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공기업에 다니는 박모(32)씨는 최근 자신을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라고 강하게 의심하고 있다. 박씨는 “병원에서 진단받은 적도, 어린 시절 관련 지적을 받은 일도 없어 지금까지는 생각 못 했다”면서도 “얼마 전 ‘ADHD 탈출을 도와준다’는 한 온라인 광고를 보는데, 거기 나온 성인 ADHD 관련 증상 대부분이 나한테 해당되더라”고 했다.

박씨가 본 광고는 이렇다. ‘회사에서 똑같은 실수로 매번 혼난다. 아침에 맨날 지각해서 항상 택시 타고 회사 간다. 충동 구매가 너무 심해서 돈이 없다. 머릿속에 생각이 너무 많아서 집중이 잘 안 된다. 방이 너무 더럽다고 매일 잔소리 듣는다…. 이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ADHD 때문이다.’

박씨는 “일하다 말고 시시때때로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소셜 미디어에 물건 광고가 뜨면 필요 없어도 결제하는 일이 많았다”며 “그동안은 자책만 해왔는데, 문득 내가 ADHD일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박씨뿐 아니다. 그간 ‘산만하고 충동적인 아이’의 대명사로 여겨졌던 ADHD를 자처하는 경우가 크게 늘고 있다. 특히 성인에게서 이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몇 년 사이 방송을 통해 아이뿐 아니라 성인도 ADHD일 수 있으며, 특히 과잉 행동이 잘 드러나지 않는 ‘조용한 ADHD’도 있다는 사실이 공개되면서다. 그러다 보니 온라인 커뮤니티상엔 ‘패션 ADHD’ ‘ADHD호소인’ 같은 말도 생겨났다. 제대로 된 검사 없이 온라인 자가진단 정도로 스스로 ADHD라고 말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패션에 빗댄 것이다.

◇성인 ADHD 환자 역대 최다

실제 국내 ADHD 환자는 매년 크게 증가하는 추세다. 그중에서도 성인 ADHD 환자 급증세가 두드러진다. 2020년 2만5297명이던 성인 ADHD 환자는 지난해 12만2614명으로 늘어나면서 처음으로 10만명을 넘어섰다. 같은 시기 10대 이하 미성년 환자가 5만3947명에서 13만7720명으로 약 2.6배 늘어난 것과 비교해, 성인 ADHD 환자는 4.9배로 증가 폭이 훨씬 가파르다.

전문가들은 그 배경으로 성인 ADHD에 대한 높아진 사회적 인식을 꼽는다. 특히 방송을 통한 연예인들의 ADHD 고백은 성인 ADHD에 대한 심리적 장벽을 낮추는 계기가 됐다. 소개팅한 사람을 기억 못 해 같은 사람과 두 번 만나는 등 “심한 건망증으로 힘들었다”는 방송인 박소현, 선글라스를 매번 잃어버려 일주일 이상 사용해 본 적 없다는 배우 황보라 등이 대표적이다. 과거 개그맨 이경규나 김구라의 고백으로 공황장애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과 마찬가지다.

과거 한 방송에서 심각한 건망증을 겪고 있다고 밝힌 방송인 박소현./채널A

정신과 전문의인 나해란정신건강의학과 나해란 원장은 “예전엔 ‘내가 원래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다면, 이제는 의사가 발견하기 전에 ‘문제가 있다’고 먼저 생각하고 자발적으로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졌다”면서 “진단이 늘어난 것도 있겠지만, 어떤 측면에선 실제 ADHD가 발생하는 일이 많아졌다고도 볼 수 있다”고 했다. 학계에서 신경 발달학적 문제로 보는 ADHD는 어렸을 때 나타나더라도 뇌가 발달하거나 점차 사회 환경에 적응하면서 좋아질 수 있다. 그런데 뭐든 기다리지 않고 바로 답이 오는 사회, 내 맞춤형으로 구현되는 온라인 생태계, 단편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숏폼 콘텐츠 등은 뇌가 끈기를 가지고 충동성을 절제하거나 인내심을 배울 필요가 없게 만든다. 나 원장은 “ADHD 개선을 도울 수 있는 사회 문화적 환경이 점차 줄어들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도둑맞은 ADHD

문제는 ADHD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제대로 된 진단도 받지 않고 온라인에 떠도는 설문 몇 개만으로 스스로를 ADHD라 규정하는 일도 많아졌단 점이다. 서울 4년제 사립대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는 조모(20)씨는 “올 초 룸메이트가 하도 방을 안 치워 조심스레 얘기했더니 처음엔 ‘미안하다’고 하다가, 어느 순간 ‘내가 ADHD라 어쩔 수 없다’고 하더니 아예 치우려는 노력도 하지 않더라”며 “알고 보니 인터넷에 나오는 자가 검진으로 스스로 ADHD라고 생각한 거였다”고 했다.

서울 강남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김모(51)씨 역시 최근 20대 중반 아르바이트생에게 지각 문제를 지적했다가 같은 답을 들었다. 김씨는 “제대로 된 사과도 없이 ‘사실은 내가 ADHD’라고 하더니 돌연 후임을 구할 시간도 없이 그만두더라”며 “일 구하기 전엔 아무 말도 안 하다가, 마치 이를 본인 잘못을 방어하는 수단으로 쓰는 것 같아 당황스러웠다”고 했다. 온라인상에서 ‘패션 ADHD’ ‘ADHD 호소인’이란 조롱이 나오는 이유다.

서울대 정신건강센터에서 근무하는 김은영(43)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스마트폰 중독, 과도한 미디어 노출, 게임 등이 주의력을 확실히 떨어뜨리기 때문에 실제 ADHD가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이 집중력과 주의력 저하를 겪고 있다”며 “그런데 일단 원인을 잘 모르거나 자각을 못 하니, 집중력과 주의력이 저하된 현상만 보고 스스로 ADHD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진짜 치료가 필요한 ADHD 환자들 사이에선 “ADHD를 도둑맞았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10대 후반 ADHD 진단을 받고 여전히 약을 복용 중이라는 20대 취업 준비생 A씨는 “언제까지 약을 먹어야 할까 고민하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발버둥치는데, 최근엔 ADHD를 단순히 잘못을 덮기 위한 방패로 쓰거나 자신을 조금 특별하게 보이고 싶어 하는 용도로 남발하는 것 같아 자괴감이 든다”고 했다.

◇집중력 높이는 약, 오인도

ADHD 약이 ‘집중력 높이는 약’으로 둔갑해 품귀 현상을 빚으면서 정작 필요한 사람에게 약이 가지 못하는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대표적인 ADHD 약인 콘서타(성분명 메틸페니데이트)는 지난해 4월부터 공급 부족을 겪어왔다. 2020년 14만3471명이었던 메틸페니데이트 처방 환자 수는 지난해 33만7595명으로 2.4배가 됐다.

시내버스에 게재된 ADHD 치료제 오남용 경고 광고./식약처

올 하반기 공급이 재개됐지만, 수요 급증 추세가 여전해 공급에 차질을 빚을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콘서타는 카페인보다 훨씬 강력한 각성제로 작용하며, 주의력 결핍 환자의 집중력을 높이고 과잉 행동과 관련된 감정 조절 문제를 개선해 충동성을 조절한다. 이런 특징이 ‘집중력 높이는 약’ ‘공부 잘하는 약’으로 오인된 것이다. 식약처가 지난해 10대 환자들의 ADHD 약 처방이 많은 지역을 꼽아 보니, 교육열이 높은 서울 강남·서초·송파 등이 상위권에 꼽혔다. 중·고교생들이 인위적으로 집중력을 높이려고 무리하게 처방받은 것으로 추정하는 이유다.

김 교수는 “ADHD 약은 집중력이 떨어진 모든 사람을 위한 보조제가 아니다”라면서 “오·남용할 경우 두근거림, 혈압 증가, 손 떨림 등 심혈관계 부작용이 생길 수 있고 오히려 과도한 각성 상태로 인해 불안과 예민함, 초조함, 불면 등의 문제가 나타날 수 있다”고 했다.

또 주의력과 집중력 저하는 거의 모든 종류의 정신 질환에서 동반되는 증상으로, 정신 질환까지는 아니더라도 불면이나 과로, 스트레스를 지속적으로 받는 경우에도 ADHD 유사 증상을 보일 수 있다. 그럼에도 집중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무턱대고 ADHD 약을 계속 먹으면 수면 부족이나 번아웃, 만성 스트레스, 우울증이나 불안 장애 등 집중력 저하의 근본 원인을 파악하지 못해 오히려 문제가 더 만성화될 수 있다.

김 교수는 “학교에서도 시험 기간만 되면 집중력이 떨어진다면서 ADHD인 것 같다고 찾아오는 학생이 늘어난다”며 “만약 스스로 의심이 된다면 스트레스나 수면 부족처럼 흔하지만 놓칠 수 있는 요인을 먼저 점검해 보고, 그래도 필요하다면 반드시 전문의를 찾아 적절한 진단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