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에서 자줏빛 염료는 은(銀)만큼이나 비쌌다. 보라색은 황제나 높은 귀족들의 옷감에서나 겨우 쓰일 정도였다. 키티온 출신의 철학자 제논은 이를 다루던 상인이었다. 어느 날, 그는 이 귀한 염료를 싣고 가다가 아테네 근처에서 난파를 당하고 만다. 하지만 후에 제논은 이때의 경험을 이렇게 떠올린다. “배는 가라앉았지만, 성공적인 항해였다.” 왜 그는 이렇게 상황을 후하게 바라봤을까?
밑천을 잃은 상인은 하릴없이 아테네를 돌아다녔다. 하루는 그는 서점에서 크세노폰이 쓴 ‘소크라테스의 회상’을 접했다. 아마도 그는 이 책에 나오는 ‘헤라클레스의 선택’에 감동하였으리라. 영웅 헤라클레스가 앞날을 고민할 때, 두 여신이 앞에 나타났다. 쾌락의 여신은 헤라클레스에게 고통 없는 편안한 삶을 약속했다. 반면, 미덕의 여신은 그에게 험하고 힘들어도 가치가 있는 인생을 보여주었다. 헤라클레스는 미덕의 길을 택했고, 숱한 어려움을 이겨내고 위대한 인물로 거듭났다.
제논은 부잣집 도련님에, 큰 상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더 많은 돈을 번다고 해서 인생이 행복해지지도, 만족스러워지지도 않음을 그간의 체험으로 알았으리라. 부(富)는 더 많은 부를 바라게 할 뿐이다. 게다가 재산을 잃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주변의 질투와 시기라는 부작용도 만만찮다. 돈벌이는 중독과 비슷한 데가 있다. 제논은 진정 행복하고 바람직하게 살고 싶었다. 이런 그에게 철학은 진정한 부유함을 누릴 길을 열어주었다.
제논은 크라테스라는 철학자를 스승으로 따랐다. 크라테스는 제논을 혹독하게 가르쳤다. 당시 렌틸콩을 끓인 죽은 가난한 이들만 먹었다. 스승은 제논에게 렌틸콩 죽 단지를 들고 온 거리를 돌아다니게 했다. 부유했던 그에게, 이는 멋쟁이들이 가득한 명품 거리에 초라한 행색으로 서 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을 듯싶다. 제논이 쭈뼛거리자, 스승은 지팡이로 렌틸콩 단지를 내려쳤다. 죽이 옷에 튀어 엉망진창이 된 모습에 크라테스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뭐가 창피한 것이냐, 나의 어린 페니키아인아. 부끄러워할 것만 부끄러워하라!”
누더기를 걸친 영혼 깊은 성직자의 맑은 눈빛을 떠올려 보라. 그의 초라한 차림을 비웃을 이는 아무도 없다. 반면, 값비싼 옷과 보석으로 한껏 꾸민 졸부는 어떤가. 사람들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돌려 버린다. 고귀한 인품과 영혼을 갖고 있다면 세상에 주눅 들 일도, 부끄러워할 일도 없다. 후에 제논은 이렇게 말한다. “자만(自滿)처럼 흉한 것은 없다. 특히 젊은이들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제논은 꾸준히 검소함을 익혔다. 욕심이 없을수록 세상에 덜 휘둘린다. 제논의 식사는 단출했다. 잘 먹을 때도 작은 빵과 조금의 꿀, 적은 양의 향이 좋은 포도주가 전부였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도 피했다. 가게 되더라도 언제나 가장 구석에 앉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제논 곁에 모여들었다. 그의 흔들림 없는 평온함이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안겼기 때문이다.
“한 조각의 빵과 말린 무화과, 그리고 물을 마시는 것이 전부다. 그는 굶주림을 가르치는 데도 제자들이 모여들고 있다.” 그 시대 사람의 평가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도, 끝없이 쏟아지는 큰비도, 이글거리는 태양도, 무서운 질병도 그를 좌절시키지 못한다. 요란한 잔치도 그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한다. 제논은 지치는 일 없이 밤이나 낮이나 가르치는 일에만 매달렸다.” 제논의 묘비에 적혔다는 글이다.
제논은 아테네의 색칠한 기둥이 늘어선 회랑(스토아 포이킬레)을 거닐며 대화를 나누었다. 제논의 생각을 이어받은 자들을 ‘스토아학파’라고 부르는 이유다. 그는 말 잘하는 이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에게 말솜씨는 알렉산드로스가 만든 은화와 같았다. 보기에는 멋져도 투박한 아티카의 4드라크마 화폐보다 가치가 없다. 겉치레에 아무리 신경 써도 깊이와 내용이 없고 진실하지 않으면 소용없다는 뜻이다. 나아가, 올곧게 살아도 험담하는 이는 꼭 있게 마련. 이를 어찌 할지 묻자 제논은 담담하게 답한다. “비방 중상은 마치 답신을 받지 못한 사신처럼 돌려보내라.” 주변이 나를 어떻게 볼지 신경 쓰며 울컥대지 말고, 평온하고 담대한 마음을 지키는 데만 신경 쓰라는 의미다.
제논의 검소한 삶은 역설적으로 물질적인 풍요를 가져왔다. 당시 공중목욕탕을 다시 세우는 데 큰돈을 기부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다. 게다가 그는 아흔이 넘게 천수(天壽)를 누리며 건강하게 살았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후 정치적으로 혼란했던 당시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마케도니아 왕 안티고노스는 제논을 이렇게 평한다. “나는 행운과 명성에서는 제논보다 더 낫다. 그러나 이성과 교양, 완전한 행복이라는 점에서는 그에게 뒤처진다.”
제논은 “절제는 아름다움의 꽃”이라 했다. 그는 “‘조금씩’은 절대 작지 않다”며 우리를 격려하기도 한다. 욕망을 꾸준히 줄여나가려 노력해야 함을 일깨우는 말이다. 온갖 화려한 볼거리, 즐길 거리가 넘쳐나는 시대다. ‘욕망의 디톡스’를 통해 탐욕을 심으려는 세상에 맞서보시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