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은 적의 후방에서 주요 시설 파괴, 무기와 물자 탈취, 인명 살상 등을 도모하는 유격대, ‘파르티잔(partizan)’을 우리식으로 발음한 단어다. 중국 국민당에서 ‘공산 게릴라’를 일컬을 때 쓰던 ‘공산 비적(匪賊·무장을 하고 떼를 지어 다니면서 사람들을 해치는 도둑)’의 줄임말 ‘공비(共匪)’와도 같은 말이다. 해방 이전 주로 중국과 소련 땅에서 활약하던 ‘빨치산’은 1948년 초 남로당의 ‘단정(單政)·단선(單選) 반대 투쟁’을 계기로 한국 땅에도 등장했다. ‘빨간(공산당) 치(무리)들’이 지리산·오대산·태백산 등 ‘산’에 똬리를 틀고 암약했기 때문에 이들을 일컫는 ‘빨치산’은 마치 순우리말인 것처럼 오해되기도 했다.
1948년 초 남로당은 ‘단독 정부’(대한민국) 출범을 무력 투쟁으로 막기 위해 일본군·독립군 등 군사 경험이 있는 당원, ‘대구 10월 사건’ 등 각종 폭동에 가담해 군경에 쫓기던 당원 등을 중심으로 지방당에 ‘야산대(野山隊)’를 설치했다. 이들 지방당 빨치산은 흔히 ‘산(山) 사람’, ‘바닥 빨치’라고 불렸다. 야산대가 토대를 닦은 이후, 1948년 10월 여순사건을 일으킨 제14연대 반란군 잔당이 진압군에 쫓겨 지리산으로 입산했고, 뒤이어 국군에 침투한 남로당 세력을 숙청하는 숙군(肅軍)이 본격화되면서 이를 피해 탈영한 남로당 세포들이 지리산을 비롯한 경북과 강원 산악 지역으로 피신해 ‘산 사람’과 합류했다.
1948년 11월부터는 북한에서 훈련시켜 남파한 빨치산도 합세했다. 1949년 6월 ‘남·북로동당’이 합당해 출범한 ‘조선로동당’은 산하에 ‘인민 유격대’ 3개 병단을 편성하고, 강동정치학원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빨치산을 본격적으로 ‘남파’했다. 남·북로동당 합당 이후에도 ‘지방당’, ‘탈영’, ‘남파’ 등 출신과 관계없이 남한에서 활약한 빨치산은 대부분 박헌영계 남로당의 지령을 받았다.
‘인민 유격대’ 제1병단과 제3병단은 ‘남파 빨치산’, 제2병단은 ‘토착 빨치산’을 중심으로 조직됐다. ‘오대산 지구 제1병단’은 강동정치학원 출신 남파 빨치산 360여 명, ‘지리산 지구 제2병단’은 이현상을 총사령관으로 여순사건을 일으킨 제14연대 반란군 잔당, ‘태백산 지구 제3병단’은 제주 4·3사건의 주동자 김달삼을 총사령관으로 강동정치학원 출신 남파 빨치산 300여 명을 주축으로 편성됐다.
강동정치학원은 1947년 9월 남로당 간부 양성을 위해 평양 인근 평남 강동군에 일제강점기 탄광사무소와 합숙소를 개수(改修)해서 설립됐다. 미군정의 탄압으로 남한에서 체계적인 간부 양성이 어려워지자, 남로당은 지역당 초급 간부들을 월북시켜 강동정치학원에서 공산주의 이념 교육과 군사훈련을 3개월 정도 받게 한 후 다시 남파했다. 1948년 8월 해주에서 열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360명 선출을 위한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해주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월북했던 남로당과 좌익 인사 1000여 명 중 대의원으로 선출되지 못한 인사의 상당수가 강동정치학원에 입교했다. 1949년 남한에서 빨치산 투쟁이 격렬해지면서 강동정치학원은 빨치산 양성소로서 그 성격이 변했다.
‘조선로동당’ 출범 직후 남과 북이 별도 조직으로 운영됐던 ‘민주주의민족전선’도 ‘조국통일민주주의민족전선(조국전선)’으로 통합됐다. 조국전선은 ‘평화 통일 선언서’를 채택하고 미군 철수, 이승만 정권 타도, 통일 정부 수립을 요구하며 그 구체적인 실천 방안으로 1949년 9월에 ‘남북한 입법기관 선거’를 실시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조선로동당 외곽 조직인 조국전선의 일방적인 주장을 대한민국 정부가 받아들일 리 없었다. ‘9월 총선거’를 실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남로당이 ‘9월 공세’라 명명한, 빨치산 주도의 무력 투쟁뿐이었다. ‘평화 통일 선언서’가 발표된 직후, 남로당 서울시당은 각 지방당에 다음과 같은 지령을 하달했다.
“결정적 시기가 머지않아 도래한다. 각 지방당은 정권 접수를 준비하라. 모든 당 조직은 군사 조직으로 개편하고 결정적 투쟁을 전개하라. 돈 있는 사람은 돈을 바치고, 집 있는 사람은 집을 바쳐 무기를 준비하라. 통일 정권을 수립하면 은행 금고가 해방될 것이니 당원들은 4개월간 최저생활비를 제외한 전 재산을 7월 말까지 당에 바치라.”
1949년 초까지 국군 토벌대에 수세적으로 저항하던 각 지역 빨치산들은 ‘9월 공세’ 지령이 내려온 7월 이후 일제히 ‘아성(牙城·본거지) 공격’을 감행해 관공서·경찰서·군부대를 정면 공격했다. 그러나 ‘아성 공격’에 나선 빨치산들은 국군 토벌대의 반격을 받아 오히려 회생 불능의 타격을 입었다. 북한에서 10차에 걸쳐 남파한 빨치산도 오대산과 태백산 등 작전 지역에 미처 도달하기도 전에 국군의 공격을 받아 대부분 소탕됐다.
무기와 식량 보급이 끊긴 빨치산은 산간 마을을 습격해 비협조적 주민을 반동분자나 지주로 몰아 살해하거나 총칼로 위협해 식량을 털어갔다. 일부 지역에서는 “멀지 않아 해방이 된다. 인민공화국 치하가 되면 토지개혁을 해야 한다”며 토지 문서를 불살라 버리고, 토지를 소작인에게 분배했다. 그러곤 그 대가로 빨치산에 식량을 바칠 것을 강요했다.
국군은 1949년 10월 30일부터 이듬해 2월 28일까지 지리산·덕유산 등 빨치산 주요 거점을 포위하고 대대적인 ‘동계 토벌’에 나섰다. ‘비민(匪民·공비와 민간인) 분리’ 방식을 도입해 산간 마을 주민들을 소개(疏開)했다. 지리산 지구에서만 수십만 명의 주민이 소개됐다. 국군 토벌대의 대규모 공격으로 1950년 봄 ‘인민 유격대’ 3개 병단은 사실상 괴멸 상태에 빠졌다. 식량을 구하기 위해 민가를 습격하는 등 근근이 명맥만 유지하던 ‘지리산 지구 제2병단’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상하지 못한 패잔병들을 흡수해 ‘인민 유격대 남부군’으로 재편됐다.
적지 않은 국군 병력이 빨치산 토벌을 위해 지리산·오대산·태백산 지역에 발이 묶인 바람에 6·25전쟁 초기 38선은 속수무책으로 뚫렸다. 하지만 전면전에 앞서 후방의 적을 토벌해 둔 덕분에 박헌영이 호언했던 “20만 남로당 지하당원의 전국적 폭동”은 6·25전쟁 기간 단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리산에서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이 체포된 것은 6·25전쟁이 끝난 지 10년 후인 1963년이었다.
<참고 문헌>
김남식, 「1948~50년 남한 내 빨치산 활동의 양상과 성격」, 해방전후사의 인식 4, 한길사, 1989
양영조, ‘6·25전쟁 발발 전후 북한 게릴라의 활동과 성격’, 군사연구 제136호, 2013
이선아, ‘여순사건 이후 빨치산 활동과 그 영향’, 역사연구 제20호, 2011
정병준, 한국전쟁, 돌베개,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