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책을 왜 읽는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숨도 안 쉬고 이렇게 대답하겠다. “생각하기 위해 읽는다.”
책은 생각하기 위해 읽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각은 왜 하는가? 다른 사람의 생각에 끌려다니며 살지 않기 위함이다. 내 생각, 내 철학으로 살아야 한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저렇게 사는 게 맞는다고 해도 휘둘리지 않고 나만의 기준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생각은 나와의 대화이다. 세상 사는 법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게 묻지 말고 나에게 물어야 한다. 인문 고전 철학의 마지막 질문이 ‘나는 누구인가?’로 귀결되는 이유다. 나와의 대화를 통해 스스로 존재 이유를 찾아야 한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로 세상에 태어났다. 자유의지가 있다. 하지만 생각, 즉 나와의 대화가 없어진 현대인들은 세상이 만든 기준에 끌려다니며 사는 경향이 있다. 생각이 왜 없어졌을까? 핸드폰 때문이다. 핸드폰은 오로지 자극적인 영상과 정보를 주입할 뿐이다. 핸드폰을 보면서도 생각은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우리 삶에 도움을 주는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좋은 생각은 깊이 있는 생각이다. 좋은 생각은 나도 몰랐던 내 안 깊은 곳의 나와 연결해 준다. 내 안에 잠들어 있는 거인을 깨워준다. 나는 그렇게 독서를 통해 ‘올해의 작가상’을 받을 수 있는 거인을 깨워낸 것이다.
생각하기 위해 책 속에 있는 거인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나 혼자 하는 생각은 당연히 지금의 내 수준에서 그 깊이가 멈출 수밖에 없다. 내가 성장하려면 나보다 훌륭한 사람의 책을 읽어 생각의 질을 높여야 한다. 세상을 손바닥에 올려놓을 정도의 높은 사유의 시선을 가져야 한다.
지난달 초 리처드 도킨스의 ‘눈먼 시계공’을 읽었다. 도킨스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과학자이자 베스트셀러 과학 저술가다. 우리나라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된 ‘이기적인 유전자’의 저자다. 그는 1987년 ‘눈먼 시계공’으로 ‘영국 왕립학회 문학상’과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문학상’을 동시에 받았다.
“육체 그 자체는(즉 죽었을 때에는) 환경과의 평형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경향이 있다. 살아 있는 생물의 체온, 산성도, 수분 함량, 전하(電荷) 따위를 측정해 보면 그러한 것들이 주변 환경과는 판이하게 다름을 알 수 있다. 가령 우리 몸은 대개 주변 환경보다는 따뜻하다. 추운 기후에서는 그 차이를 유지하기 위해 더 열심히 일을 한다. 우리가 죽으면 그 일은 중단되고 온도의 차이는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결국은 주변의 온도와 같아진다.” - ‘눈먼 시계공’에서
‘아, 죽는다는 건 주변과 온도가 같아지는 것이구나.’
들판에 있는 토끼가 생각났다. ‘토끼는 살아 있을 때 뜨겁다. 들판은 차갑다. 어떤 이유로 토끼가 죽는다. 토끼의 체온은 서서히 식어간다. 결국 차가운 들판과 온도가 같아진다. 죽는다는 건 온도가 같아지는 것이다. 육체뿐만이 아니다. 정신도 마찬가지다. 뜨겁지 않으면 몸이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다.’
이제 나를 돌아본다.
‘난 올해 1년 동안 얼마나 뜨거웠던가? 늘 하듯이 비슷하게 그저 주어진 일만 해 온 건 아닌가? 열정을 가지고 새로운 일에 뜨겁게 도전한 적은 있는가? 내가 여기에 있는지 아무도 모르게 미지근한 온도로 존재했던 건 아닌가?’
한 달이 넘도록 이런 생각들이 운전할 때마다, 차가운 들판을 볼 때마다 내 의식을 점령한다. 이런 때는 음악도 틀 수 없다. 생각의 나무가 자라 우주로, 세상에서 가장 높은 그곳까지, 동화 ‘잭과 콩나무’의 콩나무처럼 한없이 자라 오른다. 이럴 때 ‘내가 성장하고 있구나’ 하고 느낀다. 책을 읽는 시간보다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야 한다. 독서량보다 생각의 양이 많아야 한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안도현의 시 ‘너에게 묻는다’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언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안도현의 시 ‘연탄 한 장’
안도현 시인의 ‘외롭고 높고 쓸쓸한’ 시집을 읽으며 2026년은 뜨거워지겠다고 다짐한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날에 남을 위해서 눈을 치우는 내가 되고자 한다. 남을 위하는 뜨거운 마음과 눈을 치우며 뜨거워지는 내 몸이 하나가 되면 2026년은 뜨거워질 것이다. 시인은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이라고 알려준다. ‘남’이라는 글자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ㅁ’이라는 단 위에 ‘나’를 올려놓은 글자가 ‘남’이라는 글자다. 결국 ‘나’는 ‘남’을 통해 높아지고 완성된다. 인간은 나보다 남을 위할 때 뜨거워진다. ‘남을 위하는 마음’이 바로 사랑이다. AI가 대체할 수 없는 것이 뜨거운 사랑이다. 로봇은 눈물의 의미를 모른다. 눈물은 뜨겁다. 눈물은 사랑하는 마음이다.
2026년을 뜨겁게 맞이하자. 남을 위해 기꺼이 눈물을 흘릴 수 있는 뜨거운 가슴을 가져보자. 핸드폰을 던지고 뜨겁게 책을 품어보자. 독자 여러분께 겨울이 뜨거워질 수 있는 고전을 하나 추천한다. 바로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다. 안나 카레니나는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나름의 이유로 불행하다”는 첫 문장으로 유명한 고전이다. 그런데 이 첫 문장 전에 나오는 책의 제사(題詞·책 첫머리에 책과 관계되는 노래나 시 따위를 적은 글)에 이런 글이 나온다.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겠다.’
신약 성경 로마서 12장 19절 말씀이다. 로마서 12장을 찾아보니 마지막 21절은 이렇게 끝맺는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악을 악으로 이길 수 없다. 원수에게 복수로 갚을 수 없다. 결국 필요한 것은 사랑이다. 복수로 갚을 수 있다면 복수는 계속해서 복수를 부를 것이다. 어디에선가는 복수를 멈춰야 한다. 그때 필요한 것이 사랑이다. 뜨거운 사랑이다. 우리 속담에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고 한다. 위대한 철학이다. 미운 놈에게 복수하지 않고 떡 하나를 줄 수 있는 마음은 사랑이다.
사랑을 베풀 때 가장 행복한 사람은 나 자신이다. 미운 놈에게 시비 걸고 욕하고, 싸우면 속이 후련하고 행복한 결과가 생기지 않는다. 오히려 싸움은 반복되고 내 삶은 피폐해질 뿐이다. 선을 베푼다는 것은 남을 사랑함으로 내가 행복해지는 원리다. 나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복수심을 참을 수 있고 관대한 마음으로 선을 베풀 수 있다.
안나 카레니나는 인간의 모든 감정을 건드려 준다. 톨스토이의 인물 묘사와 이야기 전개는 너무도 탁월하여 읽는 내내 등장인물들에게서 내 모습을 발견하고 깜짝깜짝 놀라게 된다. 그 놀라는 순간에 우리 뇌는 저절로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인간의 마음속엔 선과 악이 공존한다. 자칫 방심하면 악이 선을 이길 수 있는 유혹이 넘쳐나는 시대다. 고전은 방황하는 우리로 하여금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나침반이자 등대이다.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힘들수록 고전에 기대어 어려운 길을 헤쳐 나가자.
◆ 눈먼 시계공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가 생명 진화 미스터리에 대해 해설한 책. 생명의 정교함이 신의 설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연 선택 과정의 결과라고 설명한다. 변이는 무작위적으로 발생하지만 환경에 적합한 개체가 살아남는 과정은 우연이 아니며, 이러한 누적된 선택이 오늘날의 생명을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도킨스는 이 책으로 1987년 ‘영국 왕립학회 문학상’과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문학상’을 받았다.
◆ 안나 카레니나
레프 톨스토이의 장편소설. 사랑과 결혼, 도덕과 사회 규범이 충돌하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주인공 안나 카레니나는 남편이 있는 상류층 여성이지만, 젊은 장교 브론스키와 사랑에 빠진다. 그 선택으로 안나 카레니나는 내적 갈등과 사회의 냉혹한 비난에 시달리다 끝내 비극적 결말을 맞는다. 이와 대비되는 성실한 지주 레빈의 삶을 나란히 그리며, 톨스토이는 진정한 행복과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는다.
※그동안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