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시흥시 ‘비닐하우스 트랙’에서 러너들이 질주하고 있다. 겉옷을 벗어둘 수 있는 탈의 공간 등을 갖췄고, 곳곳에 출입문이 있어 자주 환기가 가능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뿌린 대로 거둔다. 달리기는 정직한 운동. 결실을 얻으려면 한겨울에도 땀방울을 떨궈야 한다. 농사짓듯.

그리하여 비닐하우스가 설치되고 있다. 지난 9일 경기도 파주스타디움 육상 트랙에는 ‘농업용 고기능성 필름’이 찬바람에 휘날렸다. 실제 농촌에서 쓰이는 기성 비닐하우스 자재로 400m 트랙 전체를 감싸는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너무 추우니까. 파주시 관계자는 “러닝 붐이 일면서 겨울마다 운동장에 쌓인 눈을 치워달라거나 실내에서 뛸 수는 없느냐는 동호인들의 민원이 많았다”면서 “고민 끝에 작년부터 동절기에 한해 방한용 ‘비닐하우스 트랙’을 조성해 가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운영 기간 65일 동안 무려 3만명이 찾았다.

경기 시흥시 정왕동 축구장 옆 400m 육상 트랙을 둘러싼 비닐하우스 전경.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경기도 시흥시 정왕동 체육공원은 거대한 비닐하우스로 변신을 완료했다. 투명 패딩 옷을 껴입은 육상 트랙, 안쪽에 들어서자 공기가 푸근했다. 이날 저녁 6시 무렵 비닐하우스 안에는 이미 러너 20여 명이 질주하고 있었는데, 더러는 반바지 차림이었다. 한낮에는 땀이 줄줄 흐를 정도라 한다. 선수 훈련용으로 2018년 처음 도입했다가 2022년 일반 시민에게도 무료 개방하면서 주말에는 100여 명이 몰릴 정도의 명소가 됐다. 동네 주민 임덕순(54)씨는 “악천후에는 뛰기도 어렵고 자칫 낙상 사고를 당하기도 쉽다”며 “비닐하우스 덕에 계절에 관계없이 같은 환경에서 뛸 수 있어 루틴을 유지하기에 좋다”고 말했다.

‘전원일기’를 연상케 하는 K트랙의 탄생, 전국에서 잇따르고 있다. 파주·시흥시뿐 아니라 경기도 안산시, 충남 서산시·당진시에 이어 이달 중에는 경기도 의정부 종합운동장에도 비닐하우스가 들어설 예정이다. 별도의 장비 없이 태양 복사열로 내부 공기를 덥히는 단순한 원리만으로 한낮에는 바깥보다 10도는 더 따뜻해지는 효과. 날이 풀리면 철거 후 철골은 보관하고 매년 비닐만 새로 교체하는 식으로 활용된다. 한 러닝 동호인은 “겨울에 뛰면 폐가 얼어붙는 느낌이 있었는데 참신한 아이디어”라며 “3개월 정도 헬스장을 끊을지 말지 고민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고 했다. 러닝머신보다는 아무래도 땅의 감촉이 더 찰지기 때문이다.

경기 파주스타디움 내 육상 트랙에 비닐하우스 설치 공사가 한창이다. 오는 15일부터 내년 2월 15일까지 무료로 개방된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주말에는 러닝 클래스가 열리고, 엘리트 선수부터 일반인 크루까지 아우르는 핫플레이스로 소문이 나다 보니 먼 지역에서 달려오는 원정족(族)도 적지 않다. 각 시·군마다 “우리 동네에는 왜 없느냐”는 민원이 쇄도하는 배경이다. 한 충청권 지자체 관계자는 “다른 동네 예를 들며 종합운동장 트랙에 비닐하우스를 세워달라며 몇 년째 온라인 신문고를 두드리는 분이 계신데 예산 등의 애로 사항이 있어 섣불리 추진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며 “대체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지난 3월 전남 영암군 측은 영암실내체육관 복도에 240m짜리 육상 트랙을 설치했다. “날씨에 상관없이 뛸 수 있는 장소를 찾다가 복도라는 유휴 공간에 탄성 트랙을 깔았다”며 “시설을 확충해 향후 동계 전지훈련 유치에도 나서겠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여전히 부족하다. 경기 성남 탄천종합운동장 지하 트랙, 서울 잠실 종합운동장 제1수영장 실내 트랙, 인천국제공항공사 스카이돔 등 러너들은 겨울에도 두꺼운 겉옷 없이 달릴 수 있는 공간을 공유하며 신발끈을 조이고 있다.

한겨울에도 달리고 싶은 의지의 한국인을 위해 건물 실내 복도도 육상 트랙으로 변신했다. /영암군청

유의 사항이 존재한다. 주로(走路)에는 교통 규칙이 있다. 육상 트랙에서는 시계 반대 방향으로 달리는 것이 기본. 역주행은 충돌로 이어질 수 있다. 빨리 달릴 때는 안쪽 레인, 천천히 달리거나 걷고 싶을 때는 바깥쪽 레인을 이용하는 게 매너다. 상의 탈의는 집에서만. 한 비닐하우스 트랙 앞에 이런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침 뱉기 금지.” 더러울 뿐 거름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