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게 물든 바다가 갯골을 파고든다. 인천 강화군 본섬인 강화도와 동검도를 잇는 다리에서 우연히 마주한 일몰 풍경은 1년을 무사히 살아낸 이들을 위한 선물 같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친구에게 비밀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처럼 올해의 마지막 여행 수첩을 적어본다. 혼자만 알고 싶기도, 모두에게 알려주고 싶기도 한 곳이 인천 강화군 동검도다. 이미 사진 동호인들의 인기 출사지와 행정안전부 ‘2025년 찾아가고 싶은 섬’에도 이름을 올릴 정도가 됐으니, 역설적이게도 이제는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버린 섬이다. 그럼에도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이 시기에 동검도를 ‘간택’한 이유는, 송구영신(送舊迎新) 여행을 즐기기에 최적지이기 때문이다. 서울 도심에서 차로 1시간 남짓할 정도로 가까이 있는 데다 큰 수고 없이 섬 안에서 해넘이와 해맞이가 모두 가능하다. 이에 더해 명상과 기도로 한 해를 차분하게 마무리할 수 있도록 이끄는 무인 채플, 병오년 새해 발원 기도를 올릴 고찰까지 이어갈 수도 있다. 새해 카운트다운에 들어가는 을사년의 마지막 주, ‘동검도 연말연시 특선 코스’ 보따리를 풀었다.

◇동쪽 검문소 ‘동검도’

인천 강화 초지대교를 건너면 잘 닦인 84번 지방도 따라 강화도 깊숙한 곳으로 북상하기가 쉬웠다. 동검도는 초지대교를 건너자마자 왼쪽 길로 접어들어 10여 분 정도 좁다란 시골길 남쪽으로 달려야 만날 수 있는 강화도 남동쪽의 작은 섬이다. 동검도(東檢島)란 이름은 옛날 삼남 지방에서 한양으로 올라오는 선박이나 중국과 우리나라를 오가던 상인이 거치는 ‘동쪽의 검문소’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석모도 서편에 있는 서검도(西檢島)와 함께 강화군 일대 해상 검문소 역할을 했던 섬이다. 전체 면적이 1.61㎢, 해안선 길이가 6.95㎞에 섬 인구는 149명(공공데이터 포털 2023년 기준)으로, 요즘같은 계절엔 한적하다 못해 때로 적막할 정도로 고요하다. 그렇다고 외딴 섬은 아니다. 강화도 선두리와 동검도를 잇는 연륙교(동검교)가 놓여 있어 차로 통행이 가능하다. 이따금 51번 마을버스가 연륙교를 건너 섬 구석구석을 누비기도 한다. ‘강화나들길 8’(철새 보러 가는 길, 17.2㎞) 코스에 있는 동검도는 날씨 좋은 계절에 마음만 먹으면 당일치기 도보 여행도 가능하다.

◇‘동그랑섬’ 찾은 두루미

이맘때, 드넓은 연안 갯벌이 맨살을 드러내는 간조 시기에 맞춰 동검도에 체크인하면 일찌감치 동검도에 먼저 도착한 두루미가 마중 나온다. 동검도는 소리에 민감한 희귀조 두루미가 월동을 위해 찾는 지구상 최남단 섬으로 알려져있다. 하얀 몸에 검은 날개를 모으고 느릿느릿 걷는 모습이 마치 턱시도를 입은 호텔 지배인 같다. 오염되지 않은 갯벌로 둘러싸인 동검도는 두루미에게 겨울나기 최적지. 갈대숲엔 사진동호인이나 철새 탐조 동호인이 조용히 숨죽이고 있는 모습도 발견할 수 있다.

동검도는 겨울 철새 두루미가 찾는 지구상 최남단 월동지로 알려져 있다. 갯벌에 물이 빠지자 두루미가 먹이를 찾기 위해 나섰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섬 모양이 동그랗다고 해서 '동그랑섬'은 물때에 따라 동검도와 연결되기도, 단절되기도 한다. 사진 왼쪽이 동검도 해안도로다. 물이 빠지면 동검도에서 걸어 들어가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이나 펄이 질어 걸어가기가 만만치는 않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두루미 주변으로 그림처럼 걸리는 ‘동그랑섬’은 물때에 따라 동검도와 연결되기도, 단절되기도 하는 또 하나의 섬이다. 섬 모양이 동그랗다고 해서 동그랑섬이라 불린다. 갯벌이 열리면 걸어 들어가 볼 수는 있으나 종종 물때를 못 맞춰 여행객이 고립됐다는 소식으로 뉴스에 등장하는 곳이니 물때 확인은 필수다. 동그랑섬은 물이 차올라 섬이 될 때, 때마침 노을이 더해지면 서정적인 풍경으로 변신한다. 동그랑섬이 호수처럼 잔잔한 바닷물에 비쳐 원을 이루는 풍경은 일몰을 만나기 전, 동검도가 내어주는 또 하나의 에피타이저다.

◇방향에 따라 일몰, 일출을 감상하는 ‘동검항’

해안도로 따라 동검도의 남서쪽에 있는 동검항은 일출과 일몰을 모두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다. 서해에선 당진 왜목마을이 일몰과 일출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는 전망 포인트로 유명하지만, 전망은 달라도 동검항 선착장에서도 가능하다. 일몰·일출에 가까워지면 동검항 주차장으로 차가 하나 둘 들어오고, 선착장엔 어느새 긴 줄이 늘어선다. 선착장에서 떨어져 일몰·일출을 감상하는 사람들의 실루엣을 담아보는 사진도 색다르다. 일몰 때 선착장에서 서쪽으로 향하면 멀리 장봉도와 신·시·모도, 영종도를 차례로 물들이는 붉은 노을과, 일출 땐 바다나 갯벌을 사이에 두고 멀찌감치 영종대교 등 해상도시의 스카이라인에 여명이 걷히는 풍경과 마주할 수 있다. 단, 연말연시 무렵엔 일출과 일몰을 보기 위한 발걸음이 증가해 주차가 쉽지 않고, 특정 시간대엔 차량을 통제하기도 하니 여유있게 입도하는 게 마음 편할 수 있다.

동검항 선착장은 방향에 따라 일출과 일몰을 모두 볼 수 있는 전망 포인트다. 선착장을 걷는 이들의 실루엣을 담아보는 사진도 색다르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일몰을 최대한 가까이 볼 수 있는 동검도 서쪽 해안으로는 길이 없거나 길이 나 있어도 캠핑장과 민가·펜션들이 자리 잡고 있어 호젓한 분위기를 만끽하며 해넘이를 감상하기는 쉽지 않다. 섬 초입의 동검교는 오가며 지나치기 쉬운 일몰 감상 전망대다. 맑은 날, 간조였다가 갯골로 차츰 바닷물이 파고들 때, 유려한 곡선을 긋는 듯 갯골을 채우는 물길과 서해 섬 사이로 스며들어가는 해를 보면 ‘인생 일몰’이라는 말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동검교에 서서 추위도 잊고 쉴 새 없이 셔터를 누르던 한 여행객에게 산책에 나선 이곳 주민은 “한겨울에 갯벌로 물이 서서히 들어올 때, 여기서 보는 일몰이 가장 예쁘다”고 했다. 날이 좋다면, 큰 수고를 하지 않고도 동검교에서 뭉근한 감동을 담은 일몰과 조우할 수도 있다.

◇작은 섬 안의 작은 채플

작은 섬 동검도는 작은 것들이 반짝반짝 빛을 내는 아름다운 섬이기도 하다. ‘동검도 채플’은 1년 내내 24시간 무인으로 운영되는 7평짜리 작은 채플이다. 일몰과 일출 감상이 목적이 아니어도 사시사철 동검도로 발걸음 하게 만드는 이유가 되기에 충분하다. 가톨릭조형예술연구소 대표이자 천주교 조형 예술 분야 권위자인 조광호(78) 신부가 “유럽 유학 시절에 작은 채플에 관심이 많던 친구를 따라다니면서 작은 채플이 가진 힘에 대해 깨닫게 되었고, 영혼의 쉼터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만들었다”는 채플은 2022년 개관 후 종교를 떠나 많은 이들이 다녀갔다. 조 신부는 “목적이 없는 목적지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채플을 열었다”며 “어머니의 품처럼 자연 속으로 숨어 들어가고 싶은 동굴 같은 공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누구도 위축되지 않게 작게 꾸몄다”고 했다.

홀로 찾아가 조용히 묵상, 기도할 수 있는 '동검도 채플'. 7평의 아담한 공간은 스테인드글라스 예술가이자 가톨릭조형예술연구소 대표인 조광호 신부가 직접 스테인드글라스로 꾸몄다. 365일 24시간 내내 무인 운영하는 채플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햇살이 들어오는 '동검도 채플'. 내부엔 명상 도구인 싱잉볼과 명상으로 이끄는 조광호 신부의 저서 등이 놓여 있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채플에 들어서면 키보다 조금 더 큰 창문과 마주한다. 창 너머로는 영산인 마니산과 초피산, 서해의 수평선, 동검도의 갯벌, 선두리 어촌 마을이 한눈에 펼쳐지며 시시각각 다양한 변주를 한다. 낮에는 스테인드글라스의 십자가가 해의 각도에 따라 채플 안에 그림자가 되어 걸리고, 해 질 녘이면 격자창을 통해 노을이 스며든다. 어둠이 내려 채플 안에서 불을 켜면 스테인드글라스의 불빛이 꽁꽁 언 밤하늘을 녹인다. 채플은 그 자체로 자연 속에 깃든 성스러운 풍경의 하나다. 조 신부는 “자연과 눈높이를 나란히 한 낮은 언덕에 자리 잡고 있고, 혼자여도 위축되지 않는 아담한 크기의 채플에선 누구나 조용히 마음을 정리하거나 명상을 통해 지친 마음을 내려두고 갈 수 있다”고 했다.

'차경'(풍경을 빌린 건축 방식)을 따른 창문 밖으로 대자연이 변주를 한다. 시시각각 변하는 날씨와 하늘, 갯벌이 한편의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펼쳐진다. 조광호 신부는 "동검도 채플은 산, 하늘, 바다 등의 경계가 한눈에 들어오는 '낮은 언덕'에 지어졌다"며 "경계와 나란히 하는 눈높이에서 경계를 넘나드는 풍경을 통해 영혼의 휴식을 얻어가길 바란다"고 했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채플 옆의 갤러리는 조광호 신부의 스테인드글라스 작품 전시 갤러리 겸 다목적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주말 11시에는 조 신부가 직접 미사를 진행하는 소성당으로 변신한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채플 앞 벤치에 앉으면 동검도와 선두리 사이의 갯벌과 마주할 수 있다. 머리를 비우기에는 그만인 풍경이 하루종일 펼쳐진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채플과 마주한 갤러리는 조 신부의 스테인드글라스 작품 전시를 위한 갤러리 겸 다목적 모임, 세미나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주말 오전 11시엔 조 신부가 직접 미사를 진행하는 소성당으로 변신한다. 갤러리는 월요일엔 휴관하며 평일엔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동절기)까지 자원봉사자가 상주해 안내를 돕는다.

◇‘전등사’에서 새해 소원 적기

동검도 채플에서 차로 10여 분 거리, 강화도 정족산에 있는 전등사는 해넘이나 해맞이 후 이어가 볼만하다. 매년 12월 31일 오후10시부터 시작해 자정까지 제야의 타종 행사와 함께 새해 소원지를 쓰고 정월대보름에 태우는 행사를 이어간다. 연말연시 소원 성취 발원을 위한 행렬이 이어지는 중이다. 전등사 경내 “꽃은 피어도 열매는 맺지 않는다”는 600여 년 수령의 은행나무 옆엔 소원지가 벌써부터 빼곡하다.

새해를 앞둔 지난 22일 강화군 전등사에서 소망등에 소원을 적고 기념 사진을 찍는 탐방객.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에 아도화상이 창건한 전등사는 진종사(眞宗寺)라 불리다가 충렬왕(1274~1308)의 비 정화궁주가 옥등을 시주하면서 전등사(傳燈寺)라 불려오고 있다. 전등사는 들어가는 문부터 여느 사찰과 다르다. 일주문이나 사천왕 대신 ‘강화 삼랑성’(江華 三郞城·정족산성)의 사대문을 통한다. 강화 삼랑성(이하 삼랑성)은 마니산 참성단과 함께 단군 이야기가 전해지며 조선시대 병인양요 땐 승전지로도 의미 있는 유적이다. 삼랑성을 지나 대웅보전으로 가려면 강화 전등사 대조루(江華 傳燈寺 對潮樓)도 거쳐야 하는데 누각이 낮게 지어져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이게 되는 구조다. 누구라도 대웅보전에 들어서기 전 겸손함부터 깨닫게 된다.

강화 전등사 대조루는 누각이 낮게 지어져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이게 된다. 겸손한 마음으로 지나가 고개를 들면 정면에 대웅보전의 본존불이 보이는 가람 배치를 하고 있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전등사에선 매년 정월대보름에 새해 소원지를 태워주는 행사를 연다. 벌써부터 다녀간 이들의 소원지가 빼곡하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소원만 빌고 가긴 아쉬울 수 있다. 전등사 곳곳엔 옛 이야기가 가득하다. 그중 대웅보전 처마 밑 네 귀퉁이에서 지붕을 떠받치는 익살스런 표정의 ‘나부상’ 이야기가 재미있다. 전등사 중창에 참여한 도편수가 주모와 사랑에 빠졌는데, 절을 다 짓고 나니 주모가 자신의 돈을 가지고 도망쳤고, 나부상을 통해 주모를 벌하고 속죄를 염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전설은 전설일 뿐, 석가모니의 전생 중 원숭이 왕 시절의 이야기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견해가 강하다.

전등사 일주문을 대신하는 '강화 삼랑성' 성곽길은 사색하기 좋은 코스다. 조금만 올라가면 뜻밖의 전망이 펼쳐진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강화 삼랑성' 성곽길 위엔 소나무숲이 펼쳐진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전등사 경내 찻집 '죽림다원' 좌식석은 온돌방 형태다. 따끈따끈 방에 앉에 쌍화차와 연팥빵을 즐기며 잠시 쉼표를 찍고 가기 좋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고찰을 둘러본 뒤 전등사 찻집인 ‘죽림다원’에서 따끈한 대추차 한잔하고 삼랑성 성곽 길을 산책하는 코스도 빼놓을 수 없다. 좁다란 계단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소나무 숲과 함께 일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전망과 만난다. 성곽 따라 삼랑성 동문 방향으로 하산할 수 있다.

◇건축상 받은 미술관, 미디어아트 카페도

2013년 개관과 함께 건축상을 받은 ‘해든뮤지움’이나 지난해 봄에 문을 연 복합 문화 공간 ‘아트팩토리 참기름’도 동검도에서 차로 10~20분 거리인 강화도 본섬에 있다. 특히 아트팩토리 참기름은 “다가오는 신정 당일 평소 운영 시간(오전 9시 30분~오후 6·7시)보다 앞당겨 오전 8시에 문을 열 예정이며 관람료는 정상가 성인 기준 1만7000원이나 1월 1일 오전 8시부터 9시 30분까지는 해맞이 특별 이벤트로 떡국 나눔 행사 포함 관람료 1만원으로 즐기는 ‘만원의 행복’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하니 해맞이 후 몸을 녹일 겸 가볼 만하다. 오래된 참기름 공장과 일대를 전시관, 카페, 레스토랑, 산책로 등으로 꾸몄다. 강화도의 자연과 전설, 상상의 풍경을 모티프로 한 몰입형 미디어아트 전시를 시작으로 에드바르트 뭉크의 삶과 대표작을 만나는 미디어아트 전시, 인터랙티브 체험전 등이 기다린다. 절규와 고통에서 시작해 희망에 이르는 뭉크의 작품을 통해 감정과 삶의 파편을 따라가는20여 분 짤막한 영상은 고뇌하던 예술가의 이야기를 넘어서 올해를 살아낸 모두의 자화상 같다. 몰입으로 이끄는 음악이 곁들여져 감동을 더한다.

온종일 두 섬을 오가며 갯내를 흠뻑 입고 일상으로 복귀하는 길, 어둑해진 하늘이 걷히고, 갈라진 갯벌 사이로 바닷물이 모여든다. 반드시 다시 만나 고요해지는 바닷물처럼 새해, 새날은 조금 달라져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