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개인 정보가 수시로 유출돼 길거리에 나뒹군다. “개인 정보는 범죄용 공공 정보”라는 자조 속에 국민 불안은 극에 달하고 있다. 유통 플랫폼 쿠팡 고객 3370만명의 정보가 유출되자, 시민단체들이 지난 3일 서울 송파구 쿠팡 본사 앞에서 항의 퍼포먼스를 벌이는 모습. /뉴스1

서울 마포구의 권모(44)씨는 최근 하교하는 초등학교 3학년 아들과 집에 가다 아이의 같은 반 친구를 만났다. “우린 요 앞 골목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넌 어느 아파트에 사니?”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 “개인 정보라 말 못 하겠는데요.”

그는 당황했다. 웃어야 할지, 사과해야 할지. 하지만 “요즘 개인 정보를 이용한 범죄가 워낙 기승을 부리니 어릴 때부터 철저히 교육하는 게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권씨 역시 이달 초 쿠팡의 개인 정보 유출 사태 이후 광고 스팸 문자와 보이스피싱으로 의심되는 전화가 늘자 쿠팡을 탈퇴하고 현관과 이메일 비밀번호, 해외 직구용 개인통관부호까지 싹 변경한 참이었다.

올해 국내의 개인 정보 유출 건수가 6000만건을 넘어섰다. 대기업들 공식 발표치만 집계한 것으로, 모든 국민이 한두 번씩은 피해를 본 셈이다. “개인 정보가 공공 정보가 됐다” “너무 많이 털려 자포자기 상태”라는 말이 나온다. 모든 일상 속 타인에 대한 의심과 불안도 만성화되고 있다.

연예인 주소·본적 공개하던 시절

정보가 개인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보루라는 인식이 생긴 건 최근 10~15년의 일이다. 그럼 그전엔? 내가 어디에 소속돼 어떤 삶을 사는지를 깔끔하게 정리한 정보를 공인받고 알리는 일은 근대화된 조국을 사는 국민의 교양이요, 자랑스러운 권리였다.

요즘 부쩍 회자되는 1980~1990년대 생활상은 이렇다. 정부가 배포하는 전화번호부 인명편에는 각 세대주의 이름과 주소·전화번호가 빼곡히 인쇄됐다. 아버지 명패를 대문에 달았던 시절, 새 전화번호부가 나오면 우리 집 번호가 제대로 나왔는지 찾아보고 전국의 동명이인에게 전화를 걸어 인사하기도 했다.

가나다순으로 전국 세대주별 주소와 전화번호가 적힌 전화번호부. 정부가 2008년까지 발행했다. /인터넷 커뮤니티

실명 전화번호부는 2008년 발행 중단됐지만, 일부 농어촌 지역에선 수년 전까지도 주민 전화번호부를 만들었다. 2010년 이전 대부분의 학교 졸업 앨범엔 학생과 교직원의 주소와 전화번호, 주민등록번호가 적혔다.

증권회사에선 다른 고객의 매매 현황을 직원에게 물어볼 수 있었다. 그래서 ‘주식 투자 잘하려면 증권사 객장에 죽치고 앉아 있어야 한다’고 했다. 병원 대기실엔 모든 환자의 질병명과 치료비가 펼쳐져 있었다.

중고차 매매업자는 이전 차주의 직업과 나이를 고객에게 알려줬다. 자동차 번호판엔 운전자의 지역이 표기됐다. “이웃끼리 숟가락이 몇 개인지도 알고 지낸다”는 게 빈말이 아니었다.

서울에 사는 70대 임모씨는 “옛날에도 나쁜 사람들은 있었다. 마당에 세워둔 아동용 자전거를 보고 ‘이 집 아이가 크게 다칠 팔자니 부적을 쓰라’는 사기꾼에게 넘어가기도 했다”면서도 “하지만 널려 있는 개인 정보가 범죄에 악용될 거란 생각은 못 했다. 그런 기술이 없었다”고 회상했다. 50대 회계사 박모씨는 “2000년대 초반까지 고향과 학벌, 나이, 가족 관계를 대놓고 물어봐도 결례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신문의 독자 의견란엔 독자 이름과 나이, 집 주소가 나왔다. 범죄자나 물의를 일으킨 유명인의 주소도, 범죄 피해자의 실명과 소속도 기사에 적었다.

10~20대가 보는 잡지엔 주기적으로 인기 연예인 주소록이 총망라됐다. 여기 올라야 ‘스타 인증’이 됐다. 그 주소로 팬레터와 종이학을 보냈다. 레코드판 앨범 뒷면엔 가수가 다닌 학교와 본적, 주민등록번호가 적혔는데, 왜 그런 것까지 알렸는지는 미스터리다.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된 '1993년 인기스타 주소록'. 당시 유명 연예인들의 집주소가 상세히 나와 있다. 여기로 팬레터나 종이학을 보낼 수 있었다. 동호수 등은 모자이크 처리했다. /인터넷 커뮤니티

빈부 격차, 정보화, 불법 체류자

‘순박한 시대’가 막을 내린 건 1997년 IMF 사태로 경제가 망가져 빈부 격차가 커지고 범죄가 급증하면서다. 동시에 정보화로 인터넷 사용자가 급증하며 해킹과 바이러스 유포, 인터넷 사기 등 ‘정보 범죄’라는 카테고리가 생겨났다. 2000년과 2001년 사이에만 개인 정보를 이용한 사이버 범죄가 10배 넘게 폭증했다. 사이버경찰청이 생기고 기업들이 ‘최고보안책임자’ 같은 보직을 만든 게 이때다.

정보 범죄의 지능화·조직화는 당시 대거 유입된 외국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안보 전문가 윤모씨는 “1990년대 말부터 불법체류 외국인 조직을 중심으로 돈세탁, 화폐위조, 인신매매, 보이스피싱, 산업스파이가 급증했다”고 했다. 2011년에야 개인정보보호법이 제정돼 개인 정보 무단 수집·이용이 제한됐지만, 이미 범죄의 큰 장이 선 뒤였다는 것이다.

신용카드사와 통신사, 유통업체가 수집한 개인 정보가 연이어 유출됐다. ‘부산 돌려차기’ 사건 피해자의 주민등록번호와 주소가 소장에 적시돼 피고에게 송달돼 2차 가해를 당했고, SNS 속 교사들 사진을 합성해 능욕하는 ‘n번방 여교사방’ 사건, AI 딥페이크로 가족 목소리와 얼굴을 흉내 낸 보이스피싱과 스토킹 사건이 알려지며 대중은 극도로 예민해졌다.

지난 9월 필리핀으로 도피했던 보이스피싱 사범 피의자들이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송환되고 있다. 주로 외국인 조직과 연계된 보이스 피싱 범죄 피해액은 매년 최고치를 경신 중이다. /뉴시스

경기도 동탄의 회사원 이모(37)씨는 “올 초 GS리테일을 시작으로 SK텔레콤·쿠팡에 이르기까지 개인 정보 유출 통보만 5~6개 받았다. 다 내놓고 사는 기분”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유출이 하도 흔하니 이제 기업들은 해커들에게 ‘범죄 종합선물세트’를 내주고도 죄책감도 안 느끼는 것 같다”며 “정부도 사고 터지면 과징금 장사만 할 뿐 근본적 대책을 안 세운다”고 했다.

대책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의심뿐이다. 일단 이름부터 숨긴다. 식당과 골프장에 가명으로 예약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서비스 직원들도 가명을 쓴다.

2023년 수능 감독을 맡은 교사가 부정행위자를 적발하자, 명찰 속 이름을 추적한 학부모가 근무지로 찾아가 1인 시위를 했다. 이듬해부터 모든 수능 감독관에게 이름표 대신 일련번호가 부여됐다.

관공서들은 실명과 직함이 적힌 명찰·명패나 조직표를 없애는 추세다. 서울교통공사는 “악성 민원과 범죄를 차단하겠다”며 지난 15일부로 지하철 역무원 명찰을 일제히 폐기했다.

학교들은 교복의 고정 부착식 이름표를 탈착식으로 바꾸거나 아예 없애고 있다. 서울 강남의 40대 학부모 김모씨는 “요즘 대치동 일대에선 공들여 독특하게 지었던 자녀 이름을 학령기 이후 흔한 이름으로 개명하는 게 유행”이라고 전했다. 아이들 일상이 학원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만큼, 각종 레벨테스트와 수상·합격 공지 때마다 노출되는 신상을 되도록 흐리겠다는 것이다.

국내 1위 유통 플랫폼 쿠팡이 대규모 고객 정보 유출 사태에도 책임을 회피해 공분을 사는 가운데, 지난 17일 해롤드 로저스 쿠팡 임시 대표가 국회 청문회에 출석해 증인 선서하는 모습. 통역의 도움을 받아가며 동문서답 하거나, 자신의 개인 정보는 못 밝히겠다고 해 논란을 일으켰다./남강호 기자

이름 감추고 주민번호 바꾸고

졸업 앨범에서 교사들 이름과 얼굴은 사라진 지 오래다. 원하는 학생들 사진만 담긴 앨범은 반별로 소량 제작하기도 한다. 중고 장터에서 옛날 졸업 앨범이나 전화번호부가 현재 수십만원에 거래되는데, 이걸 갖고 흥신소들이 현 주거지와 직장을 알아낸다고 한다.

고급 개인 정보의 결정판인 동창회나 직능 단체 명부, 교회 교인 명부 역시 “사진 내려달라” “나는 빼달라”는 요청이 많아 속속 발행을 중단하고 있다.

휴대폰 번호는 ‘기밀’ 수준이다. 주차한 차량에 차주의 휴대전화 번호 대신 중계 서비스로 연결하는 안심번호나 QR 코드를 올려두는 게 유행이다. 이런 판에 동료나 지인의 연락처를 허락 없이 제삼자에게 알려줬다간 소송당할 각오를 해야 한다.

정보 유출 피해를 보았다며 주민등록번호를 바꾸는 사람도 늘었다. 주민번호 변경 신청 제도는 2014년 신용카드 3사의 정보 유출을 계기로 도입됐는데 올해 처음 2000건을 돌파했다.

의료 기관에서의 개인 병력 유출도 민감하다. 한 요양병원 관계자는 “요즘은 병실 문이나 침대 앞에 환자 이름·나이·병명·식이 조건 등을 명시해 붙였던 식별표를 안 붙인다. 환자와 보호자들이 직접 떼버리는 일이 많았다”고 했다.

택배 상자를 버리기 전 송장에 인쇄된 개인 정보를 쉽게 지울 수 있는 '개인 정보 지우개'가 불티나게 팔린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법원·경찰서 등 공공기관과 학교·학원, 병원·약국에선 환경 보호를 위해 장려되던 ‘이면지 활용’을 꺼리고 있다. 개인 정보가 담긴 공문서와 성적표, 검사결과지와 처방전 뒷면을 쓰다 문제 되는 경우가 많아서다. 택배 송장의 잉크를 지우는 ‘개인 정보 지우개’가 불티나게 팔리고, 파쇄기와 파쇄 전문 업체 수요도 급증한다.

‘개인 정보 보호만큼은 아무리 예민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공감대가 생기자, 공인들이 그 뒤에 숨기도 편해졌다. 인사청문회 대상자나 공직자가 가족·재산 등 석연치 않은 전적에 대해 “개인 정보”라며 공개를 거부하는 일이 잦아졌다.

소년범 전력이 보도돼 은퇴한 배우 조진웅과 관련, 방송인 김어준씨는 “미성년자의 개인 정보를 기자가 얻은 것은 수사 대상”이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