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통과 유사하지만 증상은 한숨이요, 두통과 비슷하나 약발이 들지 않는 질환. 전국으로 확산하고 있다.
인기 K팝 아이돌 엔하이픈 멤버 정원(21)이 며칠 전 소셜미디어에 “갑자기 라면이 먹고 싶었는데 끓이기 귀찮아 배달 앱을 찾아보니 끓여서 배달해주는 곳이 있더라”며 라면 인증샷 한 장을 올렸다. 수천 명의 외국 팬은 “건강 잘 챙기라” 같은 댓글을 남기며 평범한 반응을 보였지만, 한국인에게서는 의외의 통탄이 속출했다. “물 올리기 귀찮아서 라면 배달을 시킨다고? 명품 옷보다 더 서민통(痛) 느끼게 하네.”
◇서민통, 해학인가 엄살인가
서민의 고통, 상대적 박탈감을 자조하는 신조어. 신세계가(家) 출신 아이돌 가수 애니(문서윤·23)가 지난달 집에 놓인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 사진을 공개했을 때에도, 먹방 유튜버 떵개(이민주·32)가 품귀 현상으로 구하기조차 힘들어진 간식 두바이쫀득쿠키를 세 개씩 겹쳐 먹을 때에도 공통된 감탄사가 잇따랐다. “저 귀한 걸, 서민통 도진다.” 선망의 대상을 경탄하는 대신 경제 격차로 인한 정신적 고통을 너스레 떨듯 표출하는 세태. 금수저·흙수저 등 2030세대에서 확산됐던 ‘수저론’을 잇는 새 유행어로 부상하고 있다. ‘거지통’이라는 파생어도 등장했다. “돈 없어서 일반버스 다 보내고 마을버스 탔음. 거지통 레전드네….”
서민통은 의식주 전반에서 발현되지만, 주택 이슈에서 가장 도드라진다. 너무 아득하기에. 최근 가수 장원영(21)이 서울 한남동의 고급 빌라를 137억원 전액 현금으로 구매했다거나, 배우 송강(31)이 서울 성동구 아파트를 신고가 67억원에 매입했다는 소식에도 여지없이 “서민통 세게 온다”는 반응이 트위터 등지에서 터져 나왔다. 1인 가구 연예인의 일상을 전시하는 TV 예능 ‘나 혼자 산다’에 대한 평가도 싸늘해졌다. 직장인 한모(39)씨는 “수십억 원 넘는 한강 뷰 아파트에서 호의호식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자가 마련은 꿈도 못 꾸는 청년들이 어떻게 즐거울 수 있겠느냐”면서 “친근해 보여도 실은 가장 멀리 있는 존재라는 걸 새삼 깨닫고 ‘현타’가 온 것”이라고 말했다.
◇빈부 격차, 역대 최대
쪼개고 아껴도 간극은 더 벌어졌기 때문이다. 통계로도 확인된다. 지난달 국가데이터처가 발표한 ‘2025년 가계금융복지조사’에 따르면 가구별 순자산의 불평등 정도를 나타내는 ‘순자산 지니 계수’가 0.625로 조사돼 관련 통계가 처음 작성된 2012년 이래 최고치를 기록했다. 순자산은 자산 총액에서 부채를 뺀 실질 재산으로, 지니 계수가 1에 가까울수록 계층 간 재산 불평등이 크다는 의미. 집값이 큰 몫을 했다. 상위 20%의 부동산 평균 자산(13억3828만원)은 하위 20%(1033만원)의 129.6배였다. 지난해 128.7배보다 커졌다. 국가 견인의 차세대 주축인 30대 이하의 순자산은 전 연령에서 유일하게 감소(0.9%)했다. 월세 부담 및 주택 담보 대출 등의 영향으로 풀이된다.
서민통은 현재뿐 아니라 미래의 암담함에 더 큰 원인이 있다. 미국 싱크탱크 퓨 리서치 센터가 한·미·일 등 36국을 대상으로 실시해 지난해 발표한 경제 불평등 인식 조사에서는 ‘자녀 세대가 부모 세대보다 재정적으로 더 어려워질 것으로 보느냐’는 질문에 우리나라 국민 66%가 ‘악화될 것’이라고 답했다. 긍정 전망은 27%에 그쳤다.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는 기회의 차이가 경제적 불평등을 유발한다고 보는가’라는 질문에는 우리나라 응답자 43%가 ‘매우 그렇다’고 답했고 38%가 ‘어느 정도 그렇다’고 답했다. 서민통은 고로 정당한 노력의 대가를 기대하기 힘들어질 때 발생하는 일종의 화병일 수 있는 것이다.
◇가난 조롱하는 ‘가난 쇼’
동시에 서민통은 끊임없이 타인의 외면을 염탐하고 행복을 저울질하게 하는 소셜미디어의 폐해라는 지적도 나온다. 한 공기업 직원은 “내 연봉을 성과급으로 받는 친구들 보면서 너무 울적하고 서민통이 와서 인스타그램을 탈퇴했다”고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에 토로했다. 용례도 무분별해지고 있다. 일본에 여행까지 가놓고는 “긴자 거리의 최고급 맨션을 보고 서민통이 느껴져 사진도 안 찍었다”는 후기로 엄살을 부리는 식이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박탈감은 상대적인 것이기에 자칫 ‘가난 코스프레’가 될 수 있다”며 “재미를 위한 화법이라고는 해도 공감 대신 괜한 어리광이라 손가락질받을 공산이 크다”고 말했다.
‘가짜 가난 쇼’까지 잇따르며 진짜 서민의 울화통을 자극하고 있다. “지긋지긋한 가난. 오늘도 김밥에 라면이라니. 언제쯤 이 가난에서 벗어날까?” 지난달 소셜미디어 스레드에 올라온 게시글. 첨부된 사진을 자세히 살피면 냄비 밑에 수퍼카 열쇠가 보인다. 포르셰 운전대를 잡은 셀카와 함께 “지겹고 지독한 가난, 기름 넣을 돈도 없어서 오늘도 출근한다”는 글을 남기거나, 비행기 일등석에서 라면 사진을 찍어 올리며 “라면 먹는 지독한 가난”이라고 쓰는 유치한 장난. 가수 겸 배우 김동완(46)은 “가난은 농담으로 쓰기 힘든 감정”이라며 “웃기기 위해서라도 하면 안 되는 말이 있고 지양해야 할 연출이 있다”고 비판했다. “가난은 콘텐츠가 아니라 아픔일 뿐”이라며 자신의 ‘진정한 가난’을 고백하는 인증도 빗발치는 중이다. 이를테면 닭다리 반찬 대신 쌀밥을 닭다리처럼 빚어 접시에 올린 사진 같은 것이다.
◇우리 사회 최우선 해결 과제
용어는 의식을 드러낸다. 국민 618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한국인의 의식·가치관 조사’ 결과를 지난달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했다. 우리 사회 최우선 과제 1위로 빈부 격차(23.2%)가 꼽혔다. 직전 조사에서 1위였던 ‘일자리 문제’(22.9%)를 앞섰다. 부동산·주택 문제(13.2%), 저출생·고령화(10.8%) 등의 순으로 조사됐는데, 이 모든 문제가 압축된 총체가 바로 빈부 격차라는 분석이다. 우리 국민의 ‘전반적인 행복도’는 직전 조사였던 2022년 65%에서 51.9%로 급락했다.
국가데이터처 국가통계연구원은 기존 지표 조사를 종합 정리해 지난달 처음 ‘청년 삶의 질’ 보고서를 발간했다. 따로 주목해야 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다는 방증이다. 청년들이 고백한 삶의 만족도는 10점 만점에 6.7점으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38국 중 31위에 그쳤다. 미래 실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7.62%로 2022년(5.23%)보다 늘었다. 자신이 바라는 미래에 대해 ‘전혀 실현할 수 없다’고 응답한 비율이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가장 큰 동기 부여는 노력에 따라 시장 경제 원칙이 정상 작동할 것이라는 믿음”이라며 “이를 통해 미래를 그려나갈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지 않으면 서민통을 부르짖는 이들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