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달 데뷔 50주년 콘서트를 준비 중인 가수 최백호가 기타를 들고 앉아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쓸쓸하다는 마찰음에는 겨울바람이 불고 있다. 궂은비 내리는 날, 창백한 나무 한 그루가 거기서 흔들리고 있다. 저녁일 것이다.

가수 최백호(75)는 앙상했다. “몸무게가 15㎏ 빠졌다”고 말했다. “비결핵성 항산균이라고, 5년 전부터 폐 질환으로 고생을 했어요. 약이 아주 독해요. 목소리가 변했어요. 조금 가늘어졌고, 가성이 간혹 나와요. 예전과는 다르게 불러야 해요. 그래도 노래할 수 있으니 다행이죠.” 반백 년간 해온 일, 다음 달 데뷔 50주년을 맞는다.

–소회가 어떠십니까.

“운이 좋았습니다. 정말로 운이 좋았어요. 시골에서 온 고졸 청년이 부모 없이, 매니저 없이, 누구한테 촌지 한 번 준 적 없이…. 목소리 하나로 잘 살아왔구나.”

1월부터 전국 투어 콘서트가 예정돼 있다.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영일만 친구’ ‘낭만에 대하여’ ‘부산에 가면’ 등 세월을 관통하며 그를 고독의 가객(歌客)으로 살게 한 노래 10여 곡을 부를 것이다. 지난 15일에도 서울 서교동 연습실에서 그는 연주자들과 합을 맞추는 중이었다. “나의 오래된 기타는 처량한 소리로 울어대고….” 신곡을 가볍게 흥얼거리자 귓가에 마른 낙엽이 떨어졌다.

–쓸쓸한 노래가 많습니다.

“어려서부터 제 정서가 그랬어요. 일출보다 일몰에 더 마음이 움직여요. 최선을 다해 불타고 사그라드는 황혼이 얼마나 처절한지요. 돌이켜보면 삶의 가장 큰 요소가 고독이었던 것 같아요.”

◇마음이 갈 곳을 잃었을 때

“생전에 어머니께서 사주를 봐오신 적이 있어요. 제 팔자에 ‘공짜 돈’이 없다고 하더래요. 그래도 고마운 인연은 많아요. 그 덕에 계속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제2대 국회의원을 지낸 최원봉의 막내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백호(白虎)라는 이름은 최원봉이 따랐던 한학자 범부 김정설이 지어줬다. 흰 호랑이, 갓 울음 터뜨린 세상은 잔혹했다. 전쟁이 터졌다. 5개월 뒤 아들 보러 부산으로 내려오던 부친이 튀르키예군(軍) 차량에 치여 세상을 떠났다. 당시 신익희 국회의장은 “우리 전체 국가의 손실”이라는 애도사를 발표했다. 큰 포목점을 운영했던 조부는 “애비 잡아먹은 자식”이라며 어린 손주를 냉대했다. 절연이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셨을까요.

“저 태어나고 귀한 아들 죽었다고, 그게 제 이름 때문이라고요. 성인 돼서 도장 팔 일이 있었는데, 이름을 가만 듣더니 ‘양친 안 계시죠?’ 묻더군요. 기운이 너무 세다는 거죠. 어려서는 제 이름이 싫었어요.”

–부친에 대한 기억이 있나요?

“워낙 부잣집이라 고향집 좌천에서 동래고보까지 말을 타고 다니셨대요. 진짜 호랑이처럼 생기셨어요. 그 옛날 색소폰을 부셨고, 목소리가 우렁차서 연설할 때 마이크 없이도 여자들 혼을 쏙 빼놓으셨대요. 그런 신화 같은 이야기를 듣고 살았죠. 힘든 일이 있어도, 스스로 타일렀어요. 그래도 내가 누구 아들인데….”

–어떤 아들이었습니까.

“훌륭한 학생은 아니었습니다. 중학교는 재수해서 들어갔고, 고등학교 시험도 1차에서 떨어졌고. 그림은 곧잘 그렸는데, 공부에는 취미가 없었어요. 이모부가 사람 만들겠다고 불러다 농사를 짓게 하셨어요. 그마저 6개월 하다 도망쳤어요.”

초등학교 교사였던 모친이 사택(舍宅)을 옮겨 다니며 1남 2녀를 건사했다. “천장에서 쥐들이 뛰어다녔지만 어머니와 함께 살던 그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말했다. 골목에서 동네 형들과 기타 줄 튕기고 학교 벚나무에 올라가 종일 하늘을 바라보던 시절. 옛 일광역에서 모교 일광초교로 이어지는 길, 다리 끝에 늘 어머니가 서 계셨다. 영원할 수는 없었다.

–모친께서도….

“너무 일찍 가셨죠. 췌장암이었어요. 저 스무 살 때였죠. 상복 입은 채로 부둣가에서 몇 시간을 울었어요. 말 그대로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이었어요. 제가 부선망독자(父先亡獨子·부친을 일찍 여읜 외아들)여서 군 면제가 가능했는데, 입대해 버렸어요. 이겨내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육군 제1하사관 학교에서 조교로 복무했다. “몇 달 뒤에 훈련 끝나고 트럭에서 뛰어내렸는데 피를 물처럼 뿜고 쓰러졌어요.” 급성 결핵이었다. 자다가도 각혈을 했다. 병원으로 수송하던 군인들이 저들끼리 떠들었다. “이 새끼 곧 죽을 거다.”

◇다 죽은 목숨, 되살린 노래

'이등병의 편지' 이전에 최백호의 '입영전야'(1977)가 있었다. 최백호가 당시 겪은 입영전야는 그야말로 악몽이었다. /서라벌레코드

1년 만에 의병 제대했다. 살아남았지만 살길이 막막했다. “수중에 보상금으로 받은 11만5000원이 전부였다”고 했다. “요즘으로 치면 200만~300만원 될 거예요.” 한때 미대(美大)를 꿈꿨던 그는 극장에서 간판을 그렸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기억나요. 거기도 위계가 있어서 색칠은 못 하고 윤곽만 그렸지만요.” 흑백의 시절, 유일한 낙이 혼자 기타 치며 노래하는 것이었다. 이듬해 친구가 찾아와 뜻밖의 제안을 했다.

–뭐라던가요.

“매형이 생맥주 파는 공연장을 하는데, 가수를 물색 중이니 같이 찾으러 다니쟤요. 대여섯 군데 돌아보더니만, 불쑥 그러더라고요. 그냥 네가 해 봐라.”

–바로 수락하셨나요?

“한 달에 3만원을 주겠대요. 초저녁에 손님 없을 때만 잠깐 하라고, 업소에서 숙식도 할 수 있다고요.”

그렇게 송창식·이장희 노래를 따라 부르던 최백호에게 누가 말을 걸었다. 부산MBC에서 ‘별이 빛나는 밤에’를 진행하던 배경모 PD였다. “더 큰 데서 노래해보겠느냐, 부산 ‘Teen 클럽’을 소개해줬어요. 당시 한강 이남에서 제일 화려했을 거예요. 거기서 가수 하수영씨를 만나 친해졌고, 건반도 배우고 곡 쓰는 법을 익혔죠.” 하수영은 곧 서울로 진출해 성공을 거뒀다.

–그래서….

“나도 가야겠다.”

1974년 상경해 하수영의 주선으로 서라벌레코드에서 오디션을 치렀다. “앨범을 준비하면서 작곡가 최종혁씨를 소개받았어요. 술고래예요. 잔뜩 마시다가 ‘혹시 이런 것도 노래가 됩니까?’ 하고 제가 쪽지를 건넸죠.” 모친을 잃고 그리움과 죄스러움을 일기처럼 적어둔 글이었다. ‘가을엔,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 낙엽 지면 서러움이 더해요. 차라리 하얀 겨울에 떠나요….’ 일주일 뒤 최종혁이 곡을 써왔다. “피아노 치면서 ‘가을엔~’ 하는데 근사하더라고요. 패티김이 부르면 멋질 것 같다고 했죠.” 최종혁이 대꾸했다. “무슨 소리야, 네가 해야지.”

최백호의 1970년대 히트곡 ‘내 마음 갈 곳을 잃어’와 ‘영일만 친구’가 수록된 옛 앨범.

1976년 겨울, 첫 곡 ‘내 마음 갈 곳을 잃어’가 세상에 나왔다. 떠나는 이에게 보내는 절절한 편지. “녹음실을 3시간 잡아놨는데 첫 소절 ‘가을엔~’만 3시간 불렀어요. 솔직히 끝까지 탐탁지가 않았어요. 그때는 제 스타일이라는 게 없었어요. 그냥 ‘송창식 아류’였어요. 나중에야 노래를 너무 노래처럼 부르지 않는 법을 알게 됐죠. 말하듯이 노래하기.”

–그런데 흥행했습니다.

“TV 쇼에도 출연했어요. 버스비도 없어 청파동 하숙집에서 서소문 스튜디오까지 걸어 다니던 처지라, 친구 양복을 빌려 입었죠. 팔다리 길이가 안 맞았어요. 어디서 PD가 드럼통을 구해 오더니 그 위에 웅크리고 앉아 노래하라고 하더군요.” 오로지 목소리뿐이었지만, 훗날 포항 호미곶에 노래비(碑)로 세워지는 ‘영일만 친구’(1979)도 인기를 끌었다. 탄탄대로가 펼쳐진 듯했다.

◇노래가 아니라 발악이었다

가장 힘들 때 노래가 있었다. 그는 특히 아끼는 노래로 칠순 당시 발표한 ‘동생아’(2019)를 꼽았다. “동생뻘 친구들에게 덤덤히 인생 이야기 털어놓듯 불렀어요. 제2의 ‘낭만에 대하여’가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괜찮습니다. 아직 미발표곡이 50곡쯤 되거든요.”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고생 끝, 아니었나요?

“회사에서 돈을 안 줬어요. 수익을 다 가져가는 대신 하숙비랑 잡비를 주기로 했는데 약속을 안 지켰어요. 5년 치 계약금 30만원이 전부였죠.”

소속사를 옮기고 나서야 처음 목돈을 만져봤다. “어음 포함 900만원, 지금 돈으로 1억원쯤 될 거예요. 이불 밑에 넣어놓고 조금씩 빼서 썼죠. 은행의 기능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어요. 아직까지 부동산이나 주식, 이런 걸 몰라요.” 가정도 꾸렸다. 1980년 당대 최고 여배우 김자옥과의 결혼은 세간에 큰 화제였다. 성격 차이 등을 이유로 3년 뒤 헤어졌지만, 이듬해 또 한 번의 인연이 찾아왔다.

–지금의 아내 분인가요?

“이태원에서 노래하고 있는데, 지인의 일행으로 처음 만났어요. 그 뒤로 몇 번 더 마주쳤죠. 대학에서 콘트라베이스를 전공했다고 하고, 나이도 열 살이나 어린데, 아내가 적극적이었어요.”

–반대는 없었나요?

“장인어른은 끝내 결혼식장에 안 오셨어요. 한 번 다녀온 사람한테 애지중지 키운 셋째 딸 못 준다고, 술집이나 돌아다니는 직업 아니냐고. 아내가 세게 나갔어요. 가출까지 했거든요. 저보다 강해요. 아내 아니었으면 저는 못 살았을 거예요.”

당찬 새 출발, 형편은 계속 쪼들렸다. “10년째 히트곡은 안 나오고, 날 추워지면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나 부르는 가수였죠. 하루에 술집 일곱 곳에서 노래한 적도 있어요. 세 군데쯤 돌면 그때부터는 노래가 아니에요. 거의 고함치는 거예요. 발악하는 거죠. 땅콩 날아오는 건 기본이에요. 수박도 맞아봤어요. 가수 최희준 선배님이 그러셨어요. 그거 참는 것까지 출연료에 포함된 거다.”

–얼마나 참으셨나요?

“1990년에 미국으로 갔습니다.”

한 사업가의 제안이 있었다. “미국 LA에 한인 라디오 방송국을 차릴 거라고, 같이 일하자고. 바로 짐 쌌죠.” 약속의 땅에서 그러나 뜻밖의 직장 내 괴롭힘을 마주했다. “편성 담당 사업 파트너가 따로 있었나 봐요. 제 공연비를 떼먹고 연락 두절됐던 분이었어요. 행방이 묘연했는데 미국에서 만난 거예요. 불편했겠죠.” 그가 DJ 최백호에게 할당한 방송 시간은 단 10분. 대놓고 “나가라”는 신호였다.

–어떻게 하셨습니까.

“광고 빼면 7분이에요. 굴욕을 주면 제 발로 나갈 거라 생각했겠죠. 제가 소심해도 호락호락하지는 않아요. 월급 똑같이 받는데, 오히려 좋다. 노래까지 선곡해 넣었어요.”

2년이 흘렀다. 한국에서는 발길조차 주지 않던 노래방을 타국에서 드나들기 시작했다. 노래하고 싶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가수를 천직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깨달았던 것 같아요. 내게 얼마나 소중한 일이었는가.” 마침 미국으로 신혼여행을 왔던 DJ 배철수가 그를 찾아와 다그쳤다. “형!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당장 돌아와.”

–원망은 없었습니까.

“그래도 요즘 느끼는 건, 별일 없이 살고 있다면 과거의 악연도 결국 좋은 작용을 했다는 거…. 덕분에 다시 노래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분 돌아가셨을 때 조화 보냈어요.”

◇어느 날 문득, 낭만에 대하여

가난으로 붓을 꺾었지만 쉰 살이 넘어 그는 다시 이젤 앞에 앉았다. 나무 그림을 가장 즐겨 그린다. "변하지 않는 존재라서 좋다"고 말했다. 2009년 첫 개인전 당시 나무 그림과 함께. /전기병 기자

떠난 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마이너스 통장으로 일구는 생활이었지만 “마이너스 통장이 뭔지도 몰랐다”고 했다. “나중에야 아내한테 들었어요.” 불혹을 넘긴 나이, 문득 스스로 늙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노래를 듣는 사람도 나처럼 늙어가고 있겠구나.”

–각오가 생겼군요.

“트로트를 시작했어요. 청승맞지만 가슴 치는 노래. 그렇게 1993년 ‘애비’를 발표했습니다. 딸아이 시집 보내는 상상을 하면서요. 요 이쁜 것을 어찌 보낼까, 그런 마음으로요.”

여느 때처럼 목동의 1층 아파트 거실에 앉아 최백호는 기타를 치고 있었다. 아내는 부엌에서 설거지 중이었다.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내가 좋아했던 여자애도 어디선가 저렇게 그릇을 씻고 있겠구나”라는 다소 불경한(?) 상상을 하고 말았다. 최백호 음악 인생의 전후를 나누는 대표곡 ‘낭만에 대하여’는 그렇게 쓰여졌다.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가버린 세월이 서글퍼지는 슬픈 뱃고동 소릴 들어보렴….’

–추억이 만든 노래군요.

“궂은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1절 가사에 나오는 그 다방은 부산 동래시장 수안파출소 인근에 있었어요. 비를 피해 들어갔다가 흘러나오는 색소폰 연주를 듣고는 한참 머물렀던 기억을 더듬어 썼죠. 제목은 노래를 완성하고 나서 지었습니다. 그리고 노래 마지막에 ‘낭만에 대하여’를 한 번 더 넣었어요. 우리에게 남는 모든 회한이 다 낭만 아니겠습니까.” 참고로 그 첫사랑 소녀는 부산의 약국으로 시집을 갔다고 한다.

–늘 가사부터 쓰신다고요.

“보통 멜로디에 가사를 갖다 붙이잖아요. 억지로 단어를 끌거나 떼어놓기도 하고요. 그러면 시적인 가치가 떨어져요. 저는 음악 공부를 한 사람이 아니다 보니, 절대적으로 가사가 중요해요. 말하자면 가사에 멜로디를 칠하는 거예요.”

'낭만에 대하여'를 일약 국민 가요로 밀어올린 인기 드라마 '목욕탕집 남자들'의 한 장면. 배우 장용(맨 오른쪽)의 애창곡으로 소개되며 크게 흥행했다. /KBS

지금이야 명곡으로 추앙되지만 ‘낭만에 대하여’는 1년 가까이 반응이 전무했다. 한 달에 스무 장 팔릴까 말까 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던 1996년 가을, 소속사 여직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선생님, 이상해요. 오늘 앨범 주문이 1000장 들어왔어요.” 그해 판매량만 35만장. 장안의 화제였던 KBS 드라마 ‘목욕탕집 남자들’에서 배우 장용이 극 중 애창곡으로 이 노래를 줄기차게 불러댄 효과였다. “드라마 작가 김수현 선생이 차에서 우연히 듣고는 마음에 들어 넣었다고 해요. 생명의 은인이죠.”

–기막힌 행운이네요.

“노래에도 팔자가 있는 것 같아요. 하나의 생명체처럼요. 다 늙은 가수한테 갑자기 앨범을 내자는 제작자가 나타났고, 어느 날 김수현 선생은 차 안에서 라디오를 틀었고, 마침 그 노래가 흘러나오도록 한 어떤 에너지가 있었던 건 아닐까….”

◇한 번에 안 되면 여러 호흡으로

최백호가 지난 7월 열린 청룡시리즈어워즈 축하 공연에서 인기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 수록된 신곡 '희망의 나라로'를 열창하고 있다. /스포츠조선

평생 노래할 팔자, 팔순을 바라보는 원로 가수는 올해도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모범택시3’ OST를 소화하며 여전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지난 20일에는 서른 살 어린 가수 알리와의 합동 공연이 열렸다. 그와 협업한 후배들의 면면을 보면 조금 의아할 것이다. 가수 린·정승환·죠지·스웨덴세탁소부터, 래퍼 지코·타이거JK까지…. 아이유는 본인의 첫 콘서트에서 ‘낭만에 대하여’를 불렀고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노래”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아이유와도 작업하셨죠.

“방송국에서 조그만 여자애가 달려오더니 CD에 사인을 해달라고 한 적이 있어요. 아빠가 좋아한다고. 몰랐는데 아이유였어요. 2013년 후배 기타리스트 박주원씨 주선으로 함께 ‘아이야 나랑 걷자’를 불렀죠. 후배들한테 많이 배워요.”

“최백호는 목소리 자체가 음악”이라며 존경을 표한 프로듀서 에코브릿지(47)와의 만남이 본격적인 회춘을 이끌었다. 그 시작점에 노래 ‘부산에 가면’(2013)이 있다. 잔잔한 피아노 선율 위에 “너와 내가 파도에 부서져 깨진 조각들을 마주 본다”고 고향의 먼 해안을 펼쳐놓는 노래. “제 음색을 많이 연구했대요. 카톡으로 연주 파일을 받아서 듣자마자 ‘이거 내 노래다’ 싶었어요.” 데뷔 40주년 기념 음반에 수록된 ‘바다 끝’도 마찬가지. 가수 백지영, 방탄소년단 김태형이 “울고 싶을 때 위로받는 노래”라고 소개해 더 유명해졌다.

–바다 노래가 많습니다.

“제 고향, 과거가 온통 거기에 있어요. 떠나온 지 벌써 50년이 넘었네요. ‘바다를 떠나 사는 사람들에게’라는 노래를 만들고 있어요. ‘언젠간 다시 돌아갈 거란 생각으로 살고 있는가요? 그 생명의 바다, 푸른 파도의 고향으로….’”

다음 달 24일 서울 세종문회화관 대극장에서 시작되는 데뷔 50주년 전국 투어 콘서트 포스터.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곡 작업을 하고, 밤 10시에 라디오 ‘최백호의 낭만시대’를 진행하는 일상. 소주 10병은 우스웠던 주당은 이제 완전히 술과 이별했다. “11년 전쯤 제주도에서 술 먹고 기절해 구급차에 실려간 뒤로는 쳐다보지도 않는다”고 했다. 육신은 유한하기 때문이다. 2년 전에는 “상태가 안 좋아 도저히 안 되겠다”며 라디오 생방송을 중단한 일이 있었다. 수차례 개인전을 열 정도로 집중했던 화업(畵業)도 잠시 접었다. “유화 물감이 폐에 안 좋대요. 여의도에 있던 화실도 정리했어요.”

–호흡은 괜찮으세요?

“한 호흡에 끝내던 노래를 이제는 두세 번 끊어 불러야 돼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가수 송창식 선배가 성대결절 수술 후에 ‘목소리를 만들어간다’고 했는데, 이제 이해가 돼요. 다시 만들어가면 되는 거죠.”

울고 화내고 한탄하고 가끔 웃는 사이 목소리가 늙었다. 다만 바라는 바는 오직 부끄럽지 않게 늙어가는 것이다. “나라 꼴이 말이 아니지요. 싸워대느라 난장판이에요. 이 사람들, 좌우를 떠나 정말 부끄러워요. 거지 같은 자들한테 끽 소리 못 내고 눌려 사는 북한 사람들도 부끄럽고요. 그래서 ‘부끄럽지 않으세요?’라는 노래도 만들었어요.” 오는 봄, 새 앨범이 나온다.

–목표가 있으세요?

“아흔에도 공연하는 거예요.”

–가능하겠죠?

“요새 검은 머리가 많이 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