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리아에즈 비루(とりあえず ビール)!” 한국어로 번역하면 “일단 맥주부터”로, 일본 전역에서 저녁이면 술집과 식당에서 흔하게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일본에서는 일행을 기다리거나 메뉴를 고르는 동안, 또는 본격적인 식사나 술을 주문하기 전 첫 잔으로 맥주를 마시는 문화가 자리 잡았다. 그만큼 맥주는 일본인이 가장 즐기는 술이다. 일본 알코올 소비의 60% 이상이 맥주다. 일본 사람들은 “맥주는 술이라기보다 인간관계를 매끄럽게 유지해주는 사회적 윤활유”라고 말한다.
◇日 맥주의 역사 ‘에비스 브루어리’ ‘긴자 라이온’
맥주가 일본에 처음 소개된 건 17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교역이 허가된 네덜란드 상인들이 들여왔다. 하지만 자신들이 마시기 위해서였지 일본인에게 팔려는 상품으로 가져온 건 아니었다.
일본에서 맥주 대중화는 19세기 중반부터다. 1870년 미국인 사업가 윌리엄 코플랜드가 ‘스프링 밸리 브루어리’를 요코하마에 설립했다. 일본 최초로 대중에게 맥주를 판매한 양조장이다. 1876년에는 일본 정부의 홋카이도 개척사(開拓使)가 삿포로에 ‘개척사 맥주 양조소’를 세웠다. 각각 기린맥주와 삿포로맥주의 전신이다. 아사히맥주는 1892년 출시됐다. 1957년에는 오키나와에서 오리온맥주가 생산되기 시작했고, 1963년에는 음료업체 산토리가 맥주 사업에 뛰어들었다. 아사히·산토리·기린·삿포로·오리온은 오늘날 일본 5대 맥주 브랜드다.
일본 맥주의 역사를 맛보려면 ‘에비스 브루어리 도쿄(이하 브루어리)’와 ‘긴자 라이온’으로 간다. 먼저 브루어리부터. 도쿄 에비스는 지역명 자체가 에비스맥주에서 비롯됐다. 본래 도쿄 외곽 허허벌판이던 이곳에 1890년 에비스맥주 양조장이 들어섰다. 맥주를 운송하기 위해 철로가 놓이고 역(驛)이 설치됐다. 1988년 양조장이 이전하면서 남은 빈터에 상가·식당·영화관·호텔 등을 갖춘 복합 공간 ‘에비스 가든 플레이스’가 들어섰다. 삿포로맥주는 여러 인수·합병 끝에 갖게 된 에비스맥주의 역사를 기리기 위해 이곳에 브루어리를 설립했다.
‘브루어리’ ‘뮤지엄’ ‘탭’ 3개 존(zone)으로 이뤄졌다. 이곳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브루어리 존에는 양조·발효·저장 시설이 있다. 뮤지엄 존은 에비스를 넘어 일본 맥주 전체의 역사를 볼 수 있는 박물관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과거 일본 맥줏집에선 단무지처럼 반달 모양으로 얇게 썬 무에 간장을 곁들여 안주로 냈다는 게 흥미로웠다.
방문객에게 가장 인기 있는 곳은 탭 존이다. 브루어리 존에서 생산한 맥주를 한정 판매한다. 보통 4가지 맥주가 있는데, ‘에비스 ∞(인피니티)’와 ‘에비스 ∞ 블랙’은 늘 있고 나머지 둘은 시즌 따라 바뀐다. 에비스 ∞는 과거 에비스 공장에서 사용하던 효모와 독일산 홉으로 양조한, 에비스의 DNA를 계승한 맥주. 에비스 ∞ 블랙은 오렌지를 연상케 하는 향을 지닌 ‘만다리나 바바리아’ 홉을 사용해 흑맥주 특유의 깊은 풍미를 살리면서도 과일 향이 어우러진 부드러운 맛이 일품이다.
한 잔씩 맛볼 수도 있고, 4가지 맥주를 작은 잔에 모두 담아 내주는 시음 세트도 있다. 매콤짭짤한 견과류, 치즈, 소시지, 로스트비프 샌드위치 등 맥주와 찰떡궁합인 안주도 기가 막히게 갖췄다.
도쿄 최고급 쇼핑·미식·문화 중심지 긴자 한복판에 있는 ‘긴자 라이온’에 들어서면 1930년대 일본으로 시간 여행 온 기분이다. 1934년 지어진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맥주홀. 2차 대전 당시 공습을 가까스로 피해 당시 인테리어와 분위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문화재로 지정했다. 층고가 7m로 높고 넓다. 일본인 특유의 철저한 관리 덕분인지 모자이크 벽화도, 타일 바닥도, 묵직한 목재 테이블과 의자도 낡지 않았다. 세월의 더께가 쌓여 오히려 고풍스럽다.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인테리어만큼이나 맥주는 물론 씨겨자를 찍어 먹는 소시지, 굵은 소금이 군데군데 박혀 짭짤한 프레첼 빵, 새콤한 감자 샐러드 등 음식도 독일 비어홀 그대로다. 나폴리탄 스파게티, 함박 스테이크, 오므라이스 등 일본화된 서양 음식도 두루 맛있다. 장화 모양 잔에 생맥주 1L(리터)가 담긴 ‘부츠 글라스 생맥주’가 명물이다.
◇日맥주의 오늘 ‘삿포로 생맥주 블랙라벨 더 바’
사케에 익숙했던 일본인에게 맥주의 첫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던 듯싶다. 1854년 일본 막부 정권은 미국과 ‘가나가와 조약(미일화친조약)’을 맺었다. 일본의 쇄국 정책을 미국이 무력시위를 통해 끝낸 조약이 체결된 후 열린 연회에서 미 해군 매튜 페리 제독은 맥주를 대접했다. 에도 막부 관료는 맥주 맛이 “쓴 말 오줌 같다”고 혹평했다.
맥주의 인기가 상승한 건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다. 전쟁 기간 일본 정부는 쌀을 전략물자로 지정했고, 술 제조에 사용되는 쌀을 제한·금지했다. 사케 생산이 급감할 수밖에 없었다. 맥주는 반사이익을 얻으며 소비가 크게 늘었고, 일본인이 가장 많이 마시는 술 자리를 꿰찼다.
규모가 커진 맥주 시장을 놓고 업체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였고, 맥주 품질은 세계적 수준으로 올라섰다. 서양식으로는 드라이(dry)하다고 표현하는, 단맛 적고 쓴맛과 청량감 강한 ‘가라구치(辛口)’와 맹렬한 탄산감, 풍부한 홉 풍미, 잡미를 입안에 남기지 않고 재빨리 사라지는 깔끔한 뒷맛 등 일본 맥주의 전반적인 특징이 형성됐다.
일본 대형 맥주 회사들은 자신들의 맥주를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 플래그십 매장을 운영한다. 긴자에 있는 ‘삿포로 생맥주 블랙라벨 더 바(이하 더 바)’는 일본인 맥주 마니아와 외국인 관광객이 ‘오픈 런’하는 명소. 한 달 평균 1만1000명이 찾는데 그중 30%가 외국인 관광객이다.
테이블 없이 카운터뿐인데 걸터앉을 스툴(높은 의자)도 없다. 서서 마셔야 한다. 맥주는 따르는 방식에 따라 ‘퍼펙트 푸어’ ‘퍼스트 푸어’ ‘하이브리드 푸어’ 단 세 가지. 1인당 2잔까지만 주문 가능하다. 취하기 위해 마시는 게 아닌, 맥주를 제대로 맛보라는 취지다. 모든 맥주는 매번 새 잔에 따라준다. 더 바 매니저 마쓰오 에이치씨는 “맥주는 첫 잔이 가장 맛있다는 걸 체험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이를 위해 항상 맥주잔 1000개를 보유하고 있다.
카운터 뒤에 금색과 은색 탭(tap·생맥주를 따르는 장치)이 2개 설치돼 있었다. “먼저 ‘퍼펙트’를 드셔 보세요.” 마쓰오 매니저가 삿포로에서 완벽한 맥주 맛을 위해 새롭게 개발했다는 금색 탭으로 맥주와 거품 비율을 정확하게 7대3으로 따라 내줬다. 입술에 닿은 거품이 우유 거품처럼 곱고 부드러웠다. 섭씨 2~6도로 완벽하게 칠링된 맥주가 입안으로 흘러들어왔다. 풍부한 홉 향과 씁쓸하면서도 고소한 감칠맛이 입안에 폭풍처럼 휘몰아치더니 깔끔하게 사라졌다.
“이번에는 ‘퍼스트’를 경험해보시죠.” 마쓰오 매니저가 은색 탭을 잡아당겼다. 퍼펙트보다 맥주가 따라져 나오는 속도가 빨랐다. 맥주를 마셔보니 더욱 강한 탄산감과 청량감이 느껴졌다. 서로 다르게 느껴졌지만, 놀랍게도 같은 맥주. 삿포로 대표 브랜드 ‘블랙라벨’이다.
“퍼펙트는 삿포로 블랙라벨이 추구하는 3C, 즉 부드러운 거품(creamy)·투명하고 시원한 청량감(clear)·최적의 차가운 온도(cold)로 하루 첫 잔의 감동을 극대화한 생맥주입니다. 퍼스트는 삿포로에서 과거 사용하던 탭을 사용해 단번에 따릅니다. 맥주 안에 더 많은 탄산을 남겨 마셨을 때 시원한 청량감을 느끼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하이브리드는 퍼펙트 방식으로 따른 맥주에 퍼스트 방식으로 따른 거품을 얹은 혼종(하이브리드)이고요.”
산토리는 도쿄 중심 마루노우치에 ‘마스터즈 드림 하우스’를 운영한다. 경쟁 업체들보다 훨씬 늦은 1960년대 맥주 업계에 뛰어들었고, 차별화를 위해 더 풍미가 진한 라거 ‘프리미엄 몰츠’로 승부수를 띄웠다. ‘양조가의 꿈’이라는 뜻의 ‘마스터즈 드림(Master’s Dream)’은 산토리의 최상위 라거 브랜드이며, 마스터즈 드림 하우스는 이 브랜드를 제대로 선보이기 위해 마련한 매장이다.
마스터즈 드림을 주문했다. 잠시 후 완벽하게 봉긋한 거품 모자를 쓴 맥주잔이 등장했다. 보드라운 거품이 입술에 닿았다. 이어 빵 껍질·비스킷을 연상케 하는 구수한 맥주가 입안을 적셨다. 조청 같은 단맛이 과하지 않았다. 맥주를 삼키자 허브와 꽃을 연상케 하는 화사한 홉 향이 상쾌하게 목에서 올라와 코를 간질였다. 일본 맥주치고는 묵직한 풍미와 바디감으로, 단번에 들이켜기보다는 한 모금씩 끊어 마시며 음미해야 할 맥주 같았다.
프리미엄 몰츠 650·980엔, 마스터즈 드림 730엔. 마스터즈 드림과 프리미엄 몰츠 각 2종 총 4잔으로 구성된 시음 세트(1500엔)도 있다. 위스키로 이름난 산토리답게 위스키로 만드는 하이볼, 와인 등 다양한 주종을 갖췄다. 레스토랑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음식도 다양하다. 점심 특선 메뉴는 주변 직장인들이 줄 서서 먹을 정도로 가성비가 좋다.
◇日 맥주의 미래 크래프트 탭룸
1994년 일본 맥주 업계에 ‘혁명’이 일어났다. 엄격한 세법 때문에 그때까지 일본에는 소규모 양조장이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해 일본 정부가 규제를 완화하며 새로운 세대의 크래프트(수제) 맥주 제조업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도쿄에는 크래프트 맥주 업체가 직접 운영하거나 다양한 브랜드의 크래프트 맥주를 선별해 놓은 탭룸 매장이 무수히 많다.
한국에서도 ‘부엉이 맥주’로 유명한 ‘히타치노 네스트(Hitachino Nest)’는 190여 년 역사의 기우치 사케 양조장이 주세법이 완화되자 도전해 성공한 크래프트 맥주. 세계 맥주 대회 다크 부문 1위를 수상했고, 세계 20여 국으로 수출된다. ‘브루잉 랩’을 도쿄역·간다 등 도쿄 내 여러 곳 운영한다. ‘베어드 비어(Baird Beer)’는 미국인 브라이언 베어드가 시즈오카현 누마즈에서 시작한 양조장으로, 일본 크래프트 맥주 문화 확산의 주역이다. IPA 등 다양한 스타일의 맥주를 하라주쿠·나카메구로·타카다노바바 탭룸에서 선보인다.
‘극동(極東)’을 뜻하는 ‘파 이스트(Far East)’를 맥주 양조의 핵심인 효모를 의미하는 ‘이스트(yeast)’로 재치 있게 바꾼 ‘파 이스트 브루잉 컴퍼니(Far Yeast Brewing Company)’는 야마나시현 산촌 마을 고스게(小菅)에 있다. 북유럽과 비슷한 기후 덕분인지 2011년 맥주를 생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아졌다. 시나가와에 매장이 있다.
한국에는 ‘뽀빠이’로 흔히 알려진 ‘파파이(Popeye)’는 일본 크래프트 맥주계 전설. 탭 숫자가 무려 70개. 매일 선보이는 맥주가 70가지란 뜻이다. 맥주가 자주 바뀌니 인터넷 홈페이지(70beersontap.com)를 확인하고 방문하길 권한다. 시부야 ‘굿 비어 포셋(Goodbeer Faucets)’도 방대한 수제 맥주 리스트를 자랑한다. 시즌에 따라 바뀌는 다양한 스타일의 맥주를 40여 종 맛볼 수 있다.
신주쿠 ‘브뤼셀 비어 프로젝트(Brussels Beer Project)’는 벨기에 양조장의 도쿄 지점. 2017년부터 교토에서 벨기에에서 온 양조가들이 정통 벨기에 스타일 맥주와 함께 유자 등 일본의 맛과 향을 가미한 맥주를 빚고 있다. 다이칸야마 역에서 북동쪽으로 3분쯤 걸으면 나오는 ‘스프링 밸리 브루어리(Spring Valley Brewery)’는 기린맥주가 2012년 사내 벤처로 설립한 크래프트 양조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