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한상엽

“‘무상몰수·무상분배’ 북한의 토지개혁은 성공했고, ‘유상매수·유상분배’ 남한의 농지개혁은 실패했다.”

1980~1990년대 대학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한 운동권 선배들의 소위 ‘의식화 교육’에서 ‘북한 체제의 우월성’을 설명할 때 빠지지 않았던 논거였다. 실상 ‘역사적 사실’은 이와는 정반대였다. 집단농장에 예속된 북한 농민들은 단 한 평의 농지도 소유하지 못했고, 남한 농민들은 헌법·법률을 위반한 불법 임대차나 직접 농사가 어려운 고령 지주의 농지 등 지극히 제한적인 예외를 제외하면, 모두 자기 땅에서 농사를 짓는 자작농이었다. 그럼에도 운동권 선배들의 강압적인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12년 주입식 교육의 폐해’ 때문이었는지, 이에 대해 신입생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왜 북한은 혁명적 농지개혁에 성공했는데 남한은 동일한 여러 조건을 갖추었으면서도 북한과 같은 농지개혁에 실패했나?”(강정구, ‘남북한 농지개혁 비교연구’, 1990)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논문이 학술지에 실린 것을 보면, 이는 일부 운동권만의 ‘망상’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남북한 토지(농지)개혁의 성패는 적어도 1980~1990년대 남한 지식인들의 뇌리에는 사실과는 정반대로 ‘주입’되었고, 그들 중 일부는 그때 주입된 ‘가짜 정보’를 아직도 바로잡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 토지개혁 포스터. 북한은 농민에게 토지 소유권을 무상 분배하는 것처럼 선동했지만, 농민이 실제 분배받은 것은 매매·저당·상속이 불가능한 경작권에 불과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반도 반만년 역사 동안 농민의 꿈은 ‘자기 땅’에서 농사를 짓는 것이었다. 1946년 김일성의 임시인민위원회는 ‘무상몰수·무상분배’ 토지개혁을 통해 마치 그 꿈이 실현된 것처럼 ‘거짓 선동’했다. 그러나 북한이 지주에게서 땅을 빼앗은 것은 사실이었으나 농민에게 분배한 것은 ‘매매·저당·상속’이 불가능한 ‘경작권’에 불과했다. 게다가 매년 수확량의 25%를 현물세로 받아 갔다. 비유하자면, ‘서울 자가(自家) 아파트’가 꿈인 서민들에게 ‘영구임대아파트 입주권’을 나눠주고 해마다 소득의 25%씩을 임대료로 징수해 가면서도, 정작 ‘서울 아파트는 서민의 것!’이라는 달콤한 구호로 진실을 호도한 셈이었다.

더욱이 1954~1958년 ‘농업 집단화’로 북한 농민들은 경작권마저 ‘협동조합’에 반강제로 넘겨야 했다. 농민의 ‘자본주의적 소유욕’은 충족시켜 주지 못했을지언정 결과라도 성공적이었느냐면, 간신히 버텨가던 북한 농업은 1994년 ‘고난의 행군’으로 완전히 붕괴해 세계 최빈국 수준으로 전락했다. 이처럼 계획부터 결과까지 북한의 토지개혁에서 ‘성공’이라 평가할 부분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다.

그에 반해 남한에서는 농지개혁 이전 총경작지의 35%에 불과했던 자작지가 이후 92~96% 수준으로 증가했다. 또한 1948년 남한 인구의 70.9%가 농민이었고, 그중 80% 이상이 소작농 또는 자소작농이었지만, 농지개혁 이후에는 원칙적으로 모든 농민이 자작농이 됐다. 분배받은 권리도 ‘매매·저당·상속’이 모두 가능한 ‘순도 100% 소유권’이었다. 그 덕분에 대부분의 농민들이 1960년대 이후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돼 가난에 허덕였을망정, 땅을 팔아 자식들 공부시키는 것도, 도시의 확장 과정에서 자기 소유의 농지가 수용되거나 용도 변경돼 ‘인생 역전’의 기회를 얻는 것도 가능해졌다.

‘유상’이라고 하나 남한 농민의 농지 대금 상환 조건은 ‘무상’이라고 호도한 북한보다 오히려 나았다. 1949년 4월, 국회를 통과한 농지개혁법은 정부가 3정보(9000평) 이상 농지를 소유한 지주에게 연평균 생산량의 150%에 해당하는 지가증권을 주고 매수하고, 농지를 분배받은 농민은 생산량의 125%를 매년 25%씩 5년에 걸쳐 균등 상환하게 했다. ‘경작권’을 분배받은 북한 농민은 현물세 25%를 영구히 부담해야 했지만, 남한 농민은 같은 수준의 상환 대금을 5년만 납부하면 농지의 등기를 넘겨받을 수 있었다.

농지개혁 당시 발행한 지가증권. 정부는 재정 부담을 덜기 위해 지주들에게 농지 매수 대금을 현금 대신 지가증권으로 지급했다. 귀속재산 대금 결제 수단으로 이용 가능해서 6·25전쟁 이후 대부분 헐값으로 매각됐다. /국사편찬위원회

그러나 실제 농지개혁은 1949년 4월 국회를 통과한 법안대로 추진되지는 않았다. 이승만 정부는 지주로부터 매수하는 가격과 농민에게 분배하는 가격 사이의 ‘차액 25%’를 정부가 부담하면 국가 재정이 어려워진다는 이유에서 그 차액 부분을 수정해 달라고 법안을 국회로 돌려보냈다. 사실상 거부권을 행사한 것이었지만, 같은 해 6월 15일 국회는 재표결 끝에 원안대로 법안을 확정했다. 국회와 정부는 그 후로도 1년 가까이 개정을 협의해 1950년 3월 10일 농민이 생산량의 30%씩 5년에 걸쳐 균등 상환하도록 함으로써 지주 보상과 농민 상환을 150%로 일치시킨 개정 농지개혁법을 공포했다.

남한의 농지개혁 성과를 폄훼하는 세력은 더 나은 개혁 방안을 찾기 위해 1년여 기간 국회와 정부가 협의한 것을 두고, 마치 이승만 대통령이 농지개혁 자체를 반대한 것처럼 거짓 선동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농지개혁을 반대하기는커녕 남한의 산업화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구축하기 위해 공무원들을 독려해 가며 이를 앞장서서 추진했다. 농지개혁은 민국당(한민당의 후신), 남로당이 반분했던 농민의 지지를 일거에 이승만과 대한민국으로 돌려놓은 이승만 정부의 정치적 승부수였다.

이승만 정부는 국회와 농지개혁법 개정을 논의하는 동안에도 농지개혁을 착실히 준비했다. 개정안이 통과된 직후 ‘속도전’으로 밀어붙여 1950년 3월에서 5월 사이 대상 농지 70~80%의 분배를 완료했다. 농지개혁의 혜택을 입은 농가는 전체 농가 240만 호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150만여 호에 달했다.

이렇듯 농민 대다수가 자기 땅을 소유하게 된 상태에서 6·25전쟁이 발발했다. 인민군이 남한 점령지에서 북한에서와 같은 토지개혁을 실시했지만, 전쟁 전 이미 농지를 분배받았던 대다수 농민들은 경작권밖에 주지 않는 ‘북한식 토지개혁’에 시큰둥했다. 더욱이 농지 재분배를 주도한 ‘붉은 완장 찬’ 머슴과 빈농이 양질의 논을 선점하는 등 농간을 부려 농민들로부터 더 큰 반발을 샀다.

6·25전쟁 기간 이승만 정부는 전시(戰時) 세수 확보를 위해 농지 상환금 외에도 ‘임시토지수득세’를 부과해 농민들이 생산한 식량의 절반 이상을 징수했다. 그럼에도 농민들은 “인민공화국 치하보다는 낫다”고 생각하고,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웠다. 남로당의 거짓 선동에 솔깃했던 농민을 확실한 대한민국 지지 세력으로 돌려놓은 농지개혁은 6·25전쟁 이래 대한민국을 지켜낸 견고한 방어벽이었다.

<참고 문헌>

강정구, 남북한 농지개혁 비교연구, 경제와 사회 제7권, 1990

권기돈, 오늘이 온다, 소명출판, 2022

김일영, ‘농지개혁을 둘러싼 신화의 해체’,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책세상,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