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만9000원. 지난해 12월 31일 기준 한국금거래소에서 고시한 순금 1돈(3.75g)을 살 때 가격이다. 그야말로 금(金)값이 금값이다. 1돈짜리 돌반지를 선물하려면 100만원을 각오해야 하는 시대다. 1995년엔 순금 1돈의 도매가가 약 3만8000원이었다. 30년 만에 20배 이상 폭등한 것이다. 이쯤 되면 누구나 생각한다. 옷장 구석에 꼭꼭 숨겨둔 금붙이 좀 팔아볼까. 아니면 지금이라도 금 투자에 나서야 하나.
에어컨·핸드폰·골프채를 뒤져보자
부산에 사는 김민중(46·가명)씨는 요즘 ‘금값 고공행진’ 뉴스가 나오면 슬그머니 가족들과의 자리를 피한다. 어머니가 평생 갖고 있던 금을 팔아치운 게 5년 전쯤이다. 금 1돈이 20만원을 돌파했다는 뉴스를 보고 60냥을 팔았다. “최고점이다. 얼마나 더 가겠느냐”고 우긴 게 그였다. 이후 금 1돈이 30만원을 넘어서자 남겨뒀던 5냥도 모두 팔았다. 김씨는 “지금까지 갖고 있었다면 그게 얼마어치인지 생각만 해도 부아가 치민다”고 했다.
요즘 자주 회자되는 사례는 김씨와 정반대 경우다. 할머니 유품을 내다 팔아 목돈을 벌었다거나, IMF 금 모으기 운동 때도 애써 아껴뒀던 자녀 돌반지를 팔아 제법 쓸 만한 돈을 손에 쥐었다는 사연 등이다.
특히 화제가 된 건 뜻밖의 횡재. 한정판으로 출시됐던 LG 휘센(WHISEN) 에어컨의 로고가 순금이었다는 것이다. 종로에서 금은방을 운영하는 유튜버 ‘링링언니(본명 윤기선)’는 지난달 11일 ‘에어컨에도 금이 있어요?’라는 제목의 영상을 올렸다. LG 휘센 에어컨에서 떼어낸 구겨진 금 조각을 들고 그를 찾아간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윤 대표가 조각을 녹여 분석했더니 순금으로 확인됐다. 1돈에 조금 못 미치는 무게로, 당시 시가로 71만3000원 상당이었다. 이 영상이 조회 수 100만회를 넘기면서 화제가 되자 또 다른 고객도 휘센 로고가 온전한 금 조각을 떼어 왔다. LG전자는 2005년 5년 연속 에어컨 세계 판매 1위를 기념해 선착순 1만명 고객에게 순금 휘센 로고가 부착된 제품을 팔았다. 2008년에는 예술 작가의 서명을 새긴 순금 명판(1돈)이 적용된 휘센 에어컨 제품을 1만대 한정 판매했다. 윤 대표는 “요즘 에어컨 로고를 일단 떼어 오는 사람이 꽤 있다”고 했다. 구형 팬택 스카이 휴대폰에서 떼어낸 금 조각을 가져온 사람도 나왔다. 팬택은 2009년 프랑스 브랜드 S.T.듀퐁과 함께 로고 장식을 18K 금으로 제작한 휴대폰 3만대를 한정 출시했다.
인천의 한 금은방에는 “200만원 주고 산 중고 골프채에 붙은 금 조각을 떼어왔다”는 고객이 있었는데, 고금 가격만 260만원이 나왔다고 한다. 수명을 다한 금니도 당연히 돈이 된다. 치아 치료 후 이에 씌우는 ‘크라운’에는 45~75%, ‘인레이’에는 85%의 금이 들어 있다. 요즘 치과에서는 치솟은 금값 탓에 아예 금니를 권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한국금거래소 관계자는 “금값이 요동치면서 금을 매매하겠다는 문의가 많다”며 “종로 본점은 전화도 받지 못할 정도”라고 했다. 금을 팔려는 사람들이 몰리면서 ‘금은방 오픈런’이 벌어지기도 한다. 금값을 더 쳐주는 것으로 알려진 종로 A금은방에는 오전 8시쯤부터 줄이 생기기 시작해 오전 11시 오픈 때에는 대기자만 40명 정도 됐다.
아직 늦지 않았다?
금값이 올랐지만 “투자하기에 늦지 않았다”는 사람들의 행렬이 만만치 않다. 금값이 더 오를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등 5대 은행에서 지난해 12월 24일까지 판매된 골드바는 6779억7400만원어치로 집계됐다. 전년 연간 판매액(1654억4200만원)의 4배 수준으로 역대 최대치다.
금융권 맞벌이인 이혜영(45)씨는 7~8년 전부터 기념일마다 순금을 모은다. 이씨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가방이니 옷이니 물욕은 없어졌다”며 “대신 남편에게 때마다 형편대로 주물금이나 콩알금을 사달라고 했는데 그렇게 모은 금구슬 수십 알이 아주 든든하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도 시세 조정이 있을 때마다 계속 금을 살 예정이라고 했다.
하트·클로버·곰돌이 등 모양의 콩알금을 적금 붓듯 모으는 것도 유행이다. 0.1g부터 0.3g, 0.5g, 1g 등 굳이 1돈이 아니어도 좋다. 주머니 사정에 따라 단돈 몇 만원짜리 순금을 사서 모으는 것이다. 일부 금은방에서 온라인 공구 형식으로 진행한다. “야식 한 번 참고 금 모으자” “시작은 쌀알이지만 골드바를 만들자” “미래를 위한 적금”이라고 의지를 다지며 각자 속도대로 현물 투자를 하는 식이다.
요즘 투자자들은 ‘김치 프리미엄’까지 따져보는 거래를 하는 게 필수가 됐다. 김치 프리미엄은 국내 금값이 국제 시세보다 높게 형성되는 현상을 일컫는다. 직장인 박선주씨는 지난해 내내 지켜보다 10월에 금을 샀다. 국내 금값이 최고치를 향해 치달으며 국제 금값보다 20% 가까이 비싼 ‘김치 프리미엄’의 절정 시기였다. 그는 “그때 ‘포모(FOMO·뒤처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가 와서 금을 패닉 바잉했는데 이후 국내 금값이 조정받으면서 손해를 본 셈”이라며 “공부를 해보니 금은 ‘김치 프리미엄’이 특히 심한 투자 종목이었다”고 했다. 이후로는 ‘김치 프리미엄’을 실시간으로 알려주는 사이트를 반드시 참고해 거래한다.
실물 금을 사고파는 게 부담스러운 사람들을 위한 ETF(상장지수펀드) 상품도 잘 팔린다. 금값이 오르면 얼마간의 시차를 두고 은(銀)값도 상승하는데, 은수저, 실버바, 은 ETF도 모두 인기다. 국제 은 가격은 45년 만에 최고치를 연일 갈아치우며 지난해 160% 이상 뛰었다.
금은보화를 지키려면 금고(金庫)도 필요할 것이다. 금값이 오르며 금고 판매도 늘어났다고 한다. 소형·가정용 금고를 찾는 고객이 많다. 업계 관계자는 “금고 판매량이 20~30% 늘었다”며 “30~40대 젊은 고객층이 늘어난 것이 특징”이라고 말했다.
“금 ‘줍줍’ 하러 가자”
도깨비 방망이의 ‘금 나와라 뚝딱’ 정도는 아니더라도, 약간의 수고로 금을 주울 수 있다면? 귀가 솔깃한 얘기다. 실제 ‘사금 채취’로 금을 줍는 이들도 있다. 사금(砂金)은 말 그대로 물가나 모래·자갈 속에 섞인 금. 냇가 바닥의 모래를 퍼내 잘 걸러내면 작은 금 조각을 주울 수도 있다. 매우 드물게 덩어리 금을 줍는 경우도 있다. 모래를 담아 빙글빙글 돌리며 사금을 분리하는 ‘패닝 접시’와 모래를 퍼내는 호미 같은 장비만 있으면 누구든 할 수 있다. 패닝 접시는 인터넷 쇼핑몰에서 1만~2만원 선에 판다.
최근에는 동호회도 늘고 하루 채취한 사금량을 소개하는 유튜브 채널도 인기를 끌고 있다. ‘강원 정선, 충북 영동의 어느 계곡이 사금이 많다더라’ 같은 정보도 공유된다. 과거 신문을 찾아보고 금광이 있었던 지역의 계곡을 찾아가는 등 나름의 노하우도 있다. 캠핑족인 이석우(45)씨는 “캠핑을 갔다가 사금 채취를 하는 사람들을 보고 패닝 접시를 사봤다”며 “말처럼 쉬운 건 아니었지만 캠핑 다니면서 한 번씩 해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사금 채취는 불법이 아니지만 하천을 훼손할 경우 처벌받을 수 있다.
폐전자제품에서 금속물질을 회수하는 ‘도시 광산업’도 주목받고 있다. 휴대전화나 컴퓨터에는 미량의 금이 부품으로 들어가는데, 폐가전에서 이를 수거해 내는 것이다. 폐휴대전화 1t에서 280~400g의 금이 추출된다고 한다. 실제 광석 1t에서 금 5g이 나오는 것과 비교하면 수익성이 좋다고 할 수 있다. 업계 관계자는 “요즘은 소량이라도 금이 들어간 폐기물은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2026년에도 골드 러시가 이어질까. 금값 상승에 따른 ‘차액 실현’ 매물이 쏟아지면서 지난해 말 금값 상승세에 제동이 걸렸지만, JP모건은 국제 금값이 올해 4분기 트로이온스(약 31.1g)당 5055달러까지 갈 수 있다고 예상했다. 작년 말 기준 미 뉴욕상품거래소 금 선물 가격은 4300달러대였다. 뱅크오브아메리카도 올해 금값 상단 전망치를 5000달러로 상향 조정했다. 잊혀진 금은보화도, 숨어 있는 금 조각도, 투자 포트폴리오도 새해를 맞아 다시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