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8일 미국 뉴욕 소더비 경매장에 믿기 어려운 액수가 등장했다. 2억3640만달러(약 3460억원), 현대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價)가 경신되는 장면이었다. 천문학적 가격의 주인공은 ‘황금의 화가’로 불리는 오스트리아 거장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가 그린 ‘엘리자베스 레더러의 초상’. 여인의 몸을 감싼 화려한 장식과 색채, 세상을 떠난 지 100년이 넘은 지금도 그가 여전히 세계 미술사의 정점에 서 있는 화가임을 증명한다.

오스트리아에는 클림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또 한 명의 거장이 있다. 에곤 실레(1890~1918). 28세로 요절했지만 그의 작품은 수백억원을 호가하며 클림트의 뒤를 잇는 전설이 됐다. 흥미로운 점은 두 사람이 특별한 사제 관계였다는 사실이다. 클림트는 실레에게 빈 미술계의 왕좌를 물려줬고, 실레는 스승의 유산을 딛고 표현주의라는 새 문을 열었다. 빈 모더니즘의 황금기를 함께 만들어낸 두 천재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재능이 있느냐고? 너무나도”

에곤 실레가 본인과 그의 스승 클림트를 한 화면에 담은 ‘은둔자’(1912). /레오폴트 미술관

1907년 열일곱 살의 실레는 옅은 갈색 일본 종이에 그린 드로잉 뭉치를 품에 안고 빈 미술계의 제왕 클림트의 작업실을 찾아간다. 소년은 떨리는 손으로 드로잉을 꺼내 클림트 앞에 조심스럽게 내민다. 당대 최고의 데생 실력을 자랑하던 클림트가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겨보는 동안 소년은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그의 손끝만을 바라보고 있다. 마침내 클림트가 고개를 들었을 때 실레는 오랫동안 마음속을 짓눌러 온 질문을 불쑥 꺼낸다. “선생님, 제게 재능이 있습니까?”

클림트의 대답은 단호하고도 따뜻했다. “재능? 그래! 너무 많다.” 안도의 숨을 내쉰 실레는 용기를 내 대담하게 제안한다. “선생님, 제 드로잉 여러 장을 선생님의 드로잉 한 점과 교환해 주실 수 있을까요?” 클림트는 대답한다. “왜? 자네가 나보다 데생을 더 잘하는데.” 그날 두 사람은 실제로 드로잉을 교환했고 심지어 클림트는 실레의 그림 몇 점을 구입하기도 했다. 45세의 거장이 17세 무명 화가의 첫 번째 컬렉터가 돼준 셈이다.

클림트는 대체 그에게서 무엇을 발견했기에 이처럼 극찬했을까? 실레가 16세에 그린 ‘자화상’을 보자. 앳된 얼굴이지만 관람객을 쏘아보는 듯한 예리한 눈빛, 망설임 없이 그어 내려간 선의 독창성, 기술적 완성도는 물론이고 강렬한 자아와 개성이 꿈틀거리고 있다. 클림트는 실레라는 원석이 곧 빛나는 보석이 될 거라고 단번에 꿰뚫어본 것이다. 다만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실레는 무슨 배짱으로 무작정 클림트를 찾아갈 용기를 낸 걸까.

◇문제아의 각성

에곤 실레 드로잉 ‘자화상’(1906). /알베르티나 박물관

작은 도시 툴른의 기차역에서 일하던 역장의 아들, 실레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그가 열네 살 되던 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가정은 붕괴했고 어린 나이에 죽음과 상실을 마주해야 했다. 법적 후견인이 된 숙부는 조카를 철도 공무원으로 키우고자 했지만 실레는 완강히 거부했고 마침내 1906년 빈 미술 아카데미 입학을 허락받는다. 16세, 반에서 가장 어리지만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진 학생이었다. 하지만 그가 꿈꾸던 아카데미는 또 다른 감옥이었다. 고전주의적 이상미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매우 보수적인 교육 기관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실레의 지도 교수는 구시대적 가치를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실레의 독창적인 드로잉을 보더니 이런 폭언을 퍼부었다고 전해진다. “악마가 너를 내 수업에 배설해 놓았다.” 자신이 꿈꾸던 예술이 철저히 부정당하던 그때, 한 줄기 빛처럼 다가온 이름이 클림트였다. ‘빈 분리파 전시’에서 마주한 클림트의 황금빛 화면, 무엇보다 전통을 거부하는 당당한 메시지. 실레는 직감했다. 문제아 취급을 받는 자신의 그림이 향할 곳이 어디인지.

상처투성이 소년이 드로잉을 끌어안고 클림트의 작업실 문을 두드린 이유다. 첫 만남 이후, 클림트는 실레에게 또 하나의 잊을 수 없는 선물을 안겨준다. 1909년 자신이 주도한 대규모 전시 ‘쿤스트샤우’에 그를 초대한 것이다. 생애 처음 실레는 자신의 그림이 분리파 거장들의 작품과 나란히 걸리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당시 유럽 전역에서 일어나던 진보적 미술의 흐름을 보여주는 이곳에서 실레는 반 고흐의 타오르는 색채, 뭉크의 절규하는 붓질을 눈앞에서 마주한다. 고통과 불안, 외로움 같은 격렬한 감정이 화면 위로 분출되는 표현주의 세계가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클림트는 실레라는 조숙한 천재가 20세기 표현주의의 문을 활짝 열 수 있도록 열쇠를 쥐여준 셈이다. 실레는 아카데미에 자퇴서를 던지고 동료를 모아 신예술 그룹을 결성하며 이렇게 선언한다. “새로운 예술가는 자기 자신을 창조해야 한다.”

◇스승과 제자, 하나의 자화상

현대 미술품 경매 낙찰가 신기록을 경신한 클림트 ‘엘리자베스 레더러의 초상’(1914~1916). /소더비

1907~1909년 그려진 실레의 초기작은 클림트의 거울처럼 보인다. 금박과 은박을 입힌 화려한 화면, 인물을 평면적 패턴에 가두는 기하학적 배경. 영락없는 클림트 화풍이다. 실레는 스승을 맹목적으로 숭배한 나머지 클림트가 즐겨 입던 헐렁하고 긴 작업복을 따라 입고 말투와 사소한 행동거지까지 모방하려 했다. 그러나 1910년을 기점으로 그는 스승의 황금 양식에서 벗어나 뒤틀린 인체와 거친 선으로 화면을 채우기 시작한다. 그가 같은 해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결심이 담겨 있다. “나는 3월까지 클림트의 길을 따랐으나 오늘날 그와 정반대에 서 있습니다.”

비록 예술적 방향은 달라졌지만 두 사람의 영혼은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게 연결돼 있었다. ‘은둔자들’은 실레가 자신과 클림트를 함께 그린 ‘이중 자화상’이다. 제목처럼 실레는 두 사람을 타락한 세상을 정화하는 고독한 수행자, 즉 은둔자로 묘사했다. 검은 사제복을 입은 두 예술가는 한 몸처럼 서로 밀착해 서 있다. 뒤쪽의 늙은 클림트는 눈먼 예언자처럼 두 눈이 텅 비어 있고 앞쪽의 젊은 실레는 눈을 크게 뜨고 정면을 응시한다. 구세대와 신세대, 계승과 전복이라는 대조적인 관계, 동시에 운명적으로 하나로 묶인 존재임을 암시한다. 화면 아래 붉은 장미와 두 사람이 쓴 화관은 예술가의 소명의식과 함께 그들이 감당해야 할 고통의 무게처럼 느껴진다.

◇같은 모델, 다른 시선

클림트와 에곤 실레는 같은 여성을 모델로 그려 작품으로 남겼다. 이 작품은 에곤 실레 ‘프리데리케 마리아 비어의 초상’(1914). /개인소장

여기 두 점의 초상화가 있다. 주인공은 빈 사교계의 명사였던 프리데리케 마리아 베어(Friedericke Maria Beer). 그녀는 당대 최고의 실력을 가진 두 사람 모두에게 초상화를 의뢰할 만큼 특별한 여성이었다. 먼저 1914년 그려진 초상화에서 실레는 베어를 바닥에 눕게 한 뒤 자신은 사다리 위에 올라가 위에서 내려다보는 파격적인 조감(鳥瞰)의 시점을 택했다. 이 때문에 베어는 허공에 붕 떠 있거나 아래로 추락하는 듯한 불안정한 느낌을 준다. 몸은 ‘Z’자 형태로 비틀렸고 머리 위로 올려진 두 손은 기괴하게 꺾여 있다. 내면의 실존적 불안을 포착하려 했던 실레 특유의 표현주의적 시선이 느껴진다.

클림트 ‘프리데리케 마리아 비어의 초상’(1916). /텔아비브 미술관

2년 뒤에는 클림트가 같은 모델을 완전히 다른 분위기로 그려낸다. 흥미로운 점은 클림트가 베어에게 값비싼 모피 코트를 뒤집어쓰도록 요구했다는 것. 모피가 아니라 코트 안감의 화려한 실크 패턴이 겉으로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 그림 속 베어의 몸은 화려한 장식 패턴에 파묻힌 아름다운 문양처럼 보인다. 같은 모델, 전혀 다른 두 개의 시선으로 그려진 두 초상화는 한 시대를 살았던 스승과 제자가 얼마나 혁신적인 양식을 창안했는지 보여주는 증거다.

◇같은 해 사라진 두 개의 별

스승 클림트가 사망한 직후 에곤 실레가 그린 '죽은 자의 초상, 구스타프 클림트'(1918). /레오폴트 미술관

1918년 2월 6일 클림트가 뇌졸중과 스페인 독감 합병증으로 생을 마감한다. 임종 소식을 들은 실레는 영안실로 달려가 스승의 마지막 모습을 여러 장의 스케치로 남긴다. 거장의 죽음 앞에서 상실감과 존경심이 그림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클림트가 세상을 뜬 직후인 그해 3월 열린 ‘제49회 빈 분리파 전시회’는 이제 실레의 시대가 시작됐음을 세상에 알리는 공표였다. 작가 선정부터 작품 배치, 포스터 디자인까지 전권을 행사했고 중앙 전시장에는 그의 작품 50점을 내걸었다.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둬 그의 그림 대부분이 판매됐고, ‘화가의 아내’는 오스트리아 국립미술관에 소장되는 영예를 안았다. 국가 기관이 급진적 미술 사조인 표현주의를 공식 인정한 감격의 순간이었다. 한때 그의 작품을 외설적이라 비난하던 빈 상류층조차 그를 클림트의 정당한 후계자로 인정한다.

그러나 생애 최고의 순간은 너무나 짧게 끝나고 만다. 가을, 전 유럽을 휩쓴 스페인 독감이 빈을 덮치면서 그해 10월 31일 실레는 눈을 감는다. 클림트가 사망한 지 8개월 만이었다. 두 거장이 같은 해 잇따라 세상을 떠나면서 오스트리아 미술의 황금기도 막을 내리게 된다. 제자가 자신을 뛰어넘는 순간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위대한 스승, 스승을 딛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서되 자신의 뿌리를 결코 잊지 않은 진정한 제자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남긴다. 나는 지금 누구의 어깨 위에 서 있는가. 그리고 누구에게 내 어깨를 내어줄 것인가.