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원에게 연말은 설레기보다 두렵고 불안하다. 초년생 시절에는 소문을 듣고 수군거리는 게 다였지만 이제는 당사자다. 이 모든 게 나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내가 선택했고 아무도 등 떠밀지 않았다. 스무 살 무렵 읽은 ‘그리스인 조르바’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라는 말이 나왔다. 생각해 보면 나는 자유를 원한 적이 없고 속박돼 안전해 보이는 삶을 늘 원했다. 나보다 경력도 직급도 훨씬 앞선 선배는 창끝에 서 있었다. 날이 추워졌고 선배의 집 근처 곱창집으로 약속이 잡혔다. 편하게 보자는 말이 오고 갔다. 하지만 동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는 궁지에 몰린 작은 짐승처럼 손발 끝이 저려왔다.
약속을 위해 강동으로 가는 길에는 새로 생긴 아파트 단지가 줄줄이 이어졌다. 거대한 성채처럼 벽을 높게 세우고 군림하듯 세상을 바라보는 차가운 불빛이 흘러나왔다. 두꺼운 외투를 입은 사람들 여럿이 버스에서 내렸다. 천호대로를 사이에 두고 길동주민센터 건너편으로 걸어갔다. 살짝 비탈진 언덕을 올라가 오른편 골목으로 꺾었을 때 빨간 배경에 흰 글씨로 쓴 간판이 나타났다. 가게 이름은 ‘대방양곱창구이’였다. 길 위로 풍겨 나는 고소한 냄새에 눈을 감아도 무엇을 파는 곳인지 알 수 있었다.
가게 밖 투명한 유리 너머로 비치는 모양새만으로도 역시 누가 앉아 있는지 가늠이 됐다. 가게 안은 밝고 환했다. 무엇보다 손님을 반기는 노부부 내외의 인사가 마치 오랜 단골을 다시 본 듯했다. 자리에는 이미 찬이 깔려 있었다. 국물이 자작하게 깔린 파김치와 총각김치, 생간과 천엽, 참기름 종지가 무심히 놓였는데 하나하나 유심히 보면 색과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핏빛 생간과 하얗게 주름진 천엽을 참기름에 찍었다. 쇠를 핥는 것처럼 금속성 맛이 찌르르 느껴졌다. 씹으면 살과 피에서 비롯된 단맛이 새어 나왔다. 장식 없이 칼로 툭툭 베고 자른 날것을 먹으면 말과 행동에 가식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소설 속 장수처럼 술잔을 가볍게 가지고 놀았다.
푸른 돌판이 달궈졌다. 먼저 붉은 소염통이 나왔다. 핏기가 가시면 바로 먹으라고 했다. 손님이 할 일은 부지런히 젓가락을 놀리는 것이었다. 질기기보다 쫄깃하고 육즙이 가시지 않은 통통한 염통이 빠르게 사라졌다. 그 후로 곱창이 올라왔다. 주인장 내외가 일일이 다듬은 곱창은 한눈에 보기에도 하얗고 깨끗했다. 주인장은 오고 가며 곱창을 뒤집고 잘랐다. 맑은 기름이 방울방울 맺혔다. 작은 한 토막을 입에 넣자 어른스러운 쌉싸름한 맛이 투박하지만 강하게 느껴졌다. 독주가 그 맛의 뒤를 이었다. 주인장은 어버이처럼 손님들의 주문에 귀를 기울여 놓치지 않고 소홀하지 않았다.
그 틈에 앉아 선배는 말했다. 집 근처 도서관이 있어 책을 빌려 읽으면 된다. 아침저녁 맨몸으로 뛰는 것도 즐겁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걱정스러운 마음은 온전히 후배의 몫이었다. 그 사이에 곱창전골이 나왔다. 여느 집과 다르게 미나리와 배추를 넣어 국물을 끓였다. 국물이 졸아들수록 시원하고 향긋한 맛이 공기 중에 퍼져갔다. 우동사리를 건지고 국물보다 더 많아 보이는 곱창 건더기를 따로 펐다. 마지막에 가서는 무김치를 잘라 넣은 볶음밥까지 해 먹었다. 새콤한 김치가 아삭아삭 씹히는 볶음밥을 먹고 나서야 사람들은 허리를 펴고 식탁에서 조금은 멀어질 수 있었다. 주인장 내외는 저녁 장사를 하는 이들 같지 않게 끝까지 해맑은 웃음으로 손님을 대했다. 선배는 많이 먹지도, 취하지도 않은 것 같았다. 맑은 눈동자로 여러 번 조르바처럼 ‘자유’라고 말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기에 두렵지 않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내 뒤에서 스스로 옭아맨 사슬이 요란스럽게 철컹거리는 것 같았다. 마침내 값을 치르며 나가는 선배의 뒤에는 아무것도 없이 너른 밤하늘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선배는 여전히 회사에 남아 있다. 매인 것은 선배가 아니라 회사인 것처럼 보인다. 바뀐 것은 없다. 선배는 여전히 읽고 뛴다. 노부부 내외는 골목에 불을 밝히며 저녁 장사를 이어간다. 그들은 커다란 배처럼 흔들릴지언정 가라앉지 않는다.
#대방양곱창구이: 곱창구이 2만8000원, 곱창전골 2만5000원, 모두 2인분부터 주문 가능. 02-485-43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