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사법부는 법률상 쟁송을 심판하는 업무 외에 등기, 가족관계등록, 공탁, 집행관 및 법무사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거나 감독합니다. 재판 업무만을 주로 담당하는 일본 등 외국에 비하면 관장 범위가 훨씬 넓습니다. 그래서 대법원은 법원행정처를 설치해 재판 지원을 위한 사무는 물론 그 밖의 위에서 본 사무를 처리토록 합니다. 저는 법원 재직 중 상당 기간 법원행정처에서 근무하면서 그러한 업무를 담당했습니다. 목적은 오직 하나, 법관들이 좋은 재판을 하도록 지원하고 국민에게 편리한 제도를 만드는 일입니다. 저의 공직 생활 중 보람이 있었던 대목입니다. 제가 관여했던 몇 가지 제도 개선 사례를 소개합니다.
예전에 우리 민사 재판의 경우, 법정은 소장에 이은 답변서나 준비서면의 교환 장소로 활용될 뿐 당사자는 속 시원하게 자기의 주장을 펼칠 구두변론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법원으로서도 하루에 수십 건의 사건을 처리하다 보니 당사자에게 충분한 구두변론의 기회를 줄 형편이 못됐습니다. 당사자로서 법정에서 자기의 억울한 사정 등을 소상히 밝혀야지 생각하고 발언 연습까지 하고 법정에 출석했을 것이나 판사로부터 돌아온 것은 대부분 ‘서면으로 작성해서 제출하십시오’라는 말이었습니다. 법원도 사건 내용을 완전하게 파악하지 아니한 채 재판을 진행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구두변론이 아닌 서면심리 중심의 재판으로, 사건 처리는 부당하게 지연됐습니다. 법관 재임 초기 이러한 불합리를 느끼고 있을 때 독일 유학을 갔다가, 독일에서도 같은 문제가 있으며 이를 시정하기 위한 제도 개선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물방울 떨어지는(tropfenweise) 식의 찔끔찔끔 진행되는 재판 절차를 개선하고자, 사전에 법정 외에서 쟁점과 증거자료를 정리한 뒤 이어서 열리는 한 번의 기일에 구두변론과 증거조사를 해 결론을 내는 방식입니다. 귀국해 이를 소개하고 실제로 우리 재판에 도입했습니다. 이른바 집중심리제도입니다. 이는 형사재판의 공판중심주의 확대로 이어졌습니다. 공판준비기일을 거쳐 수사기관에서 작성된 조서가 아니라 공개된 법정에서 행해진 진술이나 증언 등에 근거해 재판이 행해짐으로써 피고인의 방어권이 충분히 보장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단독주택을 매매하는 경우 대지와 건물에 각각 소유권이전등기를 하는데, 크게 불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아파트 등 집합건물의 경우는 사정이 달라집니다. 한 동(棟)의 일부분(예컨대 가동 101호와 같은 구분건물)이 독립된 건물로서 거래되므로 이를 건물 일부가 아니라 한 개의 독립된 부동산으로 취급할 필요가 생깁니다. 그리고 그 대지는 수많은 구분건물 소유자들의 공유가 되므로 대지인 토지에 공유 지분 등기를 해야 합니다. 즉 대지인 토지가 수십, 수백 명의 공유로 등기가 되고, 대단지 아파트로서 대지가 여러 필지인 경우 필지마다 공유 지분 등기를 해야 하므로 등기가 한없이 복잡해집니다. 이런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각 구분건물 등기부에 그 구분건물과 법률상 운명을 같이하는 토지들의 권리 내용을 함께 기재해 건물 등기만으로 토지 등기도 행해진 것으로 간주하는 등기 제도를 마련했습니다. 이런 제도가 만들어지지 않았으면 국민의 불편과 등기소의 업무 부담은 크게 늘었을 것입니다.
또한, 등기부를 전산화함으로써 등기부를 집안에서도 열람할 수 있게 됐습니다. 예전에 등기소를 찾아가 한두 시간씩 기다려야 했던 사정에 비추면 꿈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전산화는 기술적으로는 물론 예산상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막대한 예산이 소요돼 예산 당국에서는 일반회계로 선뜻 지원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법원에서는 일정 기간 등기 전산화에 필요한 예산은 등기신청 수수료를 징수해 이를 전산화 비용으로 충당하는 특별회계제도를 제안했습니다. 국민 부담이 증가한다는 이유로 행정부 측의 반대도 있었지만, 전산화에 따른 국민 편의의 이점이 훨씬 큼을 내세워 예산 당국을 설득해 전산화를 완성했습니다.
최근 국회에서 법원행정처를 폐지하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대법원장의 법관 인사권을 제약하겠다는 취지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나 이는 부당할 뿐 아니라, 인사 관련 업무는 법원행정처 업무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법원행정처는 결코 그 존폐를 가볍게 논할 수 있는 그러한 기관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