, 샤가스병은 점점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의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 게다가 샤가스병은 선천성 감염도 가능해, 볼리비아에 살던 이가 일본에서 낳은 아이가 샤가스병으로 인해 장이 망가진 사례도 보고된 바 있다.

지난 7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유엔 산하 기구 31개, 비(非)유엔 국제기구 35개 등 총 66개 국제기구에서 탈퇴한다는 각서에 서명했다. 명분은 “납세자의 돈을 절약하고, 이를 ‘미국 우선주의’ 과제에 집중시키는 것”. 그러니까 국제기구 탈퇴로 절감한 예산을 국방, 인프라 건설, 불법 이민자 유입 차단 등에 쓰겠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조치에 많은 미국인이 환호할 듯하다. 자신의 세금이 당장의 삶과 무관한 일에 쓰이는 걸 좋아할 리는 없을 테니 말이다. 물론 그 기구들이 다 유용한 일을 하는 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트럼프가 탈퇴한 기구 중에는 세계보건기구(WHO)도 있다. WHO는 에이즈·말라리아 같은 질병은 물론, 샤가스병 박멸을 위해서도 노력하는 곳이다. 그런데 트럼프로 인해 WHO의 예산이 줄어든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가난한 나라들에서만 유행하던 병들이 전 세계로, 어쩌면 우리나라에도 퍼지지 않을까? 참고로 미국은 2022~2023년 WHO에 총 12억8000만달러를 냈는데 이는 WHO 예산의 12~15%를 차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