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년 뒤엔 여기 있는 우리 모두 사라진다!’ 눈부신 20대 청춘들에게 철학 수업에서 강조하던 진실이다. 매달 만나는 친구들의 늘어나는 흰머리는 곧 나 자신의 모습이다.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사람이 연회비를 독차지하기로 하자!’며 함께 박장대소하던 것도 벌써 몇 년 전 일이 됐다.
형님·누님들과 중국 시안 가족여행을 다녀왔다. 막내인 내가 있어 평균 나이 77세로 젊어진 ‘윤씨 가족’의 역사 여행이다. 병마를 갓 떨쳐낸 80대 중반 큰 누님이 가장 씩씩하게 앞장서 걸었다. 정겹고도 알찬 여행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풍성한 가족여행이 언제 다시 가능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평소 즐겨 읽는 도덕경은 ‘천지불인’(天地不仁)을 선언한다. 압축 문장의 극한인 도덕경에서도 뼈아픈 구절이다. 스스로 흘러가는 자연엔 인간의 도덕적 판단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는 뜻이다. 제임스 웹 망원경이 보여준 깊은 우주의 모습은 아득하고 또 아득했다. 나이 듦과 죽음은 ‘불인’한 자연의 필연적 흐름일 뿐.
자연 못지않게 무심하고 차가운 게 역사다. 이른바 ‘역사불인’(歷史不仁)이다. 수백만 인명을 해친 폭군은 호의호식하고 선한 사람들이 오히려 고통받는 풍경이 역사엔 흔하다. 세상을 호령하던 거대 문명이 돌무더기 폐허로 남은 유적지의 느낌은 그만큼 쓸쓸하다. 그 많은 사람들의 희로애락은 다 어디로 갔는가.
철학은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출발한다. 생각이 깊어지면 삶과 역사, 우주 전체를 꿰뚫는 보편성을 꿈꾸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심오한 철학도 궁극적으로는 우리네 일상, 곧 구체성의 세계로 다시 돌아와야만 한다. ‘구체적 보편성’의 지평이다.
나의 철학적 여정은 구체적 보편성의 탐구였다. ‘국가의 철학’과 ‘시장의 철학’이 그 중간 결과였다. 신문 칼럼도 이런 철학적 관심의 확장이다. 사회와 역사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싶은 갈망이 칼럼으로 표출된다. 헤겔 ‘법철학’ 서문은 이솝 우화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를 강조한다. ‘지금, 여기’야말로 당신의 삶을 증명하는 승부처라는 뜻일 터.
철학의 시원(始原)은 자신과 세계를 돌아보는 에세이였다. 한국 수필에서 자주 만나는 ‘신변 잡담 펼치기’가 에세이로 승화되려면 더 정교해져야 한다. 일상의 느낌을 가볍게 따라가는 수필을 넘어 에세이는 단아한 품격으로 인식을 넓히고 섬광 같은 깨달음을 선사한다. 삶과 세상사에 대한 통찰이 맛깔난 글로 육화될 때 에세이는 철학이 된다.
젊은 시절엔 언제라도 희대의 걸작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거대한 착각이었다. 수십 년 글쓰기는 평범한 몇 권의 책으로 남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소박할지언정 ‘나만의 길’을 걷게 된 게 작은 수확이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데 있으리라.
과거를 한탄하고 현재를 불평하며 미래를 절망하는 이들의 인생은 짧다. 주어진 인생의 극히 일부분만을 ‘살아가는’ 습관이 인생을 더 짧게 만든다. 비록 자연은 무심하고 역사는 무정할지라도 우리는 ‘지금, 여기’를 온전히 살아갈 수 있다. ‘현재는 하루뿐이고, 그마저도 순간으로만 존재한다.’ 고령의 형님·누님들과 함께한 정겨운 가족여행, 즐거운 친구들과의 대화, 자신에의 깊은 침잠 속에서 우린 충만한 현재를 살아간다.
모든 일은 시작과 끝이 있다. 지지난 봄 출발한 지천하 에세이가 겨울 한가운데서 끝난다. ‘불출호, 지천하’(不出戶, 知天下), 즉 ‘방 안에 앉아서도 세상사를 꿰뚫어 보는 것’은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하지만 어둠의 밤이 지나가면 아침엔 청신한 기쁨이 찾아온다. 모두 기쁨과 희망의 새해 맞으시길!
※그동안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