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軍)의 생명은 기동성이다. 조리병(옛 취사병)의 자세와도 상통한다. 눈 깜짝할 새 1㎏짜리 대형 사각 햄 한 박스가 먹기 좋은 크기로 동강 나고 400g짜리 골뱅이 마흔여덟 캔이 손질됐으며 볶음용 멸치 한 포대가 물엿에 절여져 마늘과 함께 볶아졌다. 불과 1시간여 만에 300인분 넘는 국과 밥, 배추김치 포함 반찬 3종이 완성됐다. 이 전장 같은 조리실에서 내가 한 일은 무엇인가. 최선을 다해 우거지와 햄 썰기.
짬밥의 역사는 유구하다. 나폴레옹 왈, “군대는 잘 먹어야 진격한다.” 프랑스에는 “수프가 군인을 만든다”는 속담이 있다. 소박해도 풍족하게 먹는 군인이 고된 임무를 잘 견뎌낸다는 의미다.
군부대에서 음식을 만드는 장병이 조리병이다. 과거 취사병·급양병(急養兵)·주계병 등으로 불렸으나 명칭이 통일됐다. 우리 군은 1971년부터 외부 식자재를 받아 장병이 조리하는 방식으로 급식을 운영했다. 국방부가 3년 전부터 동원홈푸드·아워홈 등 민간 기업에 장병 급식을 개방하며 ‘조리병 없는 부대’가 늘어가고 있으나, 54년 역사와 전통의 병과가 사라질 리 만무하다. 허나 “꽁꽁 언 식재료를 도끼로 깨서 조리했다” “매일 오병이어를 실천했다” 같은 괴담이 아직 난무하는 것도 사실. 요즘 군대, 밥은 어떻게 만들어져 나오는지. 지난 11일 부산 해운대 인근에 있는 육군 53사단 ‘충렬부대’에서 주특기 번호 231107, 조리병과 함께 조식·중식을 만들어봤다.
◇흡사 조리실의 여명 작전
오전 5시 50분, 교실 하나 크기의 조리실에 사내 여섯 명이 은밀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조리복 차림. 충렬부대 병역 식당(일명 ‘더 좋은 병역 식당’) 애칭인 ‘충렬명가’의 삼시 세끼를 책임지는 귀한 조리병들이다. 충렬명가는 지난해 작전사 ‘더 좋은 병역 식당’ 최우수 부대로 선정됐다.
이날 메뉴는 쌀밥·사골우거짓국·햄감자볶음·마늘멸치조림·배추김치, 후식으로는 딸기맛 우유. 급양관리관 조현준(25) 하사가 밥·국·조림·볶음·설거지·홀 정리 등 각자 맡을 일을 배정했다. 그는 “중요한 건 안전과 책임감”이라며 “맡은 바를 완벽히 해내지 못하면 재료를 빠뜨리거나 양 조절에 실패할 수 있다”고 했다.
말 떨어지기 무섭게 대형 국자와 삽처럼 생긴 거대한 볶음 조리 도구가 오가기 시작했다. 모든 식기가 크고 무거웠다. 조리병들은 말도 없이 기계처럼 착착 움직였다. 나는 산더미 같은 식재료에 기가 죽었다. 대형 냉장고는 풍족했다. 고추·당근·파 등이 한가득. 매주 월·수·금 수급 받아 손질해 놓는단다. 무나 양배추·마늘 등은 모두 씻은 뒤 껍질을 깐(벗긴) 상태로 들어오기에 마늘 깔 일은 없었다.
3년 차 조리실장이자 민간인 이화숙(59)씨가 내게 “국에 넣을 우거지를 쫑쫑 말고 숭덩숭덩 썰어 달라”고 했다. 이씨는 유치원 급식 조리원 출신이다. 3년 전부터 조리실장을 두는 부대가 늘어가는 추세. 우거지를 썰고 또 써는데 싱크대에서는 백미를 포대째 쏟아 박박 문질러 씻고 있었다. 그리고는 대형 밥솥(찜통)에 넣는다. 또 쌀 몇 포대를 쏟더니 이번엔 보리와 현미와 찹쌀을 섞어 다시 씻는다. 알고 보니 “점심 메뉴인 잡곡밥까지 준비하는 것”이라고.
아이고, 정신이 없다. 대형 화구에 올려진 150인분용 웍 두 곳에는 감자가 달달 볶아지고 있고, 10㎏ 넘는 완제품 사골 육수팩은 어느새 300인분용 대형 국솥에 담겨 끓고 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홀린 듯 햄을 써는 중이었다. 뭐지, 어떤 과정으로 햄을 썰게 된 거지. 옆자리 조리병 칼질이 어찌나 빠른지, 내가 햄 한 줄 썰 때 그는 두 줄을 썰었다.
대량 조리의 생명은, 간. 김은구(20) 병장이 썬 우거지와 된장 약 2㎏을 국솥에 털어 넣더니, 국자로 떠서 숟가락에 올리고 맛을 봤다. 그리고는 고춧가루와 소금을 멋있게 촤악~ 뿌렸다. “아직 간이 좀 안 밴 것 같습니다.” 그는 한국호텔관광실용전문학교 호텔조리학과 출신이다. 중식 준비 때도 앞장서 삼치 튀김에 입힐 튀김옷을 만들고, 후춧가루와 설탕을 뿌려 가며 간을 봤다. 스테이크소스·굴소스·누텔라 등 준비된 조미료만 44개. 이것이 조리병의 위엄인가. 만들 때 고생스러운 음식은 아무래도 튀김이란다. 뜨거운 기름 앞에서 사투를 벌여야 하기 때문. 조리실의 여명이 밝아오고 있다.
◇요즘도 초코파이 좋아하나요
숟가락을 수직으로 올려 먹고 “맛있게! 잘! 먹겠습니다!” 외치는, 그런 건 없었다. 오전 7시 30분쯤, 병사들은 식판에 밥을 직접 담아 평범하게(?) 먹었다. 자율 배식을 하지만, 못 먹는 병사가 없어야 하기에 식당 입구에 음식을 표준치만큼 담은 식판을 둔다. “이만큼 담으면 모두 먹을 수 있다”는 의미다. 집 떠나온 얼굴들을 보니 갑자기 왈칵. 많이 드세요, 우거지랑 햄 제가 썰었어요.
한창 배고플 나이답게 단연 고기류의 인기가 많단다. 최근 육군 설문조사에 따르면 후랑크소시지구이·파채소불고기 등의 만족도는 100%. 반면 새알심미역국·순대국밥 등은 각각 14%와 25%의 ‘매우 싫다’를 기록했다. ‘좋다’와 ‘싫다’가 각각 50%로 팽팽하면 메뉴에서는 통상 제외한단다. 잔반이 많이 나오기 때문. 대표적인 메뉴로 마라찜닭이 있다. 요즘은 2주에 한 번 외부 음식을 부대 내에서 먹을 수 있는 ‘브런치 데이’도 있단다. 인기 만점은 햄버거 등 프랜차이즈 음식.
뒷정리를 마친 조리병은 오전 9시 50분쯤까지 개인 정비 시간을 가진다. “요즘도 초코파이 주면 좋아하나요?” 군 미필자이자 고릿적 세대인 내가 물었다. 오도현(20) 일병이 이런 날 안타까워하는 목소리로 “요즘은 군 마트(PX)라는 좋은 곳이 있기 때문에…”라고 했다. 그는 오송정보대 K푸드조리과 출신으로 꿈이 셰프다. 오 일병은 “대형 회전솥 등은 업장에서도 잘 쓰지 않고 학교에서도 사용하지 않는다”며 “덕분에 대형 조리할 때 재료를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 눈썰미가 늘고, 칼질도 늘고 있다”고 했다. 다양한 재료를 많이 다뤄볼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라고.
조리병은 일반 병사보다 40분 이른 오전 5시 50분에 일어나 30분 늦은 오후 7시쯤 일과가 끝난다. 최소 조리 인원이 있어 휴가도 3~4개월에 1번 나간다고. 조리병으로서의 어려움을 물으니 김민준(21) 상병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처음은 어려웠지만 선임분들이 잘 알려주셔서 해내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군인다운 씩씩한 답변에 또 왈칵. 집에 가고 싶은 거 다 알아요, 조금만 더 힘내요.
◇사회도 군대도 눈치껏이 최고
다시 침묵의 진격이 시작됐다. 이번엔 중식 준비. 메뉴는 잡곡밥·쇠고기육개장·삼치튀김·골뱅이쫄면무침, 후식 카프리썬오렌지망고. 박도현(21) 일병은 위생맨이었다. 매우 집요하게 한치의 티끌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호스로 물을 뿌려가며 대형 국솥과 웍을 닦았다. 5분 뒤에 쳐다보니 또 다른 회전솥을 닦고 있었다. 조리와 설거지는 동시에 이뤄졌다. 사용을 마친 즉시 닦는다. 덕분에 조리를 모두 마치고서도 따로 치울 식기가 없었다. 조리할 땐 노란색, 설거지할 땐 핑크색 고무장갑. 장갑 바꿔 끼는 것을 잊을 때마다 위생맨은 내 귓가에 속삭였다. “고무장갑.”
동선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거늘, 실로 빛의 속도다. 한 명이 캔 뚜껑 손잡이를 따면 다른 한 명은 뚜껑을 열고, 다 열 때쯤 누군가 그림자처럼 쓱 나타나 치우고, 골뱅이를 담을 대야가 준비되는 식이다. “어떻게 이렇게 빠릿빠릿하게 아는 거예요?” 가위로 골뱅이를 자르며 소곤소곤 물었다. “눈치껏?”이라고 하자 이수환(21) 일병이 배시시 웃더니 육개장 국물에 멸치액젓 세 국자를 두르러 후다닥 사라졌다. 역시 눈치껏 하는 거였어. 그 덕에 조식보다 한 일은 많아졌다. 눈치보다 쫄면을 뜯고, 다 뜯으면 국솥을 휘젓고, 사용한 식기를 발견하면 냉큼 설거지를 했기 때문.
우리 용사들이 닌자처럼 일을 해치워버렸기에 난 한 일이 딱히 없었다. 일손을 덜어 주고 싶었건만. 돌아오는 길, “부모님 보고 싶지 않느냐” 묻자 반짝이던 용사들 눈망울이 선하다. 일과 시간 이후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있더라도 직접 보는 것만 못할 터. 지난 7월 입대해 휴가를 가 본 적 없다는 이수환 일병은 “여기서 건강하게 잘 생활하다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했다. 오도현 일병은 “부모님은 언제나 보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묵묵히 맡은 바 임무를 해 내는 우리 국군 장병들, 몸 건강히 전역하세요. 참, 잘 먹어야 하니 급식을 책임지는 대한민국 1만1000명 안팎의 조리병도 모두 파이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