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국립오페라 신작 '노르마'에서 주역을 맡은 소프라노 페데리카 롬바르디. 상대역으로 나선 스타 테너 후안 디에고 플로레스를 압도하는 연기를 선보였다./Wiener Staatsoper/ Sofia Vargaiová

35년 전 첫 유럽 배낭여행 때 오스트리아 빈을 찾았다. 무더위 속에 미술사박물관, 자연사박물관, 쇤브룬 궁전, 벨베데레 궁전을 둘러본 기억이 어렴풋하다. 2박 3일 체류 중 가장 강렬한 경험은 빈 국립 오페라극장에서 본 모차르트 ‘마술피리’였다. 몇천원 하는 스탠딩 티켓 값을 내고 1층 맨 뒷자리에서 3시간 넘게 버텼다. 몸은 피곤했지만 눈과 귀를 기울여 무대에 집중했다. ‘이런 멋진 세계가 있구나’ 싶었다. 빈을 향한 구애(求愛)의 시작이었다.

그 후 10번 가까이 빈에 갈 때마다 국립 오페라극장을 찾았다. 카를스플라츠 역을 나와 링슈트라세에 접어들어 건너편 오페라극장을 쳐다보면 ‘드디어 빈에 왔구나’ 하는 실감이 났다. 말러, 슈트라우스, 카를 뵘, 카라얀 같은 전설적 지휘자들이 거쳐갔고, 숱한 오페라 가수들이 명멸한 꿈의 전당이다.

빈 국립 오페라극장은 매일 밤 다른 프로그램으로 최고 수준의 오페라를 볼 수 있는 곳이다.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도 일주일에 한두 편 올라가는 경우가 고작이다. 빈은 매주 서너 편씩, 이 시대 최고 성악가·지휘자들이 출연하는 오페라·발레가 연 300회 정도 공연된다.

1869년 개관한 빈 국립오페라극장. 말러, 카라얀이 거쳐간 오페라제국이다. 도심을 원형으로 감싸는 링슈트라세 안쪽에 자리잡고 있다./김기철

◇연 300회 오페라·발레 올라

2025년 2월 빈을 찾았을 때, 시즌 신작 ‘노르마’와 ‘세비야의 이발사’ ‘피델리오’, 발레 ‘카멜리아 레이디’까지 4편을 매일 밤 연달아 봤다. 오페라 ‘노르마’는 신예 소프라노 페데리카 롬바르디(37)의 활약이 눈부셨다. 로마 장군 폴리오네와 사랑에 빠졌다 배신당한 드루이드 사제 노르마로 나섰다. 적과의 사랑으로 생긴 자식 때문에 번민하는 어머니이자 연인을 가로챈 후배 아달지사에 대한 분노와 연민을 아우르는 복잡한 인물을 드라마틱한 목소리와 연기로 표현했다. 상대역인 스타 테너 후안 디에고 플로레스를 압도할 정도였다.

로시니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는 베이스 바리톤 에르빈 슈로트의 코믹한 조역 연기가 백미였다. 알마비바 백작을 헐뜯는 1막 아리아 ‘험담은 미풍처럼’부터 능청스럽게 음악 교사 바질리오를 연기했다.

‘피델리오’ 주역 테너 마이클 스파이어스(플로레스탄 역)와 베이스 게오르크 체펜펠트(로코 역)도 당당하고 힘 있는 목소리가 돋보였다. 두 사람은 2025년 바이로이트 축제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 주역으로 나란히 출연했다.

빈 클래식 공연의 중심인 무지크페라인홀.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상주홀이다. 국립 오페라극장서 걸어서 5분쯤 걸린다./김기철

빈 국립 오페라극장을 떠받치는 원동력은 오케스트라다. 빈 필하모닉의 모태인 이 악단은 매일 밤 다른 작품을 소화하는 강행군 속에서도 완성도 높은 연주를 보여준다. ‘세비야의 이발사’를 지휘한 라 페니체 수석 지휘자 출신 디에고 마테우스, ‘피델리오’를 이끈 뒤셀도르프 도이체 오퍼 암 라인 극장 음악감독 출신 악셀 코베르, ‘노르마’를 지휘한 로마 오페라극장 음악감독 미켈레 마리오티의 지휘봉이 빛났다. 특히 마테우스(42)는 베네수엘라의 음악 교육 프로그램 ‘엘 시스테마’ 출신으로 시몬 볼리바르 심포니, 멜버른 심포니 수석지휘자를 거치며 오케스트라 지휘자로도 부상 중이다.

빈 국립 오페라극장은 1869년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가 참석한 가운데 모차르트 ‘돈 조반니’로 개관했다. 객석은 1709석이지만 1층 뒷자리 등 입석이 567석으로 규모가 꽤 크다. 이 최고의 극장에서 테너 이용훈, 소프라노 임세경, 베이스 박종민, 빈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강효정의 공연을 봤고 정명훈이 지휘한 오페라 ‘리골레토’를 관람했다. 잊을 수 없는 순간이다.

빈 국립오페라 2025년 신작 '노르마' 주역으로 출연한 소프라노 페데리카 롬바르디./ Wiener Staatsoper/Michael Poehn

◇베토벤 ‘운명’ 초연한 테아터 안 데어 빈

빈에는 국립 오페라극장 외에 테아터 안 데어 빈, 폴크스오퍼 등 오페라극장이 셋이나 된다. 베토벤 교향곡 3번, 5번, 6번과 오페라 ‘피델리오’가 초연된 테아터 안 데어 빈은 주로 바로크 오페라와 실험적 현대 오페라를 올린다. 폴크스오퍼는 오페레타와 뮤지컬, 발레가 주요 레퍼토리다. 빈 국립 오페라극장에서 테아터 안 데어 빈은 걸어서 10분 거리, 여기서 폴크스오퍼까지는 1㎞ 정도 떨어져 있다. 반경 1㎞ 안에 오페라극장 3곳이 모여 있는 셈이다.

지난 2월 빈 무지크페라인에서 열린 빈 필 콘서트. 리카르도 무티가 슈베르트 교향곡 C장조 '그레이트'를 지휘해 호평을 받았다./김기철

◇무티의 슈베르트 교향곡 ‘그레이트’

귀국하는 날 오전, 빈 국립 오페라극장 근처 무지크페라인을 찾았다. 1870년 개관한 이곳은 클래식의 성전 같은 곳이다. 빈 필하모닉이 연주하는 슈베르트 교향곡 C장조 ‘그레이트’를 들었다. 몇 차례 실연으로 들어본 이 작품은 솔직히 지루했다. 그런데 리카르도 무티가 지휘한 빈 필의 ‘그레이트’는 황금빛 소리를 냈다. 이 도시에서 태어나고 숨진 작곡가가 남긴 걸작을 ‘황금홀’(무지크페라인 주공연장)에서 듣는 기회를 누린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가.

매년 1월 1일 아침 세계 수천만 시청자의 시선이 이곳에 쏠린다. 빈 필 신년 음악회 때문이다. 올해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음악감독 야닉 네제-세갱이 지휘봉을 잡았다. 요한 슈트라우스 부자의 왈츠와 폴카, 그리고 ‘라데츠키 행진곡’은 새해 의례 같은 프로그램이 됐다.

공항 가기 직전 들른 레오폴트 미술관에서 만난 구스타프 클림트의 '죽음과 삶'. 이 미술관에선 에곤 실레, 클림트 대표작을 만날 수 있다./김기철

◇찰나의 여유, 알베르티나 미술관

귀국행 비행기를 타기 직전, 레오폴트 미술관에 들렀다. 에곤 실레와 구스타프 클림트의 대표작이 모인 보석 같은 곳이다. 실레의 헐벗은 누드 자화상과 인물 초상엔 수천만이 숨진 세계대전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비행기 시간이 촉박할 때는 오페라극장 옆 알베르티나 미술관을 찾는다. 상설전 ‘모네에서 피카소까지’는 언제 봐도 질리지 않는다. 인상파에서 입체파까지 한 달음에 섭렵할 수 있다. 합스부르크 제국(帝國)의 보석, 빈에서는 잠시도 무료할 틈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